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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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
(마태복음 13:44-46)
땅에 있는 나라의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튀르키예, 그리스 등 성지순례를 많이 가는 나라도 있습니다.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 복지가 좋은 나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기도 하고, 동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들도 땅에 있는 나라에 불과합니다. 거기도 아픈 사람이 있고, 거기도 슬픈 사람이 있고, 거기도 고통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땅에 있는 나라는 이스라엘이든 그 어디가 되었든 다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땅에 있는 나라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땅의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나라를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땅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본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라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기간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소망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땅의 이야기를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의 초점은 천국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그분의 첫 메시지는 마태복음 4장 17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천국이 예수님의 첫 메시지였는데 그분은 일관되게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천국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헬라어로 천국은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입니다. ‘바실레이아’는 나라라는 뜻이고, ‘우라논’은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나라’, ‘하늘 나라’가 천국입니다. 한국교회서는 천당이라는 말도 많이 썼는데, 어떤 사전은 천당을 불교에서 파생된 용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당의 ‘당’은 집(당)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가난해서 내 집 한 칸 없이 사는 사람에게 예수님 잘 믿으면 하늘에 집이 있다는 의미로 천당은 집 없는 사람의 서러움을 해결해 주는 단어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바실레이아’가 집보다는 나라라는 뜻이니까 천국이 더 분명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천국과 함께 등장하는 같은 의미의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복음서에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복음서 외에는 디모데후서에서 한 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몇 번 나오기는 하지만, 대부분 천국으로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책인데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이란 단어를 굉장히 신성시해서 말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읽도록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천국’이라는 표현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지만, 강조점이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천국은 하늘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니까 공간적인 장소가 강조된 개념이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된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성경을 읽으실 때 천국이든 하나님 나라든 굳이 그런 구별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계시다가 오신 분입니다. 천국에 계시던 분이 땅에 왜 오셨을까요? 땅에 붙어사는 인생들에게 천국을 말해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천국을 많이 말씀하신다면 우리들은 천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나오는 천국에 대한 모든 말씀을 우리들은 진지하게 받아들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천국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헛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에는 천국이 꼭 들어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을 확신하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천국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 복음 될 수 있습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교회가 복 받기 위해서 예수님 믿는 것처럼 말해온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초신자 분들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이 복이라고 이해하기보다 예수 믿으면 자식도 잘돼, 농사도 잘돼, 사업도 잘돼, 아프지도 않아... 이렇게 이해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이해한 대로 잘되지 않을 때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이러한 것은 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판잣집에서 벽돌집으로, 작은집에서 살다 큰집으로 가는 것을 복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벽돌집도 땅에 있고, 큰집도 땅에 있고 모두 땅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땅에서 땅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땅으로 옮기는 것을 위해 기를 씁니다. 소위 영혼까지 끌어모으는 영끌을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하며 이 땅에서 사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땅으로 옮기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땅에서 땅으로 옮겨주려고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옮기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개선해서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옮겨주시는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이 땅의 나라에서 주님의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그런 구원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고 우리 주변과 세상의 뉴스를 보면 땅의 이야기는 너무 힘든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는 땅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며 애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속에서 허덕이며 고통받고 있는 우리들을 땅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여 천국의 복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땅에 두 발 디디고 사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떠나 거기서 다투고, 갈등하고, 울고, 너무나 힘들게 살고 그리고 멸망을 향해 달려가기에 주님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으로 오셔서 땅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구원은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하나님 자녀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땅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직은 땅에 살고 있고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우리의 신앙의식 안에서는 나는 천국의 백성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이것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백성은 늘 천국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보기 원합니다. 땅의 것을 보면 다 속이 썩고, 괴롭고, 눈물이 나고,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땅의 것에 몰두하지 마시고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보며 천국에 소망을 두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두 비유, 즉 감추인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두 비유가 똑같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만히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44절에서 천국은 ‘감추인 보화와 같다’로 되어 있고, 45절에서 천국은 ‘진주와 같다’가 아니라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는 보화이고, 뒤에는 진주 장사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에는 ‘기뻐하며’란 마음의 상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는 동일한 순서와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귀중한 것에 대한 언급(보화/진주), 그것을 발견하다, (돌아)가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다, 그것을 사다.
