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이 내 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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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22–24 (NKRV)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plot. 정) 굴원의 죽음
전국시대 말기 세상이 소용돌이 치던 시대에 굴원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굴원은 젊어서 부터 학식이 뛰어났고, 초나라 왕의 신임을 받아 젊은 나이에 (26세)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무능한 통치자와 부패한 기득권 세력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갈수록 국력은 쇠퇴하였고, 백성들의 생계는 무너져 신음했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부패한 세력에 맞서 싸우던 굴원을 결국 간신들의 모함으로 정계에서 쫓겨나 먼 곳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 때 추방된 곳에서 굴원과 그를 알아본 한 어부와 나눈 대화가 사마천의 <사기>에 남아서 전해집니다. "아니 어째서 당신이 여끼까지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어부에게 굴원이 말합니다. "세상은 온통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모두가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거세혼탁[擧世混濁] 유아독청[唯我獨淸] 중인개취[衆人皆醉] 유아독성[唯我獨醒]) 라고 하자 어부는 그에게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 수 없다고, 세상이 혼탁하면 그 흐름에 따라 물결을 바꾸고,세상이 다 취했는데 어찌 혼자 취하지 않는 것이냐며 나무랍니다.
그러자 다시 굴원은 "머리를 감은 사람은 갓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몸을 씻은 사람은 옷에 묻은 티끌을 떨어버리는데 깨끗한 사람이 더러운 것을 묻히고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장강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례를 지낼지언정 어찌 깨끗한 몸으로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 쓴단 말이오"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굴원은 그 후에 자신의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멱라수에 스스로 투신해 죽었습니다.
plot. 반) 안전한 길을 찾는 사람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세상에서 내 소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희고, 깨끗한 삶을 살고 싶어도 세상이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굴원이 선택했던 올곧은 삶으로 살다가 죽는 것보다 차라리 그 어부가 말한 비아냥에 더 공감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상은 대세를 따라가면서 적당히 옳고, 적당히 깨끗하고, 적당히 취한 듯 그렇게 시대의 흐름과 물결을 따라가는 것이 지혜롭다 여기게 됐습니다. 그게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의 끝에서 내 안전을 보장해 주시 못하고,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plot. 정) 성령에 매여 따라온 길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온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온전히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지상교회를 더 견고하게 세우며 큰 일을 이루고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직감했으면서도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여 생명까지라도 바치겠다는 바울의 비장한 각오를 전해줍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에 매여 따라' 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도행전 9:2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잡아오려고 했던 사도 바울이 이제는 오히려 성령님께 결박당하여 그 강권하시는 데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바울은 어느 도시를 가든지 감옥에 갇히고, 시련을 당하고, 온갖 환란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이미 성령께서 경고하셨다고 해요. 알면서도 복음을 들고 위험천만한 도시들을 향해 갔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그를 결박하시어 예루살렘에 가도록 계속 강권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에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을 향하는 사도 바울의 길을 막아서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21:4에 두로에서 그 곳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끝까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바울을 전송할 때 두로의 제자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해요.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과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서 빌립 집사님의 집에 머무는 동안에도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지고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합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여, 고난 당할 모습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빌립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울면서 바울의 행보를 막으려 했어요. 하지만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그곳에 안전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면서까지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따라가는 거였습니다.
plot. 정) 그리스도인의 안전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안전하다'는 의미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영혼이 안전하고, 내 삶이 안전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상이 주는 안전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안전은 내 삶이 내 계획대로 원활하게 진행되면서 내 목표와 내 뜻이 이뤄지는 것을 안전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안전은 ‘우리 주님의 품 안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예루살렘을 향해 갈 때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을까요?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환란과 고통이 있으며 예수님이 걸으셨던 버림받음의 길과 같다는 걸 바울은 알고 있었어요. 바울의 목표와 결단이 있었습니다. 24절에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선언한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의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그치지 않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린도전서 15:31에서 외쳤습니다. 바울을 막아 세울 수 있는 것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고,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예루살렘에서 받게 될 고난이 거의 확실했지만, 내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 바로 로마제국에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문이 열리고, 복음을 들고 서바나에 방문하는 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당장 그 앞에 닥친 임박한 위기와 시련이 막아설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인생의 계획 보다, 그 무엇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plot. 반) 우리의 현주소
하지만 교회의 현주소 그렇지 않다. 한 기독교관련 데이터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한국교회 신뢰도는 32%에서 21%로 급락했습니다. 이것은 교회발 감염비율이 얼마냐의 문제보다도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코 앞으로 다가온 교회 공동체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과연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바라보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냐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교회의 재정과 운영에만 급급한 모습으로 전도의 문을 막고,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았던 것은 아닌가요?
