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 가득채우는 삶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드러내는 성도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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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오늘부터 12월 24일까지 대림절 절기가 시작이 됩니다. 이 절기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날을 기다리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오셨듯이 또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날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셨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종교에서도 신이 사람을 위하여 직접 찾아 내려 온 종교는 없습니다. 모두가 인간 스스로가 신이 있는 곳으로, 진리를 찾아 올라 가야 하지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신이 직접 인간에게 찾아 오셨다는것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께서 심지어 우리를 찾아 오신 이유가 참된 진리를 알려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은 더 놀라운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죽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신이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하여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정말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이야기 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에서 베다니에 잠시 머무시게 됩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가 벌어졌습니다.(2)
이 앞에서 예수님으로 부터 기적적인 부활을 경험한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죽었던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정말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가? 확인하기 위해서, 또는 나사로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아무튼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많은 사람이 이 잔치 자리에 참여했습니다. (9)
이러한 큰 잔치를 베풀정도이기 때문에 분명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은 그래도 부유한 집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둘러 앉아 음식과 대화가 한 창인 가운데 그 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리고 아주 값비싼 향수(몰약, 순전한 나드)를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3) (마 26:6 ; 막 14:3 모두 머리에 부은 것으로 나타남)
이 기름을 붓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시45:9)
왕비들은 왕에게 나아갈때에 향기로운 기름으로 단장을 하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에 2:12)
죽은 사람의 장례를 위하여 향기로운 기름이 쓰이기도 합니다. (요19:39)
이 마리아가 복음서에서 세 번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는 등장 할 때 마다 항상 예수님의 발과 관련하여 등장을 합니다.
Luke 10:39 NKRV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있습니다.
John 11:32 NKRV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께 간구하고 청원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감사해 하는가에 대한 헌신의 표현으로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이러한 겸손은 곧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주님의 일을 행하게 합니다. 비록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녀의 헌신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그 길이 얼마나 귀하고 향기로운 길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반면에 가룟유다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의 말이 아무리 옳아 보일 지라도, 그가 이 비싼 향유를 팔아서 판 돈으로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는 것이 좋겠다라는 그의 말이 옳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뜻과, 길을 예비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발 앞에 엎드리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니 결코 주님이 현재 원하시고 이루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이루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성경은 유다의 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도둑이다! 그래서 그 돈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에게 영성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단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의 무엇을 예측하고 실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성은 “주님 발 앞에 엎드리는 겸손”입니다. 그러한 자는 앞을 예비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마리아가 주님꼐서 기뻐하시는 뜻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그 모습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고, 어떻게 그분을 섬길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서 기쁘신 일을 행할때 그것이 예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늘 본문이 드러내고자 하는것이 다양하게 있을 수 있겠지만 특히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와 결과를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상반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나사로와 죽음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입니다.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잔치와 죽음의 장례를 준비하는 기름부음입니다.
매우 상반되는 이 두 상황이 한 장면 안에 같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이야 말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예수께서는 죽임 당하는 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심지어 그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그 죽음을 반대하려는 베드로에게 사탄의 일이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죽음이 어떻게 기쁘고 유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결국에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잔치 자리와 같은 기쁨입니다. 왜입니까? 그곳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죽었던 자와 같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은 신자들의 부활입니다.
Ephesians 2:1 NKRV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줍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합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례는 죽음에서 부활한 자들에게는 잔치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장례와 잔치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한 장면이 아닌 것입니다. 그 잔치에 참여한 부활한 나사로와 같은 성도들이 이 부활이 누구로부터 주어졌는지… 어떠한 의미로 주어졌는지 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마리아와 같이 주님께 엎드려 그분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헌신은 감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엎드리는 자들이 주님의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앞에 선다면 어떻게 됩니까?? 3절에서 처럼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예수께서 그 사랑의 향기로 세상을 가득 채우셨듯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들, 주님께 겸손하게 헌신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은 주님과 같이 그 향기로운 향기를 세상에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룟유다가 말하는 사적인 욕심이나, 바리새인들이 행하였던 자기 과시의 선행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선행을 하거나, 의로운 일을 행한다 말하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선행을 하는 것입니까?? —>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와 헌신입니다. 그것에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이 들어갈 것이 없는 것이죠!! 진실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다른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35–40 (NKRV)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겨하고 감사하고 헌신하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선한 일을 행할 것입니다!!
이 모든 선행이 진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진실한 사랑을 받고 그 감격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감사와 겸손한 헌신된 삶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의 우리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향기를 가득 채우는 삶이 된다느 것입니다.
교회의 구제와 선행이 전도?? 교회의 선행을 자랑하는것?? 그러한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그저 교회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봉사와 구제를 하는 것이다! 마리아 처럼!! 마리아가 주님께 하였던 것 처럼.... 이것은 구원받은 … 부활한 교회의 당연한 사명이자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한 행실이 모든 사람에게 환영 받지못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처럼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향기로운 그 풍성한 것들을 잔치에서 함께 나누기 위해서 입니다.
이 잔치에 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리아가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였던 것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의 시작을 맞이합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것을 기억하면서 또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합니까?? 마리아와 같이 그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 향기를 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의 발 앞에 앉습니다. 엎드립니다.. 감사와 헌신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가룟유다와 같이 이 잔치에 참여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뭐하는 분인가? 궁금하여 참여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은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겸손한 자들임을 우리가 깨달아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이 헌신들을 통하여 이 교회에, 지역에,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채워 나가시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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