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07UNLIKELY
Conscientiousness
0.15UNLIKELY
Extraversion
0.27UNLIKELY
Agreeableness
0.46UNLIKELY
Emotional Range
0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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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3–16 (NKRV)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생명은 자라게 한다
신앙의 본질은 자라나는데 있습니다.
성장 또는 성숙이라고도 하는데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지덕행을 온전히 갖춘 사람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성장은 단순히 성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에 더 힘이 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코로나로 모두가 위기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도 더 신실한 성도로 자라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목표에 대해서 예수님의 성숙한 모습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온전케 된 사람, 즉 성숙한 사람은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가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랄 수 있나요?
<첫째,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에베소서 4장에서는 두 가지 하나 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령의 하나 됨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임한 같은 구원과 같은 믿음, 그리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을 근거로 한 하나님과 한 주님으로 보장된 교회를 한 성령님께서 실현하신 것을 하나 됨이라고 합니다.
본래 이 하나 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 신인류를 이 땅에 창조하신 것.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말 그대도 새로운 부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킨다는 것은 교회의 탄생을 말하면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성령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영적인 무형의 사건.
바로 교회의 하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공동체입니다.(3절)
우리 신앙의 많은 요소들이 형태를 달리하고, 변할 수 있지만 성령의 하나 됨, 교회의 하나 됨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 됨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번 하나 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됨입니다.
앞에서 성령의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한 ‘헤노테스’라는 명사가 여기서도 반복해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총 3번 에베소서 4장에서 두 번, 골로새서에서 한 번 사용되는데 이 하나 됨 모두 ‘상태’를 가리킵니다.
3절에서 그 상태를 지켜야 하고, 13절에서는 그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합니다.
믿음과 지식이 하나 된 상태.
즉, 개인에게는 삶과 신앙의 일치된 상태에서 믿음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 상식의 영역, 자녀의 영역을 분리시키거나 구분 짓지 않고, 삶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곧 내 삶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교회의 공동체로서는 공동의 신앙이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신조나 신앙고백만 일치하면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신앙의 일치한 마음의 일치를 뜻합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질과 사명 그리고 교회에 대한 관계 등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일치를 뜻합니다.
교회 안에서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어긋나게 될 때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지식에 일치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를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이루신 사랑을 성령님께서 실현시키신 그 하나 됨의 상태처럼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인 수준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신앙의 하나 됨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모임이 다시 예전처럼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모임을 진행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면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의 일치와 신앙의 일치가 자동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까요?
혹시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삶과 분리되고, 구분지어져 있다면 지금 우리에게 놓인 영적 사태가 현장의 모임만 해결되면 다시 회복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안 모이니까?
서로에 대한 말이 줄고, 문제가 더 안 일어나는 건 아닌가요?
교회와 성도 각자가 이루어야 하는 믿음과 지식의 하나 됨은 상황에 의해서 덩달아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요즘 심방을 해보면 누군가는 힘들어 하며 갈증을 느끼고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어느 때보다 영적으로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혼자 있어도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 사람은 이 시기가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시간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목표점입니다.
누군가 떠먹여 주기를 바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저희 아들이 머리 쓰는 건 좋아 하는데 몸 쓰는 건 좀 약하거든요.
친구들이랑 술래잡기를 해도 맨날 자기만 술래를 하고, 공으로 하는 운동도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 느립니다.
얘가 어떤 얘냐 하면 4살 때 놀이터에서 놀다가 몸 쓰는 놀이에서 좀 밀리면 친구들 앞에서 알파벳을 외웠어요.
제가 늘 하는 말이 잘 하고 싶으면 연습을 하라는 말이에요.
당연한 이치잖아요?
은혜를 사모하면 엎드려야 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결단해야 하고, 믿는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코로나 이전에나 지금이나, 코로나 이후 시대에 추구해야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성령님의 하나 됨과 같이 우리의 믿음과 지식이 하라가 되어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연결 되어야 합니다.
16절에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된다는 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주권과 사역의 주도권을 잘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주님은 성도와 교회를 돌보시고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교회인 우리는 성도 간에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기 자기 분량대로 몸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몸의 일부가 따로 떨어져 나가거나, 그 연결이 끊어지게 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하나 됨과 같이 한 몸의 각 지체들로서 계속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쁜 소식
며칠 전에 우리 교회 젊은 부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첫째 아이 딸 출산 소식을 전해줬어요.
코로나 때문에 계속 못나오고 있었는데 마침 제 생일과 태어난 아이 생일이 같다면서 안부 차 연락을 해 왔습니다.
함께 새가족 교육을 하면서 결혼 초기부터 봤던 가정인데 늘 볼 때마다 제가 좋은 소식 없냐고 물어봤었거든요.
결혼 4년 만에 아기를 낳자마자 늘 물어보던 제가 생각나서 연락을 해 줬다는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요.
코로나가 우리를 연결을 막고, 각 마디의 이음 부위가 떨어져 나가 홀로 있게 만들더라도 머리되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생명을 공급하시며 끊임없이 교회를 붙드시고 돕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교회를 마치 민주주의로 이루어진 사회처럼 여기면서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것을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자기 것인 마냥 사유화하고, 일방적인 소통과 명령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두 극단적인 모습은 모두 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업신여기는 모습입니다.
머리에 온 몸의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기능을 실천하며 완전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각 성도들도 은사를 따라 맡겨진 자리에서 주어진 책임을 이행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완전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는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의존적인 유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마다 신체부위는 다르지만 복잡하게 엮여 있습니다.
눈은 보는 역할을 완전히 해야 하고, 귀는 듣는 역할을 완전히 해야 합니다.
모든 기관들이 그 맡은바 은혜의 분량을 따라 일을 하지 못하면 절대로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지도자라고 하면서 먼저 섬기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지도자의 권위를 가질 자격이 없는 것이고, 동시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이를 따라야만 온전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에게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가장 최적화된 상황과 환경이 갖춰진다고 해도 인생의 불완전함 속에 늘 한계는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 개인을 볼 때나 교회를 바라볼 때 그 자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하는 모습이나, 교회의 만족스럽지 못한 결정 등. 진리의 날 선 검으로는 누구라도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그 한계 앞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과제는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기반을 둔 영적과제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큰 슬픔 가운데서도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큰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절대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라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는 사랑으로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굳어지고, 사랑은 진리로 강하게 하지 않으면 너무 물러진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온전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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