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전가와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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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장)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1.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1.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는 죄를 지은 지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잘못한 지체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속으로 이런 생각도 합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하지?’
정말 교회에서 일어나면 안될 것 같은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간혹 뉴스나 매체에 소개되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이 보도될 때는 그런 마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 속으로 비난하게 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우리에게 결코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미워하기 좋은 시대 속에 태어났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기 좋은 시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 시대는 어떤 한 사람을 단두대에 올리는 것을 즐깁니다. 누군가가 무언가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때, 그것이 실수이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단두대에 올려서 말이라는 절단기로 그들을 너무나도 쉽게 절단합니다.
여러분 인터넷 댓글이나 sns를 한번 조금만 둘러보시면 정말 무슨 말인지 공감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을겁니다.
우리는 정말 미워하기 좋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워하는 모습 속에서 어떤 이들은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못난 자신의 모습, 실수한 모습을 끝없이 죄책합니다.
사람은 미워함을 받으면 보통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이거나 두 가지 다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미워함을 받을 때 역으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비난하거나, 하나는 미워함을 받을 때, 내 탓으로 돌리는 경우입니다.
결국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나를 미워하거나, 또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미움의 전염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이러한 모습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렇게 누군가를 미워하기 좋아하는 그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움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자신의 탓을 끝없이 하며 죄책감 속에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려고 화살을 돌립니다.
전염을 일으키는 미움이 교회 안에서 퍼지는 것은 정말 마음 아픈 일입니다.
이러한 시대상 속에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까요?
2.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2.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 1- 하나님은 빛이시고, 우리는 빛에 참여한 자들이다.
오늘 본문 5절은 본문 전체를 담는 중심 주제입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장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오늘 요한은 예수님에게 들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라는 내용입니다.
그 빛이신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지난 주 설교 때 언급했지만 요한은 요한이 쓴 요한복음, 요한일이삼서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단어들을 씁니다.
오늘 본문에서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둠은 오늘 본문 안에서 파악해서 보자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함입니다.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구분되시며 죄와 함께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이 말하는 바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겁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어둠인 죄와는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이죠.
지난 주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영지주의적 개념에서 빛과 어둠은 무엇을 말할까요?
영지주의 이단의 특징은 몸과 영혼을 극단적으로 분리합니다. 선과 악도 극단적으로 분리합니다.
그러니 영지주의 이단들에게 빛과 어둠은 선과 악, 영혼과 몸. 이렇게 구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영혼에 과연 빛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본문을 계속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죄는 우리의 영혼을 결코 선한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이 어둠의 권세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세상 유일한 빛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한 가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입니다.
죄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입니다. 행동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상태도 하나님의 뜻에 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존재 상태 자체도 죄인이라는 것이고, 행동하는 모든 것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적 관점에서 죄의 타락은 존재 상태에 근본적으로 더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의 존재 상태 자체가 타락하면 하는 행동들 모두가 죄의 상태에서 행하는겁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하나님에게 조금도 없으신 어둠이 바로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은 뭘까요? 죄 때문에 타락해버린 인간의 존재 상태에서 행동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비관적이지만 인간이 죄인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죄인인 존재 상태 자체를 바꿔야합니다. 그것이 구원이죠.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던 것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야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나요? “다시 태어나야한다”
신학적 용어로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태어남”. 죄인이던 존재 상태가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겁니다.
어둠 속에 있던 존재가 다시 태어나 빛 가운데로 참여하게 되는겁니다.
우리의 존재가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존재는 더이상 어둠 속에서 희망없이 죄를 행하던 자들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 선함을 행하는 존재가 되어버린거죠.
그러나 여기서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우리의 존재가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면, 계속해서 죄를 짓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하나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겁니다.
본문 2- 빛 가운데 있어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 문제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장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6절에서 보면 우리가 제기한 문제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관계가 되었죠.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죄를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도 죄를 짓고 있으니까 우리는 6절 말씀대로 거짓말을 하는건가요?
“나는 구원받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장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러분 6-7절만 보면 어둠에 행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9절에서는 예수님께 죄를 자백하면 우리가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둠에 행한다”라는 것이 단순히 죄를 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둠에 행한다”라는 말은 죄를 짓는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 행한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건가요? 그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우리가 만약에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받았다면 이미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는겁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가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9절의 말씀을 주시는겁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죄를 고백하면 우리의 미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용서해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한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과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녀로서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연합하면서도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더 이해하기 위해서 동영상 하나를 보려고 합니다.
이 동영상은 저의 처가쪽 조카가 지금은 네 살인데 9개월 아기 때 찍었던 동영상입니다.
이때 저희 조카가 구강기였는데 꼭 신발을 입에 갖다 대는겁니다. 이 상황은 조카가 엄마가 옆에 없을 때 딱 신발을 입에 대려는걸 엄마가 보고 막으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일단 한번 보겠습니다.
(동영상)
제가 이 동영상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관계가 어떤지 보게 되는겁니다.
우리가 저 조카와 같은 아기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직 연약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수 많은 유혹에 휘둘립니다. 꼭 신발을 입에 갖다대는 것을 본능적으로 행하듯이 죄를 본능적으로 행하게 되는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그 죄를 지으려는 마음에 대하여 선한 경각심을 주십니다. 어떤 때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것이 죄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이겨내기도하지만 어떤 때는 죄를 짓습니다. 조카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리고 멈칫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죄를 짓기도 합니다. 입에 갖다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직접 혼내시기도 하시죠. 조카도 혼나고 신발을 뺏기겠죠?
