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수요예배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80 views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3:4(신약 279쪽)
고린도전서 13:4 NKRV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반갑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함께 하신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시다시피, 담임목사님은 태국 선교지 방문으로 지난 월요일에 출국하셨고 금요일에 귀국할 예정입니다. 국내를 떠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만큼 안전하게 잘 다녀오실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수요예배는 제가 인도합니다. 본격적인 말씀을 나눔에 앞서서 간단한 심리테스트를 해보려고 합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제가 질문을 할 거고요. 마음속으로 그 질문에 답을 해보시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 질문에 담긴 의미를 간략하게 해설하는 것으로 각자의 심리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제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사막을 건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곁에는 다섯 마리의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 각각은 사자, 원숭이, 소, 말, 양입니다. 불행하게도 여러분은 이 동물들과 함께 사막을 건널 수 없습니다. 사막을 건너는 중에 동물들 하나씩 버려야만 하는데요. 여러분이 가장 먼저 버릴 동물은 무엇이고 가장 마지막에 버릴 동물은 무엇입니까? 다시 동물의 종류를 말씀드릴게요. 사자, 원숭이, 소, 말, 양입니다.
이제 마음의 결정을 하셨죠. 그럼 해설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건너는 사막은 인생에 찾아오는 위기입니다. 여러분이 버려야 할 동물들은 각각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자는 자존심을, 원숭이는 친구를, 소는 직업을, 말은 가족을, 양은 연인을 상징합니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버린 동물들은 위기 때 여러분이 가장 쉽게 포기하는 것이고요. 가장 마지막에 버린 동물들은 여러분이 끝까지 지키려 하는 것이고요. 또 동시에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미 오늘 새벽기도회 때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그냥 재미로 해보는 것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모두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같이 성경을 찾아 봅시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279쪽에 있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말합니다. 물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한 말입니다. 당시에 고린도교회는 여러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굉장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유익도 없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이야기는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성경을 찾아봅시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12장 28절에서 31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76쪽에 있습니다.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 역시 사랑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의 으뜸이 사랑임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담겨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일찍이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구약성경 레위기와 민수기에 이미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을 때부터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나눌 얘기는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얘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른바 ‘사랑장’이라 불리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사랑의 속성에 관한 얘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을 통해 15가지가 소개되는데요. 나열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 온유함, 시기하지 않음, 자랑하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하지 않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진리와 함께 기뻐함, 관용함, 모든 것을 믿음, 모든 것을 바람, 끝까지 견딤’입니다.
우리는 그중에 첫 번째 사랑의 속성인 ‘오래 참음’에 관하여 오늘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어떤 책에서 말하길 “사랑은 ‘셋’을 세기 전에 ‘둘 반’을 세고 또 ‘둘 반의 반’을 세는 것”이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경고합니다. ‘셋을 셀 동안’ 말을 듣지 않으면 혼날 것이라고요. 그러나 고집 센 자녀는 쉽게 부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하나, 둘 그러나 셋으로 바로 넘어가지 않고 뜸을 들이다 ‘둘 반’이라고 하며, 긴장을 낮춥니다. 그러고도 여전히 셋으로 넘어가지 않고, 말합니다. ‘둘 반의 반’
실제로 부모의 이와 같은 행동이 자녀를 양육하는 좋은 모습은 아닐지 몰라도, 이와 같은 행동은 분명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성경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도 그것이 사랑의 한 속성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첫 번째 속성인 ‘오래 참음’은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마크로뒤메오(μακροθυμεω)’라고 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주로 기다림에 관한 것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히브리서 6장 1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이 성취되기까지 ‘오래 참았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마크로뒤메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또 신약성경 야고보서 5장 7절에 보면, 농부가 씨를 뿌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참고 기다리는 것’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참으라’ 합니다. 여기서도 마크로뒤메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보면, 신약성경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명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까지 ‘참으신다’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마크로뒤메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처럼 사랑의 첫 번째 속성인 ‘오래 참음’은 그 용례에 따르면 기다림을 뜻하는 말입니다. 무엇에 관한 기다림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고 성취될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결코 기분 좋고 편안한 종류의 기다림은 아닙니다. 사실 마크로뒤메오라는 말은 ‘가장 심한 어려움을 견뎌 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의 진정한 의미는 ‘오래 고난당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잘 알게 됩니다.
