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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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성경 : 마1:1-17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이해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있다면, ‘고정관념’일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공동체에 보내졌고, 요한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보내졌고, 마가복음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많은 새신자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획일화된 관념이 성경을 넓게 보지 못하게 한다.
사실 모든 신약성경은 믿는자와 교회에게 보내진 말씀들이다. 어느 한 성경도 믿지 않는자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새신자들을 위해 쓰인 성경도 교회 리더나 교회에 보내진 성경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가르치라고 말하지, 밑도 끝도 없이 새신자들에게 보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목사님 그러면 누가복음요?’ 누가복음은 자세히 읽어보면 믿는자에게 보내졌다. 누가복음 1:4절에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데오빌로도 그리스도인이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출신들이 많은 공동체에 보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유대인의 구원과 유대인만을 위해 쓰인 성경이 아니다. 오늘은 ‘계보’라고 하는 내용을 살피면서 마태복음을 개관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구조
마태복음 구조에 대한 내용은 정말 많지만, 대표적인 세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R.T 프란스의 지형학적 구조도 담고 싶었지만 많은 배경적 지식을 필요로해서 소개하지 못했다.
① J.D 킹스베리 구조
마태복음 4:17절과 16:21절에 ‘그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하기 시작하셨다’는 전환구가 나오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마태복음은 세 개의 덩어리로 구분하였다.
(1) 메시아 예수의 인격(1:1-4:16)
(2) 메시아 예수의 선포(4:17-16:20)
(3) 메시아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16:21-28:20)
② D. 해그너와 D.C 엘리슨의 구조
해그너는 엘리슨의 마태복음 구조 분석을 이렇게 구분했다.
1-4장 이야기1
5-7장 강화1
8-9장 이야기2
10장 강화2
11-12장 이야기3
13장(1-52절) 강화3
14(13:53절)-17장 이야기4
18장 강화4
19-23장 이야기5
24-25장 강화5
26-28장 이야기6
이 구조는 이야기 사이 사이에 다섯 묶음의 가르침이 들어있다.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모세오경에 평행되는 메시아의 오경으로 의도된 것으로 읽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서 말씀하셨고, 마태복음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슨의 분석에서 아쉬운 부분은 23장은 바리새인들과 서시관들의 멸망을 선언하는데, 예루살렘과 성전파괴의 징조를 언급하는 24장과 연결되기 때문에 이야기5와 강화5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 5를 19-22장
강화5를 23-25장으로 고쳐야 한다.
③ 벤쟈민 베이컨의 구조
프롤로그 1-2장 출생 이야기
책1 3장-4:25절 이야기
5장-7:27절 강화-산상설교
중심 관용어 7:28-2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책2 8:1-9:35절 이야기
9:36절-10:42절 강화-선교와 순교에 대한 담화
중심 관용어 11:1절 “예수께서.....명하기를 마치시고....가르치시며”
책3 11:2절-12:50 이야기
13:1절-52절 강화-천국에 대한 가르침
중심 관용어 13:53절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책4 13:54절-17:21절 이야기
17:22절-18:35절 담화-교회행정에 관한 내용
중심 관용어 19: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책5 19:2절-22:46절 이야기
23:1절-25:46절 강화-종말과 고별연설
중심 관용어 26: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에필로그 26:3절-28장 마지막 만찬부터 부활까지
대부분 오경구조를 따르고 있다. 저도 이런 구조를 따를 것이다.
프롤로그12345에필로그
각 책은 (1.이야기, 2.강화, 3.마치니라...)는 유대경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2. 신학적 강조점
바리새인들이 조직적 신학자라기보다는 본문 해석자들이었는데, 예수님과 성경 해석을 놓고 부딛힌다. 구조를 살피면서 ‘유대경전’이나 ‘오경’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마태복음도 경직된 성경은 아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있다. 그러니까 교회에게 주어진 목회적 신학이라 할 수 있다.
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가르침을 주시는 교사로 소개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선생님으로 불린다(8:19,9:11,12:38,17:24,19:16,22:15-16,23-24,36). 예수님 자신도 교사라고 부른다(10:24-25,23:8-10,26:18). 그리고 마태복음의 마지막 절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을 담고 있고, 그 가르침은 지켜야 할 내용인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 그 이유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은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배우고, 가르치면 된다. 그것이 동행하는 길이다.
