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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1.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1) 복음이 아닌 종교적 태도로 하는 신앙 생활

종교적 태도 즉 율법주의적 태도는 무언가를 얻기 위하여 계속해서 댓가를 치뤄야하는 특징이 있다.
즉 give and take의 정신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우리는 give and take의 정신이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종교적 태도의 신앙 생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자신의 행동과 노력에 대한 마땅한 댓가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만약 마땅하게 자신이 받는 것이 없거나, 없을 것으로 예상되면 신앙 생활의 행동을 하지 않거나, 점점 하지 않게 된다.

2.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대언자(중보자)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대언자이십니다.
대언자라는 말은 헬라어라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보혜사가 바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의 본 의미는 “조력자”, “중재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조력자”, “중재자”가 된다는 의미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중재자”의 의미를 대하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늘 법정을 한번 상상해보겠습니다.
하늘 법정의 판사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판정 받게 됩니다. 죄는 물어볼 것도 없이 그 결과가 심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 법정에서 심판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판사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재자”가 되십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변호사”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문제를 변호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변호사 예수님께서 변호하시는 논리적 근거가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변호사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변호하시는 논리적 근거는 자신이 이 죄인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직접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변호사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사이에서 자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그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화목제물”이 되시는겁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판사이신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변호사”이시며, “화목제물”이 되십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중보자”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시는 역할을 바로 “중보자”라고 말합니다.

3.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1) 종교적 행위에 의한 선한 행동인가? 복음에 의한 선한 행동인가?

서두에도 이미 얘기했지만 우리는 종교적 신앙 생활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길벗교회 청년부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종교적 신앙 생활로부터 자유로우신가요?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 동기가 복음적인 동기로부터 시작되나요?
혹은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려는 동기가 무언가 우리가 얻으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나요? 즉 give and take 식으로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면 누군가가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한 보답을 해주신다는 생각으로 신앙 생활을 하시나요?
우리는 종교적 신앙 생활의 형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며 교회에서 정말 많은 사역들을 합니다. 저도 많은 사역을 하겠죠? 우리 청년들도 정말 많은 사역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역이 첫 동기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을지라도, 어느 순간 보면 우리의 사역이 우리의 욕심이나 바라는 바에 따라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모교회에 있을 때 찬양 사역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자꾸 저에게 맡겨졌습니다.
중등부, 고등부에서 계속해서 찬양팀으로 섬겼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실제로 음악에도 달란트가 있었어서 쓰임받았죠.
20살이 되어 청년이 되고 중등부 교사를 하면서 중등부 찬양팀 인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믿기진 않겠지만, 정말 달란트가 있었고 찬양팀 지도를 잘 해서 중등부 찬양팀이 정말 많이 부흥했었습니다. 인원도, 실력도 정말 많이 부흥했습니다.
중등부 찬양팀이 특별새벽기도회나 간혹 금요철야기도회에서 담임목사님께서 찬양팀을 세우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어느새 청년부 찬양팀 인도자도 하게 되었고, 어느새 금요철야예배, 저녁예배 찬양팀을 모두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모두 네 개의 찬양팀 인도자를 맡게 된겁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등부 찬양팀 인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네 개의 찬양팀을 맡고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중고등부 교사, 청년부 리더 다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정말 허무한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왜 이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까? 내가 처음에 시작하려고 했던 마음은 알겠는데 이렇게나 많은 사역을 하면서 나에게 얻어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지?
사실 사역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나에게 얻어지는 것은 없는겁니다. 그저 계속 해오던 그 사역의 관성에 의해서 해나가고 있었던겁니다.
이것이 정말 저에게는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셨던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언제 회복된지 아시나요? 군대에 가면서 회복됐습니다.
여러분들 군대를 권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군대를 가면서 모든 사역을 강제적으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금 특이한 군대를 나와서 훈련을 좀 오래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여러분 매 주일이 어떤 마음이 생기는지 아시나요?
정말 하나님을 찾고 바라는 마음으로 주일을 기다리게 되는겁니다.
이것이 단순히 사역을 쉬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마음을 가진 분들이 사역을 다 쉬어야한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 회복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냐면 내가 바라는 것을 얻으려 했던 신앙 생활의 모습을 취하려했던 모습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내가 바라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마음이나, 물질이나, 명성이나, 혹은 그 사역을 유지하려고 했던 그 모습에서 진정으로 바래야 하는 하나님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록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정말 수많은 사역을 했지만 사실은 그 마음의 동기에 의해서 그것이 선한 행동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얻어지는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일 때 매너리즘이 시작되고, 나의 영적인 능력이 채워지지 않는겁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의 동기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랄 때, 비록 교회에서 하는 특별한 사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일 예배를 드리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 선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사역을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만큼의 귀하신 사역의 자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정말 열정적으로 열심히 임해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열심히 임하는 마음 속의 동기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바라고 있냐는겁니다.
종교적 신앙 생활과 복음적 신앙 생활은 정말 한끗 차이입니다. 마음의 동기의 문제입니다. 이 마음의 동기가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다른 신앙 생활을 하게 만드는겁니다.
여러분 단순히 신앙 생활을 교회 안에서의 사역으로 예시를 들어서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서 또한 생각해봐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부르심 받은 여러분의 가정, 직장, 학교에서의 모든 행동들의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해있습니까?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선한 동기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대로 우리도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동기가 명확하다면 우리가 행하는 행동들이 선한 행동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점검해야합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이 마음의 점검을 하지 않는 것이 오랜 기간이 되어 몇년, 몇십년이 지나버린다면 우리의 마음의 동기는 자연스럽게 종교적 신앙 생활의 동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관성이 강해져서 쉽게 고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인지 매순간 점검한다는 것입니다.

