[221127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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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84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 608 후일에 생명 그칠 때
본문 전 12:1-7
100세 시대,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보편적인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어떤 매체에서 평생연령기준을 새롭게 정의했다. 미성년자의 나이를 0-17세까지로 정했다. 그 다음은 청년인데 18세부터 시작해서 몇 세 까지가 청년의 나이에 해당할 것 같은가? 18-65세까지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보자. 우리교회는 청년이 이렇게나 많은 교회이다. 아멘이신가? 청년 다음은 중년인데, 66세부터 몇살까지를 중년이라고 할 것 같은가? 66세부터 79세까지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보자. 우리 교회의 허리 역할을 하는 중년층을 이렇게나 많이 허락하셔서 참 감사하다. 그 다음은 노년층인데, 80세부터 99세까지를 말한다. 노년층에 해당하는 분들도 손 한번 들어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씀하셨다. 존경할 수 있는 신앙의 선배들을 이렇게 많이 허락하심에 또한 감사하다.
오늘은 4-6여선교회 헌신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 4-6여선교회의 연령은 61-69세까지인데, 앞에서의 기준에 따르면 이중 거의 대부분이 청년에 속하신다. 4-6여선교회 회원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거의 대다수의 여러분들도 18-79세까지의 청년층과 중년층에 속하실 것이다. 또한 80세 이상의 노년의 성도님들이더라도,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들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전도서’라는 책은 본래 설교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전도자’라고 번역하면서 이 단어가 이 책의 제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본래의 히브리어의 의미로는 ‘설교자’ 라는 의미이고, 그에 맞게 번역한다면 전도서는 설교서가 될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책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기록한 책으로, 그의 노년의 때인 B.C.935년 경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따라서 전도서는 솔로몬의 노년에 기록한 설교서 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책들은 그 책의 결론이나 주제가 가장 앞이나 가장 뒤에 위치해 있다. 전도서에도 마찬가지인데, 전1:2 를 보면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것이 전도서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핵심 주제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헛되느냐. 전도서에서는 이를 가리켜 ‘인생의 수고의 헛됨, 수고의 무익함, 인간의 쾌락과 지혜의 헛됨, 미래의 불확실성과 헛됨’이다. 모든 내용들이 전부 헛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 왜 헛되다고 말하는가? 단지 지혜자는 인생 자체가 덧없음을 말하는 것일까? 이어지는 전도서의 결론부인 11장 9절부터 마지막까지를 보면, 지혜자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됨을 말한다. 즉 전도서 1장부터 11장 초반부까지 사람의 수고와 즐거움과 지혜와 인생의 미래 등등이 헛된 이유는, 그 가운데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수고, 하나님의 없는 인생의 즐거움, 하나님이 없는 지혜, 하나님이 없는 미래는 모조리 다 헛되다는 것이다. 인생은 마치 퍼즐과도 같다. 수많은 인생 속의 퍼즐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이 인생의 퍼즐은 완성될 수 없다. 내 가정, 내 직장, 내 학업, 내 미래, 내 꿈 등 수많은 조각들이 있지만 그 조각들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주된 목적을 가리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이 존재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들과 과정들은 반드시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완성될 수 있다. 인생의 퍼즐의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나의 가정을 통해, 나의 직장과 일터를 통해, 나의 미래와 나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운데 퍼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그 모든 것들이 다 헛되다는 것이다. 그 퍼즐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완성될 수 없기 떄문에. 여러분 그렇지 않는가?
이 중에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했던 말씀인 전12:1-7 이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도서 전체의 결론부에 해당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한글로 된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전도서를 포함한 시가서는 하나님께서 저자의 문학적 기법들을 사용하셔서 기록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 전12:1-7의 내용에 대해서, 분명 한글로 읽긴 읽었는데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솔로몬이 이 설교문을 기록할 때에 당대의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며 기록했기 때문에…,
전12:1 의 내용에 대해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울 것이고 익숙하게 들어왔던 본문일 것이다. 뭔가 어려운 날이 오기 전에, 너가 청년의 때에 있을 때 너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2절부터 이어지는 7절까지의 내용이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저자의 문학적 기법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을 보자. 12:1에서 ‘곤고한 날’이란 원어의 의미로 악한 날을 의미하고,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라는 구절의 의미는, ‘“나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연한에 가까워지기 전에” 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말하는 ‘연한’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수명이다. 즉 아무 즐거움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명이 다되어 죽을 날이 가까워진 때를 의미한다.
방금 읽었던 ‘곤고한 날’과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라는 구절은 뒤에 이어지는 2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을 대표한다. 2절에서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며,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고, 힘이 있는 자들이 구부러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날이 곧 ‘곤고한 날’이요,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 즉 ‘곤고한 날이요 아무런 낙이 없다고 말할 해들’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주석가들은 설명하기를, 전도자가 2-7절에서 다양한 은유법을 사용하여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를 설명한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수명이 다하여 늙고 쇠약해져가는, 죽음을 앞둔 자의 상태라는 것이다.