20세기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고난받기를 거부하고, 편안하고, 득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나는 아닌데~'라고 손사례를 치고 싶지만 최소한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렇습니다.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통계기관에서 2월 19일에 발표한 통계 내용 중에 <현재 교회 출석 중인 청년 3명 중 1명 이상이 '10년 후 교회 안 나갈 것 같다'는 응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다음 세대가 가지고 있는 '사회 인식'이 곧 '신앙의 인식'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더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무력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하나님보다 더 힘 있어 보이는 세상의 헛된 신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만듭니다. 더 힘 있고, 매력 있어 보이는 돈과 권력, 세상의 성공과 일명 잘나간다는 수식어가 우리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정도의 차이를 두고서, "이만하면 됐다." "나는 할 만큼 했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조차도 그렇습니다. "목사도 사람인데~" 쉬어야겠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또 다른 내 역할을 위해서 옷을 갈아입고, 가면을 쓰고 싶을 때가 생깁니다. 더는 갈림길에 서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택일의 문제를 감수할 힘이 없습니다. 엄청난 무력감에 빠져있습니다.
plot. 정) 세상을 거스르는 믿음
우리 주님이 능력이 없으십니까? 우리 주님이 무기력하고, 무력한 백성을 배출하는 분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한 능력에 사로잡힐 때 우리 앞에 놓인 두려움과 염려, 고통과 고난 속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분께 우리의 안전을 내어 맡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의 길이 그랬고, 복음을 전하며 여러 환란을 당했던 베드로와 사도들, 그리고 바울의 길이 그랬습니다. 이 모습들을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거르스는 믿음을 가르쳐 줍니다.
삶에서 안전이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감당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우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가야 하는 길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라면 우리 모두 그 길에 동참하길 소망합니다.
plot. 정) 선한 능력으로 /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계십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독일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가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게 됐습니다. 당시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청빙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을 아끼는 미국인들의 만류대로 미국에 머무른다면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해 독일로 귀국하여 반나치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4월 9일 새벽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마지막 유언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며, 그 길에서 주님의 영광만을 바라는 순결한 주의 백성입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그 길이 내 길이라면 그 자리가 환란과 핍박의 자리든지, 버림받음의 길이든지 우리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거부하며 하나님이 보장해주시는 안전을 따라 살기를 소망합시다. 그 길에서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이 땅의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서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함께 이 찬양을 불렀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 회퍼 목사님께서 옥중에서 자신의 약혼자였던 마리아와 2년간 주고받은 편지 중에 형이 집행되기 얼마 전인 1944. 12. 19.에 보낸 ‘마지막 편지’에 담긴 ‘성탄 시’에 독일의 음악가가 곡을 붙여 독일 찬송가로 불려지고 있는 곡입니다.
환멸과 절망이 세상을 뒤덮을 때 세상을 뒤집어 엎을 반전의 희망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선하신 권능의 손이 아침에나 저녁에나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그 능력의 손길에 사로잡혀 이끄시는 대로 가보는 겁니다.
<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싸여(Von guten Mächten)>
신실하신 주님의 팔에 고요히 둘러싸인 보호와 위로 놀라워라
오늘도 나는 억새처럼 함께 살며 활짝 열린 가슴으로 새로운 해 맞으렵니다.
지나간 날들 우리 마음 괴롭히며 악한 날들 무거운 짐 되어 누를지라도
주여, 간절하게 구하는 영혼에 이미 예비하신 구원을 주소서
쓰디쓴 무거운 고난의 잔 넘치도록 채워서 주실지라도
당신의 선하신 사랑의 손에서 두려움 없이 감사하며 그 잔 받으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기쁨, 눈부신 햇살 바라보는 기쁨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지나간 날들 기억하며 나의 삶 당신께 온전히 드리렵니다.
어둠 속에서 가져오신 당신의 촛불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하시며
생명의 빛 칠흑 같은 밤에도 빛을 발하니 우리로 다시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깊은 고요가 임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 나라 확장되어 갈 때
모든 주님의 자녀들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그 우렁찬 소리 듣게 하소서
주님의 강한 팔에 안겨 있는 놀라운 평화여!
낮이나 밤이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다가올 모든 날에도 변함없으시니
무슨 일 닥쳐올지라도 확신 있게 맞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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