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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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식을 지향하는 사회 >
국내 온라인 플랫폼 중에 단연 1위는 네이버라고 할 수 있죠. 그런 네이버 만큼이나 큰 시장 지배력을 가진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카카오입니다. 이 카카오가 2015에 ‘루빅스’라는 시스템을 도입했어요. 그리고 이어서 네이버는 2017년에 ‘에어스’라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이 두 시스템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AI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빅데이터로 맞춤형 추천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카카오톡 메뉴창 맨 위에 보면 광고가 뜨죠. 그런데 사람들마다 다 다른 광고가 나와요. 평소에 여행에 관해서 자주 검색을 했던 사람은 여행사 광고가 뜨고, 캠핑에 관해서 검색하는 사람은 캠핑용품 광고가 뜨는 거죠.
맞춤형 정보 추천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논쟁의 소지도 있어요.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편향된 관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안고 있어요. 특히 비대면 때문에 더 몰리게 된 영상 소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뭘 하나 검색하면 거기에 연관된 수 많은 영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화면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도록 AI가 그 환경을 조성해 주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편식을 지향하게 되는 거죠. 한 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이 개발된 것 뿐입니다.
< 신앙의 편식 : 불완전함을 인정하라 >
우리의 신앙도 편식하는 신앙인 경우가 더 많아요. 교리를 강조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교리가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전통과 문화를 강조하게 되면 거기에 목숨을 걸고 지키게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부분적인 인식과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마치 전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보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정답이라고 주장하면서 배타적이 돼버립니다.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더 도드라지게 보면... 그 때부터 복음은 파편화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이 대단한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했다는 거예요.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 자신도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위대한 사도로 활동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그토록 애썼잖아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여겼던 그이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완전하지 못한 자신을 시인하고 있어요. 그 누구보다 앞선 것 같아 보이지만 아무와 비교해도 별로 나을 것 없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한 거죠.
우리는 우리의 약한 것은 감추고, 강한 것은 드러내는데 익숙해요. 이번 명절에 울산에 있는 저희 본가와 창녕에 있는 처가를 다녀왔는데. 저희 집 두 아들이 뭐 잘난게 없어요. 그런데 양가의 두 할아버지, 할머니는 뭘 그렇게 자랑하고 싶은지 만나는 사람한테 쟤는 뭘 잘하고, 쟤는 뭘 잘한다~고 별거 아닌 걸 가지고도 막 자랑이 하고 싶으셨나 봐요. 뭐라도 내세우고 싶은게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출이 되는 게 인지상정이에요.
하물며 바울은 “바울”하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부러울만큼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뤄낸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바울의 신앙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하지만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의 의로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바울이 자신을 낮추고, 아직도 자기는 멀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바로 바울은 자기가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서 라고 해요. 바울이 잊어버린 것은 자신의 죄였어요.
저는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예전에 교회를 박해했던 자신의 씻을 수 없다는 죄책감이 없었을까?” 먼저는 과거의 그날 자신이 박해했던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과거의 그 때 돌로 쳐 죽였던 그 스데반의 얼굴이 자신의 마음을 옥죄고, 죄책감에 시달렸을 수도 있어요. 일반적 우리의 모습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마음의 빚을 진 사람, 누군가에게 저질러서는 안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 모두 그 마음의 빚을 값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 빚은 평생 마음에 가지고 가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수련하고, 단련해도 / 이성적,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고, 늘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잊지 못한 채 거기에 매인 삶을 살게 되는 거죠.
< 누구에게나 지하실이 있다 >
한양대 국어교육과 정재찬 교수가 쓴 <누구에게나 지하실이 있다>는 글이 있습니다. 한 편의 글을 다 대변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복잡다단한 현실을 사는 데에 어찌 긍정의 힘만 있고, 부정은 힘이 없겠습니까. 우리 마음도, 현실도, 그렇게 심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란 놈부터가 그리 녹록하거나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세월이 약이다”는 말이 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지던가요? 마음을 고쳐먹고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으로 다시 살아내려고 달려들지만 세월이 조금만 지나도 우리는 또 실망하고, 또 반성하고 다시 똑같은 결심을 새로운 각오로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리기 싫어서 그때그때 그 긴장감을 완화시켜 가면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관대함이라는 명분으로, 자기반성과 회개라는 도구로 내 속에 스며있는 죄의 음습함을 적당히 신선한 공기로 환기시키기는 거예요. 그럼 당분간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으니까요.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 본 사람이 있을까요? 온 세상을 이 잡듯이 뒤져봐도 그런 사람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지난 날의 실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 마음 편하려고 잊고 사는 사건들도 많을 거에요. 신앙을 그런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늘 같은 죄를 저지르면서도 주일에 예배드리면서 회개 했다는 명분으로 툭툭 털고 다시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 바울 : 앞을 내다보는 인생 >
하지만 바울이 말한 과거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툭툭털고 일어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겠다는 게 아닙니다. 지난 날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를 단순히 이제는 잊어버리고 사는 수준이 아니라 나의 죄를, 나의 실수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더 나은 삶을 사는 길에 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 모든 짐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는 유일한 길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이미 한 일. 그것이 좋은 과거든, 나쁜 과거든 지나간 과거가 현재 나의 영적 성장이나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모두 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더 자라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그 날부터였어요. 자신의 죄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다시는 그 죄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옛 죄들을 담당하셨고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거를 청산하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잡으려고”라고 번역된 (분사: 에페크-테이 노메노스)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분사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신약성경에서 이 한 곳에서만 사용합니다. 여기에 쓰기 위해서 두 단어를 합친 합성어예요. 경기장에서 이뤄지는 생동감 있는 장면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경주에 참여한 선수들이 옆, 뒤 사방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눈앞에 보이는 목표만을 바라보면서 전력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일부러 이런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라는 강렬한 소망을 전하는 메시지예요. 바울의 달리기는 목적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푯대를 향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목표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것 중에 누군가에게는 실수와 오해가 있을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슬픔과 고통일 수 있어요. 혹시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며 하는 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좋은 과거든지 나쁜 과거든지 지금 나의 영적인 성정이나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 과거는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신앙이 나의 삶의 방향에서 이탈해 있거나, 기력이 약해져서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계신 분들이 계신가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이렇게 번역했어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던졌습니다.” 고 번역했어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몸을 던지듯 달려나가는 그런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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