우리는 나보다 어리거나 나보다 못한 자를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가르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가르침이라는 개념은 배운다는 개념이다. 목사나 성경교사가 가장 많이 배울 때가 가르칠 때이다. 한번 가르쳐보면 그 내용이 더 명확하다. 마치 운전을 하는 사람이 차에 동석하는 사람보다 길을 더 잘 기억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배움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자 모두가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계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마태복음에 의하면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난다. 바라기는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더욱더 집중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이 뒤지혀도 주의 말씀만 있으면 바로 설수 있다. 그리고 그 배움이 삶의 열매를 맺어 진리를 살아내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마5: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요구다. 서기관의 가르침은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왜곡한 가르침이었다. 왜곡되지 않은 바른 말씀은 원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셨다. 이것은 6장을 설교할 때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천국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고 하셨다. 천국은 참믿음의 가르침과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② 이방 선교에 대한 말씀
앞서 서론에서 고정관념에 대한 말씀을 드렸다. 우리는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단순한 접근으로 다가서면 이방선교가 보이지 않는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파송 모습이 다르다.
마10:9-10절이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막6:8-9절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으면 안 된다. 신학적 강조가 있다. 마태는 마가와 달리 지팡이와 신발까지 금한다. 마태는 왜 금했을까? 마태는 한 벌 옷만 입고 맨발로 다녀야 한다. 그 당시 철학이나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지팡이와 신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그들에게 혼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팡이를 들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이방 선교를 위한 적용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계보를 보면, 이방 여인들이 등장한다. 계보에는 다섯명의 여인이 나온다. 마리아(16절), 다말(3절), 룻(5절), 라합(5절), 우리야의 아내(6절)다. 마리아와 밧세바를 제외하면 다 이방인들이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통해 오셨다. 이 여인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기적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만일 기적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가 은혜를 입은 사라나 라헬이나 리브가가 언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세 명의 이방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마리아의 예수님의 잉태를 제외하면 모두 이방인들이다. 그것은 앞으로 마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다.
이방 여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 점성술사들도 등장한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러 온 동방박사들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헤롯의 죽음을 피해 애굽, 이방인 지역에서 피하셨다가 돌아오신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던 교회에게 마태가 말씀을 기록해 보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선교를 위해 어떤 순종을 하고 있는가?
3. 기록 목적
마태복음 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면, 바리새파가 유대인들을 통합시키고자 힘쓰고 있다. 결국, 하나로 통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된다. 그런데 마태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복음 안에서 통합하고 있다. 사도 바울만 이런 사역을 감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와 장소를 넘어 헬레 세계의 전기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어떤분인지를 다섯묶음을 통해 소개한다. 그리고 소개하는 이유는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선교와 교육을 위한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프롤로그 1장의 시작은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우리 성경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지만, 헬라어 성경은 다윗으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의 계보”로 번역할 수 있다.
마태복음 안에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이 7번 나온다. 7이라는 완전한 상징적인 숫자다. 그 당시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의 칭호였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시작된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은 이 다윗의 자손을 오해하고 군사적 메시아로 부른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자손임을 말한다.
삼하7:12절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바로 하나님 백성을 구원할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도 소개된다. 신약성경에서 ‘자손’을 단수형으로 사용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곳과 누가복음 19:9절뿐이다. 원래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창세기22: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시는 방식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여 바치려던 그 마음처럼,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죽이시는 사건으로 이루신다. 우리는 또다시 십자가 앞에 서게 된다. 여러분, 우리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피묻은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다. 아들을 죽이시는 사건으로 구원하셨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만민을 구원하시는 복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믿음’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삭을 바치는 믿음)을 구해야 한다. 사실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진 것이 아니다. 계대 결혼의 권리를 박탈당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믿음의 대를 잇는 믿음이 있었다. 여인으로서 얼마나 수치스러웠겠는가? 그렇지만 믿음으로 그 일을 감당한다. 이것이 이삭을 바치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방인이었던 라합은 믿음으로 이스라엘 정탐꾼을 도와 주었다. 그 일이 발각되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을 바치는 믿음이었다. 룻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하나님을 바라보며 시어머니를 따랐다. 그리고 젊은 여인이었지만 젊은 남자가 아니라 보아스를 택하여 남편의 기업을 잇는 믿음이 있었다. 오히려 부끄러운 여인은 밧세바였다. 그녀는 유대인이었지만, 다윗과 간음하였다. 그래서 ‘우리야의 아내’로 등장한다. 그년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교회 다니는 성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의 남편 우리야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밧세바를 보며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난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설 때, 의로워지고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마태는 계속해서 우리를 십자가 앞에 세울 것이다.
<결론>
먼저 배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 배움은 끝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