요셉은 이복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죽음에 이를 뻔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그는 이전과 같이 부잣집 도련님으로서 살아갈 수는 없게 됩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요셉은 성추행 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고난의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것처럼 그 고난은 요셉에 놀라운 기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왕 다음으로 막강함 힘을 가진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이긴 비결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경을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50장 19절에서 21절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81쪽에 있습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 요셉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고난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함을 통해 고난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이루는 일 곧 오래 참고 견디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알게된 얘기입니다. 지금은 소천하신 헨렌 로즈비어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1945년 영국의 켐임브리지의 뉴햄 칼리지 의대를 졸업하고, 1953년 의료선교를 자원하여 콩고에 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1964년 콩고에 내전이 발생하면서, 반군에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그는 그 과정에 끔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동료들은 비참한 죽음을 당했고, 헨렌 로즈비어 선교사는 성폭행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5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며 죽음의 공포와 성폭행에 따른 수치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는 동료들처럼 죽지는 않고, 본국인 영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 돌아와 회복과 치유의 과정을 거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헨렌, 넌 내게 감사할 수 있겠니?’ 이 말에 헨렌 선교사는 하나님께 따지듯 대답합니다. ‘하나님 저는 감사할 수 없어요. 저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콩고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제 동료들은 순교했고, 저는 성폭행을 당했어요. 하나님 같으면 감사할 수 있으시겠어요? 저는 감사할 수 없어요.’
그러자 다시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럼, 헨렌, 내가 너를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있겠니?’ 헨렌 선교사는 그 말을 듣고서 깨달았다고 해요. 이전까지 자신만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도 자신을 믿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때 비로소 헨렌 선교사는 하나님께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헨렌 로즈비어 선교사는 1966년에 콩고로 다시 돌아가 선교사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닐 겁니다. 헨렌 선교사의 말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믿고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과연 내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시는 걸까요? 그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기꺼이 고난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를 통해 사랑을 이룰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의 사랑은 놀라운 일들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에 관한 흥미로운 인터넷 기사를 하나 접했습니다. 그 내용은 올해 5월 31일에 삼성호암상 수상자 중에 사회봉사상을 수상한 하트-하트 재단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트-하트 재단은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하트하트 오케스트라’를 통해 17년간 연주회를 벌이고 있는데요. 이것은 굉장히 기적적인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 발달장애인은 두 가지 면에서 음악 특히 오케스트라를 하기가 어려운데, 하나는 지적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움이 더뎌서 비장애인에 비해서, 수백 수천 배의 노력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려움은 사회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오케스트라는 합주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료들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화음을 맞추는 일들이 필요한데요. 아무래도 사회성이 부족한 발달장애인은 오케스트라를 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트하트 오케스트라는 2006년 창단 이후로 1000회가 넘는 국내외 공연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공연을 이루기 위해서 길고 지루한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보통 비장애인들이 10시간 할 연습을 발달장애인은 약 1000시간 이상을 해야 했었다고 하고요. 그와 같은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무려 17년이라는 시간을 계속해서 연주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오래 참는 일은 분명히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고통을 수반하는 어려움을 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고요. 또한 우리가 이를 통해서 기적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할 이유를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같이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베드로후서 3장 9절의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387쪽입니다.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말해줍니다. 우리가 오래 참기 전부터 하나님이 이미 오래 참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세상의 불공평함과 불의함에 관해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이 아니냐는 핀잖을 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은 안 계신가보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기에 이릅니다. 아마도 이것은 현실의 삶을 충분히 참고 견딜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불의하고 불공평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참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13장을 통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가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8절)” 주님께서 참고 계신 것은 곡식이 상하지 않기를 바래서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때가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비록 지금은 주님이 참고 기다리시지만, 언젠가 그 운명은 갈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래 참고 계십니다. 우리가 상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보다 먼저 오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그에 따른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대접하는 일에 잘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장막 주변에 나그네 한 사람이 지나가자 아브라함은 그를 불러 자신의 장막에 잠시 쉬기를 청했습니다. 마침 휴식이 필요했던, 나그네는 그 말에 기뻐하면서, 아브라함의 장막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내 먹을 것을 준비하여서, 나그네에게 대접하였습니다. 나그네는 배가 고팠던 탓에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묻습니다. ‘당신은 음식을 드시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그네는 ‘나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나는 불을 숭배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나그네에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나그네도 여간내기가 아니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조목조목 반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격분한 아브라함이 나그네에 말했습니다. ‘당신 같은 이를 우리 장막에 오래 영접할 수는 없소. 나가시오.’
이에 나그네는 불쾌한 빛을 띠고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일로 흥분한 상태였는데,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간 일어났던 일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저 사람을 오십 년이나 참아오셨다. 그런데 너는 한 시간도 참을 수 없었더냐?’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얼마나 참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보다 먼저 참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도 오래 참으로 주님의 사랑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