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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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4–33 (NKRV)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서론> -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프랑스 말에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루에 두 번, 해가 뜰 때와 해가 살짝 저물어 갈 때 저 멀리 보이는 짐승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런 애매한 경계를 말합니다. 해가 뜨는 순간이면 조금 후에 개가 달려와 나를 맞이할 테고, 해가 지는 순간이면 조금 후 어두워졌을 때 늑대가 달려와 나를 물어뜯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수많은 개와 늑대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특히 2020년은 더 그랬습니다.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고,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경계태세를 취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흐려질 때 비로소 가장 뚜렷한 것이 드러납니다. 내 주위에 의지할 수 있을 것 같던 모든 것들이 다 희미해지고, 끊어졌다고 느낄 때. 모든 것이 불확실한 바로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계속 함께 있다 보니까 옆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나에게 투영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내 믿음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애매한 상태에서도 함께 하고 있으니까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흐려지고, 불확실해 질 때 마침내 나의 믿음이 어떤지 보게 됩니다.
신앙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더 확실해 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불완전하고, 늘 확신 없는 시간을 지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계획된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게 확인하십니다.
<본문보기> - 시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 나온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기록된 내용들이 그것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이미 제자들이 비슷한 풍랑을 겪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풍랑 속에서 죽기 살기로 몸부림 치는 제자들 사이로 잠에서 깬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그저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며 의구심을 가졌었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본 시선은 아직도 이분이 선지자인지, 정치적 혁명가인지 헷갈렸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제자들이 바라본 예수님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자들의 입에서 제대로 된 신앙고백 한 번 없었어요. 애매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라웠고, 그 놀라운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잘 몰라도 팔 수 있고, 잘 몰라도 말 할 수 있잖아요. 심지어 잘 몰라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의 신앙상태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의 반응이 확실히 달라졌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풍랑을 뚫고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두려워하며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비록 더디지만 제자들의 믿음은 분명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며 지내온 행보를 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오래참고 기다리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자들이 신앙고백의 자리에 이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신앙고백은 누구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이 고백은 제자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믿음은 신념도 아니고 적극적인 사고나 의지, 결단도 아닙니다. 믿음은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확신 없이, 모호해 하던 제자들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셨습니다.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너희일까 보냐”라며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한 배에 함께 계시면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기도 하셨고, 오병이어로 굶주린 수 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시며 남은 것만 12바구니가 되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함께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점점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만 따로 배에 태워 보내신 것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신앙 훈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고난과 좌절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으로 점철되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셔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제자들이 탄 배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의인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부족한 사람입니다. 잠언에서도 말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 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의인은 수 없이 넘어지고 많은 시련을 겪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호했던 신앙이 점차 확실해 지고, 그 고백이 뚜렷해지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기다리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신앙을 이끌어 주십니다.
<제목심화> - 우리에게 손 내밀어 주시는 주님
그 기다림의 끝에서 예수님은 마치 드라마 같이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이 말씀은 고생하고 지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성경 원어로 Θαρσεῖτε 라고 합니다. 원형인 θαρσέω으로 ‘안심하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힘내! 기운 내!’ 이런 용기를 북돋아 주는 표현입니다. 침상에 누인 채 데려온 중풍병자에게도, 맹인 바디매오를 고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 16:33에서 예수님이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때 “담대하라”는 말씀이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환란을 당하며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을 때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담대하라! 힘내! 기운 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신앙의 어중간한 어디쯤 머물러 있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격려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최근 서점이나 인터넷 글을 봐도 대부분 위로와 격려라는 키워드가 자주 언급됩니다.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 목록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위로의 말들과 격려의 글들이 쏟아져 나와도 그때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해 줍니다. 베드로가 그 풍랑 속에서 예수님께 가기 위해 배에서 내리는 장면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새 힘을 주신 주님께 가기 위해서 물 위를 걸어야 한다면 배 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물 위를 걷기 위해서는 배에서 내려야 하는 것처럼 기적을 경험하려면 기적의 현장에 발을 디뎌야 합니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께 물은 베드로의 말처럼 믿음으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의 신앙은 다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지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격려가 제자들에게 힘이 되고, 베드로에게 신앙의 다음 stage로 이끌었습니다.
이 배에서 일어난 일을 경험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또 한 번의 신앙 고백으로 그의 믿음의 분량이 자라고 있음을 확인 시켜줍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을 다시 일으키는 회복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담긴 이 은혜는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물속에 빠질 때 그를 건지시는 예수님을 보며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호기롭게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갈 때, 거센 바람 때문에 두려워하며 물에 빠져가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 두려움과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눈앞에서 손 내미시는 주님을 보지 못한 채 염려라는 늪에 잠식되어가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그 메시지에 은혜 받았다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뿐이고, 변화되기 전 우리 옛사람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돌아서는 죄의 회복력에 놀랄 때가 얼마나 많은가요. 은혜 안에서 회복되기보다 다시 죄로 물들어 버리기 쉬운 우리입니다. (안 변해도 너무 안 변하는 우리)
정승호 시인이 쓴 산문 중에 <예수에게조차 유다라는 배반자가 있었다>는 글에서 ‘예수한테도 배반자가 있었는데 하물며 나한테서야...’라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위로받았다고 합니다. 한결같이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살아갈 새 힘을 주시건만, 우리는 한결같이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가룟 유다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를 안타깝게 여기시며 손 내밀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이 베드로를 붙잡으신 것처럼 우리를 붙잡으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주님의 손에 이끌려 우리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연결하기>
잠실중앙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혼란스러운 상황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믿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이 모호한 시간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확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흐려져 희미해지고, 불확실하더라도 우리를 격려하시며 다시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내 신앙이 부모님에 물려받은 신앙이든, 내가 다져온 신앙이든, 내 신앙의 배경과 연수는 상관없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를 오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에서 내려 물 위로 한 걸음 내 딛는 것이 먼저입니다.
때로 휘몰아치는 세상풍파에 넘어져, 허우적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변하지 않고 다시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서는 죄의 회복력에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에게 손 내밀어 붙잡아 주시는 분이 여전히 우리 앞에 계십니다. 다시 잡아 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고, 다시 건져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