(2) 마음의 동기를 확인하는 것의 효과 : 그리스도를 나타냄

마음의 동기를 하나님을 향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나요?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하는지 확인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만 지내는 것으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확인하고 선한 행동을 함을 통해 교회와 세상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도 순서가 역순이 되어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자랑하거나 나타내려고 그 선한 행동을 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선한 행동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합니다.
이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보이는 모습이 세상의 희망이 됩니다.
우리의 현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현대인들이 소망을 과연 어디에 두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사라질 것들, 진정한 소망이 아닌 것들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살아가지 않습니까?
돈을 위해, 계속 되는 쾌락을 위해, 자신이 만족하는 소비를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영원한 소망이 되나요?
그에 반해 우리는 정말 영원한 소망으로 인하여 선한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무엇을 보게 될까요?
세상의 영원한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동기가 영원한 것을 향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죠.
영원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력이 존재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의 환경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할 때에도 우리는 마음의 동기를 확신함으로 다시 회복되고 충전됩니다.
다시 기쁨과 감사가 넘치죠.
마음의 동기를 확인하고 선한 행동을 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 - 세상 속의 빛이 되는 것은 given-so-give의 정신이다.

(2)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할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

예수님은 우리에게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먼저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순종했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인간의 몸으로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서 완벽하게 순종해내신 예수님은 1절에서 말씀하시듯이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완전히 부합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상관없이 살거나 거역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태생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대로 완벽하게 순종하셨으며, 이미 존재하는 죄에 대하여 죽으심으로 “완벽한 의로움”을 성취해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여기서 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내신 “완벽한 의로움”을 우리에게 거저 주신다는겁니다.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예수님의 “완벽한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쳐주십니다.
하늘 법정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하나님이 판사십니다. 이제 판결을 내려야하는데 우리는 죄인 선고를 받고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합니다.
영원한 무기징역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변호사이신데 그분이 하나님의 의로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이미 있는 죄에 대하여 완벽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내셨습니다.
판사이신 하나님이 보았을 때 예수님의 의로움은 완벽합니다. 너무나도 기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쳐주십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된 것을 보시고 선언하십니다.
“원래 이 죄인은 씻을 수 없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무기징역에 처할 운명이었으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완벽한 의로움을 이 죄인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판결하는 것은 이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영원한 무기징역의 처벌을 면할 것을 선포한다. 또한 이제 모든 죄가 해결되었으므로 나의 자녀로 받아들여 나의 나라에서 살아갈 것을 명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예수님의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쳐주시는 것. 그저 예수님을 믿으면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여러분 마음 가운데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이 일은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3) 선한 행동의 원리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여러분의 구주로 믿으시고, 여러분의 왕으로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한 행동을 해야할까요? 해야합니다.
그럼 왜 해야할까요?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와 원리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된 자들은 이미 의로운 존재가 되어 행위가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의로워졌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도 의로워졌다는 것이죠. 의로운 생각을 가진 자들이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의로운 행위를 해야지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로워졌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의로움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행동을 하는 원리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이미 의로운 자가 되어서 선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신 예수님이 그것들을 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을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믿게 하시고 우리가 의롭게 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동을 하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선한 행동을 하게하려는 것입니다.
선한 행동을 하려면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했습니다.
선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생각하시는 것들이 선한 행동입니다. 그 기준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선하지 않았던, 악인이었던 우리를 구원하셔서 의인으로 변화시켜주셔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선한 존재로 회복시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기준에 걸맞는 자들이 됩니다.

4. 그리스도가 이루신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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