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라

사무엘하 강해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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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새벽기도에 오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어제 본문에서는 웃사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생각해서 심판을 받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미갈이라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왜 이런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교훈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며 찬송해야 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대로 법궤를 옮기지 않아서 웃사가 죽게 되고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삼 개월간 머물게 됩니다. 11절에 오벧에돔은 가드사람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블레셋 사람이었다가 이스라엘로 편입된 이방인으로 보입니다. 이 법궤가 오벧에돔에 집에 있을 때 그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법궤가 들어올 때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복된 나라가 될지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2절에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에게 있어서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갑니다. 본문에는 다윗이 메었다고 나왔지만 이것은 실제 다윗이 멨다는 뜻이 아니라 다윗의 지시로 인해 아마 고핫 자손들로 하여금 법궤를 옮기는 규례대로 법궤를 메게 했을 것입니다. 13절에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갔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거나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여섯 걸음을 걸었다고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법궤를 옮길 때 혹시 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까봐 얼마나 긴장을 하면서 그 광경을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도 규례에 따라 법궤를 옮기니 당연히 심판이 없었습니다. 심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윗은 너무 기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14절에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춥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윗이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무슨 막춤을 췄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학자들은 다윗이 찬송할 때 정해진 양식의 춤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기뻐춤을 찬양의 춤을 추었습니까? 단순히 법궤가 들어오면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복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겠습니까? 물론 이스라엘이 이제 복을 받으니까 기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다윗이 기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궤는 무엇입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특별임재의 상징입니다. 법궤는 우상도 아니고 고대근동지역의 나라들이 전쟁할 때 들고 나가는 신물도 아닙니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다는 특별임재의 상징입니다. 민수기 7장 89절에서 모세는 이 법궤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광야에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특별임재의 상징입니다. 언약궤가 다윗 성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백성과 함께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확증이 됩니다. 법궤를 옮기는 사건이 역대상 15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법궤를 옮길 때 다윗이 부른 찬송이 나옵니다. 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을 찬양하라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법궤가 들어올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언약 맺으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찬송했습니다.
(적용) 우리에게는 법궤가 들어온 것을 기뻐하는 그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까? 신약의 성도인 우리에게는 법궤가 없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침략 당했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법궤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임마누엘로 오신 것처럼 승천하실 때에도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승천하실 때 함께하신다는 이 약속은 어떻게 지켜졌습니까?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 이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사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우리가 성령이 거하는 전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다윗이 법궤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즐거워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가 말씀과 가까이 하도록 하시고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찬양한 다윗처럼 우리 또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언약 맺으시고 나를 구원하신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 찬양하고자 한다면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윗이 기뻐한 그 기쁨을 누리고 다윗이 누렸던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보시면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왔다고 말씀합니다. 말 그대로 온 백성이 법궤가 들어오는 것을, 하나님이 임재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이라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기쁨에 자리에 동석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아내 미갈입니다. 미갈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어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미갈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물론 법궤 앞에 있는 것을 문학적으로 여호와 앞에 있는 것으로 표현 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것을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서 찬양을 하며 춤을 추는데, 그것을 업신여겼다는 것은 꽤나 큰 충격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는 일을 어떻게 업신여기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업신여겼다는 단어는 용례를 살펴보면 창세기 34장에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할 때 쓰였던 단어입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 왕이 세워진 것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또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업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업신여김은 복음에 대적하는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찮게 여기는 그럼 업신여김 입니다. 그러니까 미갈은 단순히 남사스러워서 다윗에게 눈치를 준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반대되는 입장이 되어서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 다윗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골리앗이 다윗을 멸시한 것처럼 다윗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미갈의 멸시는 그냥 마음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즐거워 하던 다윗이 가족을 축복하러 돌아옵니다. 다윗이 올 때 미갈이 다윗을 맞이하며 밀합니다. 20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아까 다윗이 찬송하며 춤을 출 때 막춤을 춘게 아니라 어떤 정형화된 춤을 추었습니다. 춤을 추다가 몸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게 춤이 정해진 것이라서 몸이 드러난 것이 불가피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소한 것 때문에 미갈은 하나님의 임재를 찬송하는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다윗은 이 비난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왕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했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21절입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게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에거 사울 가문을 망했지만 다윗은 선택을 받아 왕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구원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사울은 늘 전쟁에 소극적으로 대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가 아닌 자신의 하고 싶은대로 싸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에 저항하고 역행하는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사울은 결국 망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삶의 토대에서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나를 직분자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했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데 사울은 그런 고백과 찬양이 없었고 결론적으로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다윗은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도 너보다는 높임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는 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찮아보입니다. 낮아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부정하는 자는 더 낮아지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다윗이 그냥 하는 말인지 실제로 그런지 23절에 나옵니다. 23절에 보시면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고대 사회에서 여자가 자녀를 못 낳는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미갈은 사울왕의 딸이면서 다윗의 아내입니다. 공주 출신의 왕비인데 사람들이 얼마나 기대를 하겠습니까? 또 이스라엘의 여인들의 소망은 창세기 3장 15절의 믿음대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듯이 자신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아가 나오는 것이 굉장한 영광입니다. 자식이 없으면 그 영광에 절대 참여하지 못합니다. 미갈이 자녀를 낳지 못한 것은 절대 다윗이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생각해보시면 다윗과 미갈 사이에 자식이 하나 나오면 사울 왕조와 다윗 왕조에 일종의 연결고리가 생겨서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베냐민 지파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미갈에게 자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임재를 폄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
(적용)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가 성령의 전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것을 좋게 보지 못하는 이들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말씀 따라 살고 기도생활 하는 것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비꼬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분의 임재를 무시하는 자들을 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자를 높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내 삶의 법궤를 소망하며 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핍박의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핍박을 제거해 주실 줄로 믿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며 살게 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미갈 같은 이들에게 핍박 받고 비난을 받더라도 하나님께서 해결 하실 줄로 믿고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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