이 비유들은 열심히 보물찾기를 하자. 그래서 벼락부자가 되자.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보화를 발견했으면 주인에게 말해주는 것이 정직한 것이 아닌가, 보화의 값에 근접하는 상당한 지불을 해야지 땅값만 지불하는 것이 정당한가 등의 윤리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비유들은 보화의 가치, 즉 천국은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천국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로 소중한 것, 보화들 중에 가장 귀한 보화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어떤 표준으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두 비유를 보면 동일하게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란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는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으로 인해 재물이 많은 청년처럼 혹시 성도님들의 마음에도 근심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분명 천국이 아주 좋기는 한데 나는 내 소유를 다 팔 수 있을까? 이렇게 망설여지십니까? 재물이 많은 청년도 보물이 무엇임을 알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면서도 이미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하지 못함으로써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결국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44절에 있는 ‘기뻐하며’입니다. 이 말은 진주 장사의 경우에는 다시 분명하게 반복되지 않지만,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뻐하며’로 번역된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그리고 그의 기쁨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이는 보물을 발견한 자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후속 조치를 취할 만큼 그것으로 인한 기쁨이 매우 컸고, 그것의 가치는 매우 소중했습니다.
보화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참 천국을 그 마음에 소유하는 자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큰 기쁨이 사람을 얼마나 압도하는가를 묘사합니다. 모든 척도를 넘는 큰 기쁨이 한 인간을 사로잡으면, 그 기쁨은 그를 감격하게 하고 그의 중심을 사로잡아 그의 마음을 압도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발견된 보물의 광채 앞에서 빛을 잃게 됩니다. 아무리 비싼 값도 비싸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기쁨 때문에 충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올인합니다. 이것은 투자의 개념도 아닙니다. 비유에 나오는 두 주인공이 소유물을 희생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발견한 보화, 진주의 모양이나 모습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결심을 촉구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은 우리를 압도하며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칠 수 있도록 합니다. 그것이 정열적인 희생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돈으로 천국을 산다고 한들 도대체 얼마를 가지고 천국을 살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성도들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기뻐하며’는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했던 말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의 기쁨과도 같은 단어입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6장 20절로 2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022년 행복한교회 표어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가진 성경은 신약 175페이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 후 그의 떠남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오신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자신은 떠나지만, 성령이 제자들과 함께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자신의 떠남과 성령으로 다시 오심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믿음의 삶을 살도록 격려하시는 부분입니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해산을 앞두고 여자는 근심하나 해산 후에 큰 기쁨이 찾아오듯이 제자들의 근심도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십니다. 짧은 단락 안에 ‘근심’(4번)과 ‘기쁨’(6번)이라는 말이 명사 혹은 동사의 형태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외에도 ‘곡하고 애통’, ‘고통’ 등도 나옵니다. 제자들이 고통스러운 순간을 만나겠지만, 그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에 나오는 기쁨도 오늘 본문 비유에 나온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제자들에게 임할 기쁨이,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에게 임한 기쁨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라는 것과 세상의 보화라고 믿었던 것이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몸소 체험하시면서 사시잖아요. 세상에서 주는 기쁨들이 오랫동안 나를 압도할 것 같지만 그렇게 오래 가진 못한다는 것, 순간적이라는 것 아시잖아요. 순간적 기쁨은커녕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도 슬픔에 압도당하셨다면, 걱정과 근심 그리고 두려움에 압도당하셨다면 그래서 눈물로 지난날을 보내셨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에, 천국의 소망에 압도당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쁨이 우리를 압도하여서 우리의 슬픔, 걱정, 근심, 두려움, 눈물들을 다 덮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주 좁고 낡은 집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싱글벙글합니다. 그런데 옆집에 사는 사람은 집이 너무 좁고, 낡았다고 매일 짜증을 냅니다. 짜증을 내는 사람이 하루는 옆집 사람에게 “이런 집에 살면서도 아니 어떻게 그렇게 웃으면서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며칠 있으면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갑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새 아파트에 대한 소망이 가슴에 있으니까 오늘 여기 낡은 집에 있으면서도 매일 웃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짜증과 불편함을 다 덮는 것입니다.