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교회 주일설교 준비 (요한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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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저희가 요한서신을 같이 살펴볼 예정입니다. 요한서신은 사도요한이 당시 교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쓴 편지입니다. 편지이기 때문에 발신자는 사도요한이며, 첫 번째 수신자는 당시에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수신자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편지를 쓰면서 1인칭 단수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어떤 구간에서는 1인칭 복수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사도요한은 어떤 곳에서는 1인칭 복수로 표시해놓았을까요?
우리들이 보았기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재판에서 2인 이상이 동일한 증언을 하면 그 증언은 믿을만한 것으로 보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아마 사도요한이 서신을 보내는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손으로 만졌고, 그의 음성을 우리가 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우리들이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들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요한이 이렇게 믿으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만한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디서든지 예수를 증언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의 머리에는 주님의 재림과 주님과 다시 함께 하는 날을 소망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에 대한 마음이 사도요한처럼 불타오르기를 소망합니다. 혹시나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이 식어있다면, 그 마음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어서 1절부터 4절까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신들이 이야기를 들어왔고, 또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그분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만졌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실질적인 소통을 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던 그 사람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그러나 메시아는 하나님의 종, 기름부음받은 자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은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라고 유대인들이 생각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이고, 그것을 사도요한을 비롯한 사람들이 보았고, 증언하여 교회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부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계시다가 2천년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그리고 “주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고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죽더라도 영원히 죽지 아니하며, 예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후에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잘 믿고 복 받아서 영원히 살자!’라는 어떤 슬로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예~전에 우리에게 유명했던 ‘아나바다 운동’이 있었죠?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라는. 예수 믿고 복 받아서 영원히 살자는 것은 이러한 운동이 아닙니다. 슬로건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과 친밀한 삶을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3절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전하는 이유는)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지금 현재를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사로 이야기)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모든 예언의 성취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요한은 3절에서 이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냐? 바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하여인데, 그것은 교회가 어떤 길드에 소속이 되어서 사회적으로 어떤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기 위해 ‘사귐의 자리’로 이들을 초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4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보면 사도요한이 하나님에 대해서 전하고, 또 예수에 대해서 전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이 글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또 사도요한의 어떤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 뭐 개인의 어떤 욕심을 이루기 위해, 또는 교인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사도요한은 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썼고, 이 글을 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과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이 글을 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왜? 지금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행동들이 다 이런 행동들이 아닌가? 우리에겐 이런 일들이 아주 자연스럽지 않은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전하고 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성도들의 헌금으로 교회를 위해, 또는 필요한 곳에 쓰이기 위해 우리는 이 일들을 지금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사도요한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말들이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나? 그러나 사도요한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는 어색할 수 있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절대 이런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군주적인 메시아의 느낌이 훨씬 강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신약시대의 상황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당시의 신약시대는 알렉산더가 죽고, 그의 장군 4명이 땅을 각각 나눠가지게 되고, 거기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당대 최악의 왕이라 불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지배를 했을 때, 이스라엘에는 엄청난 재앙이 닥쳤기 때문이다. 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자신을 에피파네스라고 불렀다. 곧 ‘신의 현현'이라고 하여 자신이 곧 신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에피마네스라고 불렀다. 즉 광인, 또는 미친놈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원래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자기 외에 2명의 왕자들이 원래 있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들! 본인은 조카수준이었기에 될 수 없었지
그러나 이 왕자들이 다 죽게 되면서(하나는 헬리오도루스에 의해 죽은 셀류코스 4세) 에피파네스 4세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유대인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고, 성전을 약탈하려고 했고, 우상을 섬기도록 강요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메시아 상은 ‘심판날 사람들을 재판하는 재판장’으로서의 모습이 강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의 글에서 군사적인 메시아의 모습을 볼 수 있나요? 핍박을 당하고만 있지 말고 맞서 싸우자며 군사적으로 사람들을 종용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 나오고 있나요?
아니요,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하고, 예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서로를 사귐과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더불어 누리기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다른게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풍성해지고,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고, 살아계신 그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나를 택하셔서 오늘의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만나,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이 공동체를 통하여 죽어가는 이 의정부 땅을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이곳에서 우리의 믿음이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믿음이 주님을 위해 깊숙이 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 안에 예수로 인하여 진정한 기쁨,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예수가 계심으로 말미암아, 또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공동체가 따뜻한 공동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이런 일을 합니다'라고 할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확실하게 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그분이 우리의 모든 삶을 성실하게 이끌어 가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를 맡기셨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간다고!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 거라고.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교회에서 너무 무언가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있었지만, 교회 생활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참된 교인이 되려고 했었는가? 세상이 우리에게 ‘교회는 뭐하는 곳이냐?’라고 질문할 때, 그 답변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믿는 바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세상이 우리를 향해 물어보는 그 질문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물어볼 때, 우리는 담대하게 저들에게 알려주어라! 여러분들이 믿는 바를 확실하게 가지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오늘 요한이 당시 교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었는가? 5절에 보니까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오늘 말씀하고 싶은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5절을 읽어보자.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오늘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죠? (시편 18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수많은 것으로 묘사해놓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해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여러분의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구원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준비하시는 하나님)라고 말한다면, 내 삶에 늘 온전한 타이밍에 채워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것과 동시에 내 신앙의 방향을 설정해주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저는 잠언16:9 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잠언 16:9 NKRV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처럼 사도요한이 5절에서 하나님이 빛이시고, 그에게 어둠이 없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이 요한일서 전체를 이끌어가는 아주 중요한 주제를 지금 명시해놓은 거예요.
사도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그러면 이것을 통해 사도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것인데 그게 무엇인가? 교회 안에 빛이 있어야 하고, 어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즉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저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서 선한 양심과 온전한 생각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고, 어둠의 모습이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뚜껑 열어보니까 잘못을 많이 저지른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뭐 거의 마피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마피아가 있으십니까? 마피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빛 안에 거하고, 어둠의 권세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사도요한이 하고 싶은 말입니다. 바로 6절에서 나오죠!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고 8절과 10절에서 6-7절과 비슷한 말을 또 반복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아멘.
결국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너희들에게는하나님이 빛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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