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고통하는가 딤후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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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1-5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마주하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옵니까? 배가고플 때, 아플 때, 등등 물리적인 고통도 있지만 상황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통은 우리의 상황과 나의 성향, 바람이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나의 성향, 바램과 고통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이 일치하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그 소망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렇기에 목적이 없는 고통은 그저 우리에게 힘듬과 좌절을 주지만 목적이 있는 고통, 의미가 있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보면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라는 우화가 생각이 납니다. 어느 날 여우가 길을 가다가 높이 열려있는 포도를 보았습니다. 잘 익은 포도를 본 여우는 입에 침이 고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높아서 도저히 따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여우는 이 포도를 포기하고 계속 길을 가면서 중얼거립니다.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먹을 수가 없어.” 여우는 자신이 포도를 먹을 수 없으니까 아예 포도가 시다고 미리 폄하해 버립니다. 그렇게하면 포도를 따먹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소망을 같이 없애 버립니다. 어느새 하고싶은 것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소망을 없애버리면 고통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소망을 없애버리는 순간 우리에게 설레는 미래도 사라져 버립니다. 설레는 미래가 사라져 버릴 때 하루하루를 매너리즘에 빠진 삶만이 우리에게 남을 뿐입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를,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할 수 있음입니다.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긍정과잉의 현상이 우리를, 우리 사회를 점점 이렇게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말을 듣습니다. 넌 할 수 있어! 물론 아주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말앞에 한 가지를 더 붙입니다. 넌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정말입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나요? 네 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말이죠. 제가 학생때 방학때 마다 계획표를 짰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번도 지켜본적이 없습니다. 계획표를 짤 때 제가 불가능한 것을 짰을까요?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한 것을 짰습니다. 그런데 실행하지 못합니다. 이때 누구를 탓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자신이 최선을 다해 어떤 원칙이나 관계에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한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우리는 탈진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지 할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를 살고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모든 것을 할수 있다는 인본주의에서 나온 경향입니다.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린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제 하기 싫다를 외칩니다. 지쳐버린 것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외치는 그 사회에서 자신의 할 수 없음을 마주치기 싫은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음이 부정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고통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혹은 그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고통은 의미나 목적을 가지지 않습니다. 고통은 그저 괴로운 것, 부정적인 것으로 남아있을뿐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합니까?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사회는 우리에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대신 하기 싫음으로 둔갑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넌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지금은 안 하는거 뿐이야. 넌 모든 것을 할 수 있잖아. 이런 상태에서 고통이라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가지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소망 희망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데 어떤 것을 소망하겠습니까? 할 수 있음은 우리를 끝없이 절망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현재로 몰아넣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까? 우리의 인생의 목표, 우리가 선을 이루는 것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없음에 대한 할 수 없음입니다. 왜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있음을 말할까요?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현재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없이는 인간의 가능성에밖에 기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할 수 있음이 말하는 것은 항상 이론적입니다.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상상되는 할 수 있음입니다. 항상 만약 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만약 이랬다면 더 좋았을텐데 만약 이렇게 된다면 더 잘했을텐데. 라고 말입니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 가능합니까? 모두가 정의로운 나라 가능할까요?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습니까? 실패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주의자들도 말합니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 전체는 잘 돌아간다.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모두가 각 개인이 자신의 일에 충실합니까? 모두가 흔히 말하는 자기몫을 하면서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시겠습니까? 할 수 있는데 안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릴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책임을 돌린후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상황이 좋아집니까? 아닙니다. 그걸 반복하면서도 세상이 끊임없이 계속 할 수 있음을 말하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절망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혼자서 아무도움도 없이 할수 없음에 마주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할 수 없음을 통하여 할 수 있음에 나아갑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성령님을 힘입어 할 수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것이고 그 할 수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갑니까? 기독교의 방식을 따라 살아갑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를 규정해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중요한 방향성 한 가지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1문에는.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나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화롭게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 이라고 나옵니다. 왜 그러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영광을 돌리는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다르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은 그 자체가 가지는 빛, 업적, 탄성을 다른 이에게 비춤으로서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을 가지고 영광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누군가 상을 타서 시상대에 나가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라고 말할 때 그 시상 대상 혹은 금상의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여 주셨다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의 고백으로 영광받으십니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좋음이 아니라 옳음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는 당연하게 고통이 따라옵니다. 성경은 수없이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고통받을 것을 이야기합니다. 왜 고통받습니까? 우리의 본성과 성경의 진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본성과 목적과 진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진리를 따라 살아갈 때 고통받게 됩니다. 현대사회에서 고통은 그저 부정적인 것입니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기쁨 즉 쾌락을 주는 것은 선이고 고통을 주는 것은 악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누군가가 스스로 선택하여 고통의 짐을 지고 간다면 바보라고 놀림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고통받을 것이다 라는 성경의 말씀앞에서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 주시는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살펴봅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구분지어 줍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말합니다. 이 말들을 들을 때에 우리의 머릿속에 수많은 일들과 상황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 상황들을 떠올리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혹은 내 안에 이러한 것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아갑니까? 얼마나 돈을 사랑하며 살아갑니까? 우리가 받은 손해나 불이익은 얼마나 많이 품으면서 살아갑니까?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고통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고통받고 슬퍼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서 우리의 그리스도인됨을 나타내 보이시겠습니까? 선을 기뻐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것에 고통받지않습니까? 어떤것에 고통받고 있습니까? 내가 돈이 없는 것, 하고싶은 것을 못하는 것, 하기 싫은 것을 하는것에 고통받고 있습니까? 돌이키십시오 그것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것에 고통받습니까? 왜이러 한모습을 보면서 고통받고 슬퍼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길로 갔을 때 남은 것은 멸망의 길이고, 무기력함과 소망없음의 삶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헛됨과 결국 이룰 수 없는 절망만이 남아있는 길입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해야 합니다. 이 말씀앞에서 우리의 현재상태를 바라보십시오. 죄악이 가득합니까? 난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힘으로 스스로는 그 어떤 죄악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슬퍼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그곳에서 돌이키세요.
그저 교회를 나오는 것, 예배를 드리는 것 찬양을 드리는 것 기도를 하는 것 단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는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면서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돌이키세요 우리의 처철한 현재의 상태를 바라보고 슬퍼하세요! 그 모습에 고통하세요 그리고 우리의 할 수 없음을 고백하세요. 그 때 우리에게 무엇이 찾아옵니까? 바로 소망이 찾아옵니다. 지금은 비록 여기에서 죄악됨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지금은 비록 수많은 죄속에서 넘어지지만 잠깐잠깐 누리는 그 하나님과의 교제로 살아가지만 그때는, 그 날이 오면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고통이 더하여지는곳에, 슬픔이 더하여 지는곳에, 우리가 할 수 없음이 더 고백되어지는곳에 소망이 찾아옵니다. 소망이 더욱 커집니다. 소망은 고통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 줍니다. 이 소망은 그 소망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렇기에 목적이 없는 고통은 그저 우리에게 힘듬과 좌절을 주지만 목적이 있는 고통, 의미가 있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경건의 능력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기도합시다. 이시간 우리 속에 있는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을 두고 기도합시다. 이런것에 슬퍼하면서 우리의 힘으로 이것을 이길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오직 주님만이 이러한 우리를 구원해 주실수 있음을 두고 나아갑시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