2절을 보라.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지는 상황을 묘사한다. 어느날 언제부턴가 잘 보이던 사람 얼굴이 흐릿해져간다. 언제부턴가 잘 보이던 성경 글씨들이 잘 안보이기 시작한다. 언제부턴가 눈 앞이 침침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이 늙어감에 따라 시력이 점점 떨어지고 눈 앞이 흐려지는 상황들을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의 배경이 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우기인 겨울에 한번의 큰 비가 내린 이후에 구름이 다시금 몰려와서 그 뒤로 아주 장기간동안 비가 내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노년의 시기는 어떠한가?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육신이 약해져서 여러 병들에 걸리기도 하고, 여러 좋지 않은 소식들이 연달아 밀려오는 것이 마치 폭우가 쏟아진 후에 다시 먹구름이 밀려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3절을 보면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게 되리라 하는데, 이는 노년에 근력이 점점 쇠퇴하여 팔과 손이 떨리는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지는 것은 노년의 때에 허리가 굽는 것을 의미한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어진다는 것은, 맷돌질은 본래 곡식을 잘게 부수어 가루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도구이다. 그런데 따라서 이는 음식을 잘게 부수는 치아가 점차 줄어듦을 의미하고,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시력이 감퇴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4절에 길거리 문들이 닫힌다는 것은 듣는 귀가 어두워진다는 것이고, 맷돌소리가 적어지는 것은 치아가 없음으로 음식을 잘 섭취하지 못함을 의미하며, 새소리로 일어나는 것은 노년에 새벽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소리에도 깨는 것을 의미하여 결국 쇠약한 신경을 묘사한 것이고, 음악하는 여자들이 쇠한다는 것 또한 청각 기능이 쇠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노년의 때가 되면 5절과 같이 높은 곳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거리에서조차 아주 작은 일로 놀라게 될 정도로 신경이 쇠약해질 것이다. 살구나무가 꽃이 핀다는 것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정월에 살구나무가 만발하게 되는데, 만발하였을 때 흰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머리가 백발이 됨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메뚜기도 짐이 된다는 것은 극도로 쇠약해져서 아주 작은 무게도 견디기 어려운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정욕이 그친다는 것은 식욕이나 수면욕과 같은 아주 기초적인 욕구들을 의미하는데 노년의 때에 이 모든 것이 사라져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점점 초라하게 노쇠하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갈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의미한다. 조문객이 거리로 왕래하는 것은 사람이 죽어 매장되고 조문객들이 오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지며 항아리와 바퀴가 깨어지는 것은 신체의 기능을 담당하던 기관들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7절에 흙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육체가 본래 흙으로부터 만들어졌으며, 그 흙이 본래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영과 육이 서로 나뉘는 장면, 곧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결국 2-7절은 노년의 때에 신체적 기능이 점차 고장나기 시작하고, 쇠약해지기 시작하고, 근심 가운데에 있다가 결국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다시 전12:1 의 말씀을 보라. 이러한 곤고한 날이 오기 전에, 뭐하라고 말씀하는가? ‘너는 (아직)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자의 말은 한편의 훌륭한 설교가 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 설교의 말씀을 읽고, 듣고, 설파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이 없는 허무와 허영의 세월을 보내지 말고, 오직 그 인생을 하나님께 붙들린 바 된 삶을 살아가라고 외친다. 누구에게나 늙고 병들며 고장나고 멈추는 죽음의 때가 찾아올 것인데, 하나님을 떠나 아무런 소망 없이 죽음을 맞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을 확신한 채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청년의 때’ 라고 말한다. 이는 죽음의 순간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즉, 뭔가 아직 가능성이 열려 있는 때이다. 뭔가 아직은 뜻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때이다. 뭐든 목표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상태이다. 여러분, 아직 살아계신가? 그렇다면 여러분 모두가 아직 청년의 때라고 말씀하신다. 전도자는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로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창조주를 기억하라' 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 먼저는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이 의미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실천적인 부분들을 말씀드리려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보면,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주 외치던 말이 있다. ‘카르페 디엠’ 이 말의 의미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이 순간을 즐기라’는 것이다. 청년의 날에, 많은 재능이 있어서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겨질 때, 많은 능력이 있어서 뭔가 성공할 것처럼 여겨질 때, 많은 부귀 영화를 거머쥐어 인생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다고 여겨질 때, 많은 힘과 능력이 있어서 마음먹는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여겨질 때, 가장 기쁨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그 때에, ‘카르페 디엠’은 바로 너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너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하며 살라는 것이다. 반면 ‘메멘토 모리’ 라는 말이 있다. 이는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의미이다. 로마에서 개선행진을 할 때 개선장군들 뒤에서 노예가 뒤를 따라가며 이 말을 외친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너가 그렇게 잘 나가고 좋은 시절을 보내겠지만, 너에게도 죽음이 찾아올 것을 기억하고 겸손하라’ 라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가능할 것만 같은 가장 최고의 전성기 시절, 곧 청년의 시기를 보낼 때에라도 반드시 죽음이라는 것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 뒤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젊은 날에 누리는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신뢰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을 뿐이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전11:9 을 보라.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젊은 날에 나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내제되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꿈과 야망은 헛된 것일 뿐이다. 하나님 없는 업적도 헛되고, 하나님 없는 지혜도 헛되며, 하나님 없는 그 모든 것이 헛되다. 