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귐으로

요한1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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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1) 코로나 이후 교회의 관계 맺기 형식
(설문조사 결과)
코로나가 가지고 온 여파로 생긴 교회의 대응은 장점과 문제점이 있습니다.
장점 중 하나는 공간, 시간의 제한이 해소되었다는 점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건물을 일정 시간에 갔어야했죠.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비대면 예배가 활성화되면서 집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문제점 무엇인가요? 예배에서 예배 공동체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직접 가지 않아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찬양, 메시지를 영상으로 보는게 무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 공동체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자신과 교회의 관계에서 교회가 나에게 주는 유익이 중요해집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구원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구원이 특정한 그 말씀 속에 있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근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개인주의는 우리의 문화 속에, 의식 속에 깊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그 경향이 더욱 짙어졌습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주의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생각하고 결정합니다. 단순히 이기심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이 중심이 될 뿐이죠.
지금 온라인 예배를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드리는 분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인주의적 경향이 우리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겁니다. 실제로 그러한 생각을 가지는 성도들이 코로나 이후로 더 많아지고 짙어졌습니다.
개인주의적 문화가 불 붙고 있었던데에 코로나가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결과는 교회 공동체의 약화입니다. 진정한 교제를 누리기 어려운 혹은 거의 불가능한 공동체의 약화를 불러왔습니다.

2.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 세대에게 분명히 말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살펴보면 우리 시대와 비슷한 면모가 있습니다.
(1) 영지주의 이단
요한일서를 볼 때 고려해야 할 배경 하나가 있습니다. 당시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쓸 시기를 대략 AD 90년 경입니다. 이 당시 생기기 시작했던 많은 이단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특징은 육체를 경시하고 영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단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영혼의 구원은 감춰져있는 비밀적인 특별한 지식을 알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지식을 예수님일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을 부정합니다. 그들에게 육체는 영보다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예수님같은 신이 육체로 올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만이 아는 특별한 지식을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구원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가르침 속에 담겨있는 특별한 무언가의 지식을 말하는겁니다. 그래서 영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을 추구합니다.
사실 현대에도 이런 류의 사상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에도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 설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배 속에서 특별한 메시지를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어야만 예배이고,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오해를 범하기도 합니다. 이게 더 왜곡되면 특별한 목사님의 메세지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니까 그것만을 추구하는겁니다.
예배학 수업 내용 중 “디지털 영지주의”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이게 뭐냐면 디지털 매체를 통한 설교나 예배를 통해서 깨달음, 특별한 지식을 얻기를 추구하고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죠.
개인주의적인 예배에 대한 태도가 영지주의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영지주의 이단은 개인주의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중심이 되어 깨닫는 그 특별한 지식이 구원을 가져다줄거라 오해합니다. 그러다보면 교회 공동체를 와해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깨달은 그 지식이 특별하고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서 얻을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2) 영지주의에 대응하는 요한
요한1서 1:1 (NKRV)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이 직접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누구를 듣고 보고 만졌나요? 생명의 말씀을요.
영지주의 이단들은 생명의 말씀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들이 알고 있는 특별한 지식이겠죠.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그 특별한 어떤 지식. 그게 생명의 말씀일겁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생명의 말씀은 무엇인가요? 직접 보고, 듣고, 만졌습니다. 경험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생명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듣고, 만졌습니다. 그 분이 생명의 말씀이며, 구원이십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지식을 알려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인겁니다.
2. ‘나’가 아닌 ‘우리’가 직접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
또한 본문을 보면 요한은 계속해서 ‘나’가 아닌 ‘우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 1:1–2 (NKRV)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몇 번이 반복되나요? 네 번이 나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우리를 강조합니다. 내가 알게 된 특별한 지식이 아닌, 우리가 함께 직접 만지고, 보고, 들은 예수님이 생명의 말씀이신거죠.
우리가 누군가요?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직접 보고, 듣고, 만진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심
요한1 1:
요한1서 1:2 (NKRV)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이 생명이 어떻게 되나요?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그 영원한 구원의 생명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죠. 성육신 하십니다.
성육신 하셔서 직접 보고, 듣고, 만지게 하시죠. 영으로 오셔서 특별한 지식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영지주의 이단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히 알았습니다. 요한도 예수님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뭔지 느껴지시나요?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을 알았지만 그냥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마시고, 먹고, 생활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보기도 했고 따랐습니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안 것이지 결국 자신들의 지식, 이성 안에서 예수님을 가두었습니다. 그들에게 사실 중요한건 구원을 얻게 하는 지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죠.
