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드는 우리 공동체(몬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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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12월 4일 주일 청년부
제목 : 우리가 만드는 우리 공동체
본문 : 빌레몬서 1장 11-14절 *신351
결단찬양 : 아름답고 놀라운 주 예수
[도입 : 상대방의 억압에 만들어진 나의 위장된 자유]
여러분, 이런 경험 있으십니까? “오늘은 너가 먹고싶은 거 먹자!” 그럼 어떻게 대답합니까? “좋아! 그럼 우리 떡볶이 먹을까?”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음.. 떡볶이 나도 좋아하는데, 사실 어제 먹었어..!”
어떻습니까 여러분? 아마 한 번쯤은 다들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한 차례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럼 짜장면은 어때?” 오히려 내가 먹고싶은 음식을 시켜 먹는다기보다, 상대방에게 맞춘 음식을 내가 대신 주문해주는 상황이 이어져 갑니다.
분명 내가 먹고싶은 음식을 시키라 했지만, 정작 상대방에 입맛에 맞춘 음식들로 눈치를 보는 이 상황이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알 수 없는 압박감에 불편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끝내 합의점을 보았을 때, 그 음식이 마치 내가 먹고싶어서 시킨 음식으로 위장된 자유를 가지고 옵니다.
세상은 참 작고 별거 아닌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나의 자의적인 움직임을 제한시킵니다.
[도입 : 교회를 다니기에 예수를 믿는다 거짓된 고백하는 내가 아닌가?]
이런 모습이 세상 가운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교회 내에도 이런 억압된, 위장된 자유는 존재합니다. 여러가지 모습들이 있겠지만, 제 개인적으로 위험하다 판단이 드는 것은, ‘내가 예수를 만났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모두가 예수를 만났고, 예수를 믿어 예배의 기쁨을 알아 나오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저는 극히 드문 케이스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아주 지극히 작은 교회에서나 가능한 스토리가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여하튼 극히 드물다 판단될 때, 예수를 아직 영접하지 못한 자들이 예배를 나아올 때 어떤 생각으로 나아오게 되겠습니까? ‘그저 시간 좀 채우다 가자.’라는 생각으로 나오는 것조차 전 귀하다 생각합니다. 보통은 자리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 일 것입니다.
또는 나왔다 한들, 왠지 거짓된 거룩함을 남들에게 표현하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지만, 위장된 자유를 다른 이들에게 표현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세상 뿐 아니라 교회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억압이 있고 위장되고 거짓된 모습과 상황 안에서 과연 자의적인 섬김과 발걸음이 존재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을 전하자면, 억압과 위장과 거짓된 속에서는 자의적 발걸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와 기쁨과 감사 속에서 비로소 자의적 섬김과 발걸음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사역이 기쁨이 되길 소망하고, 무엇보다 예수 안에서 기쁨이 있어 나아가는 발걸음 되길 소망합니다.
[자발적 용서를 소망한 사도 바울]
그럼 빌레몬서의 저자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억압을 추구합니까? 자의적인 섬김을 추구합니까? 본문을 비롯한 바울 서신을 볼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결코 억압을 추구하는 자가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는 빌레몬을 향해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인의 상황이 억압이라면 억압이었지 빌레몬을 억압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겸손과 온유와 낮아짐과 자비를 빌레몬에게 베풀었습니다. 그가 위장된 자유가 아닌, 주 안에서 진정된 자유를 누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추구하는 바를 드러냄 뿐 아니라 빌레몬을 향해서도 자발적인 헌신과 용서가 주어지길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옥중에서 예수를 만난 오네시모]
먼저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보통 관계가 아닙니다. 감옥에서 죄인으로써 만난 어떻게 보면, 감옥 동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들의 죄목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전하다 감옥에 갇혔지만, 오네시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둑질을 하다 잡힌 범죄자 입니다.
그런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은 11절과 같이 기록하여 표현합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사도 바울은 압닌다. 오네시모가 분명 과거에는 빌레몬에게 있어 무익했음을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름도 압니다. 그가 무익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익한 존재임을 사도 바울은 너무나 잘 압니다.
이 구절을 통해 오네시모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 속한 자로써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과거 무익한, 그저 세상에 속한 존재였으나, 이제는 유익한, 오직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써의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오네시모가 감옥에 있는 것은 결코 방해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까닭에 쇠사슬에 매인 죄수’라 스스로를 칭하며 자랑스럽게 말하던 자 였습니다.