그래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마치 아기와 부모님의 관계가 실수하고 잘못하더라도 변함없이 부모님의 관계인 것처럼요.
그리고 그 아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혼나고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 부모님은 받아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를 자백하고, 그 죄를 진심으로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회개에 이르면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죄를 탓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시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자녀가 된 관계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끊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장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는 “미쁘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쁘다라는 말이 우리는 잘 안쓰지만 이게 뭐냐면 믿을만하다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약속을 절대로 끊거나 파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신실하신 분이고 변함없으신 분입니다.
만약 그 관계가 중간에 끊긴다면 정말 하나님을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 관계를 절대로 끊지 않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기에 충분한겁니다.
지금까지 오늘의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둘째, 하나님과 연합한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 됩니다.
셋째, 빛 가운데 행하더라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3.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3.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다시 생각했을 때, 사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뜻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행동,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정으로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의 의미는 죄를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은 죄를 언제나 예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내가 지은 죄를 가지고 나아가 정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면, 죄에서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이키면 다시는 그 죄를 탓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죄에 대한 용서는 단회적입니다. 한번에 끝나는거에요.
우리는 한번에 용서하신 죄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거나,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구하였는데도 그 이후로도 그 죄로 인하여 죄책감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한 값을 지불하려는 행동입니다.
청년 여러분. 종교와 복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종교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위해 댓가를 지불합니다. 그 댓가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있는 것을 지불하겠죠. 돈이나, 시간이나, 혹은 나의 선행마저도 댓가로 지불하는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댓가를 이미 예수님께서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의 댓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복음은 모든 것을 누리게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회개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여러분이 그 죄에 대한 댓가를 충분히 치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종교의 모습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겁니다.
우리가 선행을 베풀어야 그 죄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가 추구하는 대표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회개한 죄에 대하여 더 이상 그 죄책을 묻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한 가지 우리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져야 할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고 다시 죄책을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회적이며, 온전합니다.
사랑하는 길벗교회 청년 여러분. 이미 회개한 죄에 대하여 계속해서 죄책감이 여러분의 마음을 괴롭히는 분들이 혹시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변함없으시고 미쁘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죄를 다시 저지르더라도 변함없이 여러분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우리의 죄책감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연약해서 계속해서 범죄하고 같은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고, 심지어 구원 받은 자들이라도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능력을 의지하지마세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그 자리에서 용서하시고 죄책에 대하여 묻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단회적 용서를 시행하시는 하나님과 빛 가운데 연합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하나로 연합한 자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닮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빛 가운데로 연합한 자들이 자연스럽게 닮는 모습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죄었던 형제, 자매들에 대하여 하나님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용서하셨듯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다시는 그 죄책을 묻지 않듯이 죄책을 묻지 않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의 원리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미운 행동을 하고 죄를 지은 어떠한 지체가 아니꼽게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걸 우리는 미운 털 박혔다고 주로 표현하지 않나요?
그러나 그러한 지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였을 때 우리는 그 지체를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합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 그 지체가 다시 공동체 안에 속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용서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존재합니다. 사실 용서를 해야하는 경우 마음의 상처가 심각한 경우도 존재합니다. 용서는 선포하여 단회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완벽하신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가능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선포해도 마음의 상처가 완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당연한 결과에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한다고 결단해도 우리의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방향성이 점차 그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이 자라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또한 그것을 위한 능력과 계획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회복하는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점진적으로, 용서해나가는 과정을 배워나가야합니다.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용서의 마음이 자라나는 자들에게는 성장과 성숙이 일어납니다.
그 믿음의 성장이 잘 이루어졌던 믿음의 선배를 소개하려고합니다.
혹시 손양원 목사님이라는 분을 아시나요? 제가 한국교회사라는 과목을 지난 학기 공부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 목사들 중 한 명을 연구하는 레포트를 쓴적이 있습니다.
그중 저는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서 레포트를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손양원 목사님의 레포트를 쓰면서 정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1948년 여수, 순천에서 일명 여순사건이라는 정권에 반대하는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쿠데타가 일어날 시기에 손양원의 두 아들인 손동인 씨와 손동신 씨는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안좋게 보던 좌익 세력 중 안재선이라는 사람이 반란 당시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가족들과 애양원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장례 예배 때 손 목사는 감사 기도를 올린 것이다. 감사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의 두 아들이 한 사람에 의해 살해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를 양아들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손양원 목사님은 양아들로 받아들이고 결코 그 아들을 미워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아들로 생각하고 평생을 대했다는겁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으로 양육했습니다.
그 아들 재선씨는 손양원 목사님의 진심을 느끼고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안재선씨의 아들도 목사님이 됩니다.
한국교회사 속에서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별명 붙입니다. 그 사랑의 파급력은 실로 원자탄과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온전히 본받으려 했던 우리 한국 교회 신앙의 선배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지체가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그 지체가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오려 할 때 우리는 용서하고 그 지체를 도와야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닮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야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길벗교회 청년부를 맡게 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공동체에 대해서 더 깊이 묵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고 우리가 그 분을 닮아가는 자들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공동체를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한번 죄를 회개하면 그 죄책을 묻지 않으시는 미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거기서 머물러 우리는 나의 죄를 용서받으면 된다는 안도감에 취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깊이가 얼마나 큰지 깨달은 우리는 공동체의 지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바이며, 마땅히 닮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