그러나 요한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며 진정으로 알았습니다. 또한 관계를 맺었죠. 이제 요한은 예수님을 경험하여 진정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자신이 존재하거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앎입니다.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그것과 땔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연애, 결혼 예화)
여러분 연애를 하고 계신 분이 있을 수도 있고, 연애 해보셨던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경험이 전무하신 분들은..하나님의 위로가 있길 소망합니다.
연애를 하다보면 참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저희 아내와 친구 사이로 오래 알고 지내다가 20대 후반에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거의 15년을 친구로 알고 지냈었습니다. 여러분 15년이면 상당히 긴 시간 아닌가요?
그러니까 연애를 하면 서로 너무 잘 알아서 재미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전혀 아니에요.
연애를 시작하니까 이 사람이 제가 알던 사람이랑 정말 다른 면이 많습니다. 어쩌면 아예 다른 사람을 새로 알게 된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다른겁니다.
그래서 지금 연애를 시작하고 4년이 됐고, 결혼한지 3년차인데 그러면 지금은 이제 많이 알겠지 싶나요? 그것도 전혀 아닙니다. 경험해갈수록 새로운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알아갈수록 더욱 깊은 관계가 되어가는 것이 많이 느껴집니다. 결혼이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이런거죠.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묶여서 서로 경험하고 진짜로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가면 갈수록 깊어집니다.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어떨까요? 바로 이러한 관계인겁니다. 서로 더욱 깊이 알아가는겁니다.
(4) 영원한 생명을 전함의 목적 : 사귐을 위하여
요한1서 1:3 (NKRV)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그런데 3절을 보시면 진정으로 알게 된 예수님을 전하는 목적을 말합니다. 무엇이죠?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을 전하고 알게 됨으로 인해서 교회 공동체가 사귐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귐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거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된 공동체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교제로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진정으로 안다면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할 때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랑의 춤”
어렵죠? c.s.루이스라는 작가는 이 개념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이 사랑하는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내어주십니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의 춤을 추는 관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내어주며 서로 높이고 사랑하여 서로 사랑함을 구심점으로 한 춤을 추시는겁니다.
루이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즉 상호내주하심을 서로 내어주는 사랑의 춤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께서 서로 사귐을 가지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은 지금 이 페리코레시스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서 연합하였고, 예수님을 전함으로 인해서 이 사귐 안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보면 오늘 본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 안으로 초청하는 초청장입니다. 창세 이전부터 영원토록 완전한 사랑의 관계로 서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로 그 사랑을 함께 나누는 관계로 초청하는겁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의 초청장입니다.
(5) 예수님을 알리시기 위한 자기 비하
우리가 이쯤에서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그냥 알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의 영향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능력에 있어서 인간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완전히 무능합니다. 인간의 의지나 이성으로 알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시려면 무엇이 해결되어야 하나요? 죄입니다.
죄를 해결해야만 하나님은 자신의 페리코레시스적 사랑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들을 초청하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행동을 취하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몸으로 오심으로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인간을 만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다뇨.
2.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고 인간의 손에 죽임 당하셨다.
지지난주 심강복 전도사님 설교에서 예수님께서 모질게 고난 받으신 것이 우리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만든 인간에 손에 의해서 채찍질받고, 침뱉음 받고, 고통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물론 몸의 고통이 너무 크고 힘들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힘드시고 마음이 괴로워하셨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마태복음 27:46 (NKRV)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참을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처형대에 올리신 순간 예수님은 자신이 영원 전부터 그렇게나 사랑했던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삼위일체의 사랑은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그 관계가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장 참기 어려웠고 비참했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이 두 가지 행동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생각해낼 수 있나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가요? 희생, 헌신, 순종의 사랑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희생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의 헌신을 다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하는 그 하나님의 명령이 정말 참기 힘들고 괴로웠지만 순종해내십니다.
그렇게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우리입니다. 죄인인 우리. 죄인이지만 그 죄인들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겁니다.
요한이 사랑받았습니다. 요한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서 전달받은 교회가 사랑받았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사랑받았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페리코레시스적 연합으로 초청받고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값진 이유는 뭘까요?
선한 공동체라서요?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면 복을 충족받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영지주의자들처럼 특별한 설교를 통한 지식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좋은 노랫소리들이 울려퍼지니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 값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셨기 때문에 값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값집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교제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값진겁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값진 공동체입니다.