저번 주 함께 보았던, 9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기록합니까?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라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감옥에 갇힘은 큰 방해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감옥이 방해요소였고 부끄러움이 있었더라면, 옥중서신을 통해 ‘하나님 때문에 갇힌 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인데, 에베소서 3장 1절을 보아도 사도 바울에게 있어 감옥에 갇힘은 큰 방해가 아니었음을 곳곳에서 알도록 합니다.
그런 그에게 오네시모가 감옥에 있음도 사실 방해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모르던 자가 예수를 믿고 알게 되어 고백하게 되었으니 감옥이라는 환경이 더욱 은혜의 공간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에 저항하다 투옥되었고 또 교수형에 처해 목숨을 잃기 직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보라!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 이 지상 위에 살고 있는가!”
사도 바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으나 그 안에 일하시는 놀라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는 오네시모가 본 것이지요.
[노예에서 죄인, 그러나 이제는 복음의 사자로]
그렇다면 오네시모가 이처럼 극적인 변화를 옥중에서 이루게 된 요소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를 변화하도록 인도한 것입니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 아니겠습니까?
오네시모는 단순 옥중을 떠나고 싶어 듣는 척, 받아들이는 척 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행동했다면 예수를 만나기 전,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찾아 죽이고자 했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금방 들통났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복음을 이용했다라기 보다, 오히려 옥중에서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맛보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이제 그는 무익하지 않은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노예도, 죄인도 아닌 복음의 사자로써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그렇습니다. 오네시모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판단되어지는 자들 또한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위대한 도구이자 무기가 됩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진짜 오네시모가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오네시모의 이름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유익한’, ‘유용한’ 입니다. 그는 예수를 받아들이며 정말 이름의 뜻처럼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이름값 못하던 자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이제 그는 이름 뜻대로 살아갈 준비가 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할 준비가 된 오네시모]
뿐만 아니라 이제 그는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할 준비가 된 자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그는 단순히 예수만 받아들였다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 행동에서, 그의 옥중에서의 행실에서 긍정적인 모습이 비춰졌을 것입니다.
요셉이나 다니엘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이 믿음의 훌륭한 선배들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의 평소 행실을 더 깊이 곱씹어 보십시오. 믿음이 좋으나 행실이 타락하거나 추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바로 왕을 섬기는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행했습니다.
이들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신앙 생활을 잘 했을 뿐 아니라 공적인 생활에 있어서 왕과 백성을 위해서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그들은 애굽과 바벨론에 관영한 우상숭배나 음란한 죄에 가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으로 크게 기여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 날 우리 안에도 있어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이 더욱 타락해져 갑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복음의 본질을 붙잡아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네시모도 그렇습니다. 복음이 그에게 들어가니 이전에는 무익함이 이제는 유익함으로 변화됩니다.
[심복같은 그를 보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변화된 오네시모를 자신의 곁에 두고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압니다. 노예로 지내다 죄를 범한 죄인은 다시 주인의 거처로 돌아가 죄값을 치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그를 돌려보내려 합니다. 12절입니다.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어떠한 압력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네시모가 이제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여 그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12절에 기록한 심복이 또 한 번 오네시모를 설명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심복, ‘내 심장과 같은’ 존재가 바로 오네시모라는 것입니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인해]
저는 이 본문을 보며 우리가 만들어갈 우리 공동체는 이런 공동체가 되었음 좋겠다 생각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억압이 아닌 자발적 용서를 빌레몬에게 구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예수를 만나니 자발적으로 행실이 변화하여 무익이 아닌 유익한 자로써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오늘 날 이 시대를 살아가며, 또 이 곳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길 소망하는 우리가 추구할 것은 타의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청년 공동체가 아니라 정말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발적 섬김과 헌신이 있는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처럼, 자발적인 모습과 헌신일 것입니다. 자의에 의한 봉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남이 시켜서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그런 일들은 죄송하지만, 스스로에게 어떠한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지식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크게 보았을 때 유익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일 때야 말로 아름답고 감화력이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저는 우리 청년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다만 사역에 지쳐 본질을 잃지 않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물론 때로는 성숙 과정에 있어 억지로 맡겨 채근해야 하는 수준도 있습니다. 말씀으로 강하게 쳐서 깨어 나올 수 있도록, 또 정신이 번쩍 차려지도록 할 때고 있을 것입니다. 왜요? 우리 모두가 빌레몬처럼 성숙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빌레몬같이 자원해서 봉사하거나 헌신하거나 선한 일을 위해 헌금하는 그런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양육되어질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에는 큰 변화와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여지더라도 우리는 자발적인 헌신에 이르도록 우리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고 분위기를 조성해 가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누가 누가 더 일 많이 하나’를 보는 곳이 아니라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돕기 위해 모인 공동체’ 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로 만들어져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