인생을 살다보면 화려하고도 풍성하게 맺혀지는 꽃과 같은 시기를 지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움을 뽐내며, 능력을 자랑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 꽃은 시들기 마련이고 그 풀잎들은 마르기 마련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인생의 끝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죽음 이후에 돌이켜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껏 살고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누려도 죽음은 피해갈 수 없으며, 그렇게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아간 댓가는 죽음 이후의 심판만 남아있을 뿐이다. 전도자의 말을 기억하라. ‘그 곤고한 날이 오기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지금 아무리 잘 나가봐야, 지금 아무리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해봐야, 지금 아무리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다 해봐야,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러므로 나를 이 땅에 심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간절히 구하라. 또한 그렇게 황금의 시기를 지날 때에 인생의 모든 의미들을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으라. 이러한 목적대로 살아갈 때에 찾아오는 어려움과 시험들을 다른 것들로 풀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두드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여러분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조주를 기억하라' 라는 말씀의 의미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우리가 멀리 해야 할 것과 가까이 해야 할 것, 두 가지를 말씀드리며 설교를 마치려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목적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젊은 날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 세상의 정욕들은 그 본질이 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결국 파멸로 인도한다. 인생 속에서 여러 괴로움 속에서 살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영원형벌만을 받게 된다니, 이 얼마나 비참하고도 괴로운 일인가. 따라서 우리는 인생 속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정욕을 멀리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딤후2:22 에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말씀한다. 바울은 ‘청년의 정욕’이라 말한다. 무한한 가능성과 큰 능력을 갖고 있다고 여겨질 때가 청년의 때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것들, 내가 이룬 것들을 바라보며,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더 의지하고 더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청년의 정욕이다.
다니엘서 4장에 기록된 느부갓네살 왕을 생각해보라. 그가 어느날 말한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뜰어내려서 소처럼 풀을 뜯고, 몸이 하늘이슬에 젖도록 그를 낮추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뭔가 내가 이룬 것들이라 자부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교만하여져서 그 젊은 날의 정욕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결국 끌어내리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를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멀리하는대신, 반대로 무엇을 가까이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지침을 준다. 시119:9 말씀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은 오직 말씀이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왜인가? 오직 말씀만이 성도의 삶과 신앙의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할 때에 정결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말씀으로만 신자는 이 땅을 살아갈 힘과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을 가까이 하라. 말씀을 듣는 설교의 자리를 가까이 하라.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자리를 가까이 하라.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결단하는 기도의 자리를 가까이 하라. 그것이 여러분에게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인도할 것이고,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삶을 살도록 인도할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을 함께 받는 노년의 시기를 지나가는 여러분들, 오늘 본문 속의 곤고한 날, 괴로운 죽음의 날은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지만 세상 어느 인생에게도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 점점 신체가 고장나기 시작하고, 연약해지기 시작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시기도 할 것이다.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우리 모두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내달려간다고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 서 있다. 이것은 공평하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병들기 시작하고, 아프기 시작하고, 고장나기 시작하고, 늙고, 눈이 멀어가고, 귀가 어두워지고, 무기력을 느끼고, 힘이 사라지고, 문득 죽음의 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때에, 세상 사람들은 결코 누리지 못하나 오직 은혜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성도만이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무엇인가? 창조주이시요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평생토록 기억하며 그분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온 모든 주의 권속들을 하나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창조주를 기억하라’ 라고 했지만, 사람은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 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택한 백성들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노년의 여러분들을 잊지 않으셨다. 이 사실에 위로를 얻으시고, 이제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 가장 최고의 복을 누리는 삶 외에는 이 땅에 다른 어떤 즐거움이나 소망이 없는 줄로 확신하시기를 바란다.
몸의 모든 기관들이 고장이 나고, 돌아가던 신체의 부품들이 하나 둘씩 멈추어갈 때, 그리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먹구름이 내 앞에 도달하였을 때에, 이제 몸과 영혼이 서로 분리가 될 그 때에, 하나님을 떠나고 대적하는 자들은 즉시 그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져 거기서 고통과 극심한 어둠에서 머물게 되지만, 평생토록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신뢰한 성도들은 즉시 완전히 거룩해져서 빛과 영광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지극히 높은 하늘로 받아들여진다. 그곳에서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하게 될 것이며, 셀 수 없는 많은 성도들과 거룩한 천사들의 무리 가운데에서, 삼위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겁고도 상상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복된 영원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 가운데 함께 하늘로 올려지어 우리의 아버지를 뵈옵는 그 감격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하시어, 끝까지 하나님만을 기억하시고 붙드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찬송가 608 후일에 생명 그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