아니 값을 매길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3.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1) 진정한 교제를 통한 공동체성 회복
교회의 공동체성이 약화되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 본문은 공동체가 왜 중요한지 명확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코로나의 영향으로 교회 공동체의 공동체성이 약화되었습니다. 나의 시간을 덜 희생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관계에서 소모되는 나의 감정, 체력, 노력을 덜 희생하고 공동체를 피합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전 사역지에서 2년 사역했는데 처음 갔을 때 코로나가 최고조였습니다. 최소 인원 예배를 드리고 성도님들은 교회에 오는게 제한됐었고 부교역자들만 1부 예배 한번을 드리며 녹화를 했었습니다.
부서 예배도 녹화 인원만 와서 녹화로 끝났습니다.
이때는 새로운 우리 부서 학생들과 성도님들을 너무 보고싶었습니다. 정말요.
그런데 코로나가 조금 완화가 되고 성도님들이 오시기 시작하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학생들도 얼굴을 익히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죄가 있잖아요? 뭐가 힘드냐면 이제 오는 학생들과 선생님들 성도님들을 실제로 케어하고, 교제도 해야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입장에서 무엇을 희생해야 하나요? 시간을 희생해야 하죠. 더 준비도 많이 해야 하고요. 신경도 많이 쓰입니다. 할 일도 많아지죠.
성도님들이 직접 교회에 오시고 보는게 너무 좋고 행복한데도 나의 것을 희생하는 것이 부담이 되는겁니다.
희생하고 헌신해야죠. 또한 순종해야하는데 이게 꽤 긴 시간 그런 희생을 하지 않았던 관성이 있어서 부담이 꽤 되는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희생, 헌신,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셨습니다. 죽기까지요.
그저 사랑하셔서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르고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할까요?
나의 희생과 헌신이 부담스러워서 관계의 회복을 피해야합니까? 아니면 나의 희생과 헌신으로 인하여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추구해야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희생과 헌신으로 인하여 우리 공동체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도록 실행으로 옮겨야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인 이유는 그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말하는거에요.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고 예수님을 전하는데, 그게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귀는거에요. 교제 안으로 들어오는겁니다.
만약 우리 길벗교회 청년부 공동체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아니죠.
희생과 헌신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한 교제가 존재하지 않는거죠.
길벗교회 청년부의 교회 공동체로서 정체성은 예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야합니다. 희생과 헌신과 순종으로요.
(2) 관계의 회복을 향하여 : 하나님, 교회 공동체 관계 회복
이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요?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그 관계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하나님과의 교제로 참여해야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외적인 조건을 다 만족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성취하셨죠.
거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믿음”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전제 조건은 다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요한이 전한 직접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인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압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전제 조건이 십자가에서의 성취와 믿음이에요. 그러나 이건 “전제 조건”입니다.
여러분 관계 맺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양방향성”입니다. 관계를 위해서는 서로 노력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진정한 관계가 서로 교제하여 깊이 알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알아가고 경험해야합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이죠.
무엇으로 알아갑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기도입니다. 이 두가지 기본 원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정말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다시 그 기본 원리로 돌아가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 참여하기 위해서요.
또한 우리는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정말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한번 좁게 생각해봅시다. 바로 옆에 있는 여러분들의 길벗 청년부, 길벗교회 모든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야하니다.
교회 공동체간의 관계의 회복의 원리는 무엇인가요. 계속 말하지만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함. 희생, 헌신, 순종.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회복의 기본원리 희생, 헌신, 순종.
내 시간을, 내가 가진 것을, 나의 불편함을 희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랑하셨듯 우리도 그 길 따라가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23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죽기 이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부인”, “십자가 짐” 다 이루시죠.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부인하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음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죠. 그 십자가는 너무 무거운 죄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셨습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그길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믿게 하셨습니다. 구원하셨죠.
그러나 그 구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삼위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로 참여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교제에 참여하는 자들이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그대로 행하는 것.
자기를 내어주고 사랑하는 그 교제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길벗교회 청년 여러분.
우리 길벗 청년부가 이런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이제는 개인주의의 영향이 극단적으로 진행되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잃고, 그 공동체의 의미가 자신의 유익을 위한 방향으로 왜곡되어버린 지금 이 세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의 공동체로 회복되어야합니다.
그 방법은 교제로 참여하고, 사랑으로, 희생으로, 헌신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한 공동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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