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은 땅의 어둠 속에서 힘들게 살아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천국과 천국을 선물로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을 이기게 하는 비결이 됩니다. 이 땅의 삶에 승리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다음으로 본문 45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마태복음 6장 33절과 7장 7절에도 나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7장 7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한글로는 앞에 있는 ‘구하라’와 같은데, 헬라어로는 ‘찾으라’가 본문의 ‘구하라’와 같습니다.) 이 두 구절의 말씀을 보면서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와 같다’가 아닌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보화처럼 아주 값진 것이 천국이지만, 그 보화를 찾는 사람 역시 천국과 같습니다. 천국을 구하는 자에게 천국을 주시는 하나님은 그 사람이 천국이 되게 하시고, 그에게 이미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합니다.
천국의 시간적 특징을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 ‘이미’와 ‘아직 아니’입니다. 천국은 장차 우리가 들어가서 살 나라이지만 또한 지금 이곳에 이미 임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미래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미래성과 현재성을 모두 염두에 두고 살되 먼저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고, 주님의 능력과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작은 천국이 됩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마태복음 12장 28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신 후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는 귀신이 쫓겨나가는 그 자리에 벌써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미래적인 것임 것과 동시에 현재 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랑의 원리를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말합니다. 로마서 14장 17절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과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그 본질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서도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먹기를 잘 하셨고 포도주를 즐기셨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즉 우리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평강 그리고 평강이 넘쳐서 나오는 희락(기쁨)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며 본질적 요소가 됩니다.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은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결정하는 것은 라면을 먹느냐 아니면 미슐랭 별 3개가 있는 식당의 음식을 먹느냐가 아니고, 그 마음 속에 성령께서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됩니다. 형편이 어렵고, 내 몸이 아프고 그래도 내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이 있으면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지금 여기에 모인 성도님들께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 찬송하면 이곳 행복한교회가 주님의 나라인 줄 믿습니다. 지금은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이곳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다가 나중에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를 통해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앞서 본문의 ‘기뻐하며’가 보물을 발견한 자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던 일을 중단하며 후속 조치를 취할 만큼 그것으로 인한 기쁨이 매우 컸고, 그것의 가치가 매우 소중함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기쁨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기록된 구약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베풀 구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주님의 날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불의를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는 날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그분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날입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노예가 된 우리들을 건지시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피, 그분의 생명이 우리를 사기 위해서 속전으로 지불되었습니다. 주님이 지불되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까지 다 던져 넣으셔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에게로 오셨습니다. 지난주 김용일 목사님의 말씀처럼 “나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같이 흠이 많고 보잘것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셔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에게 올인하셨습니다. 다 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압니다. 우리가 지극히 값진 진주나 보화가 될 수 있습니까? 그분의 생명까지 다 내어주실 정도로 값어치가 있는 보화입니까? 나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은 절대 지극히 값진 진주가 아닙니다. 흠이 많고, 모가 많이 나서 진주로서 가치가 없고 쓰레기통에 던져야 할 만큼 보잘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사랑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랑에 눈이 멀어서 우리를 지극히 값진 진주로 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니까 흠이 많든지 어떻든지 내 눈에는 너야말로 최고의 진주처럼 값지단다. 너를 사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십자가에 던져도 아깝지 않단다. 그래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소망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셔서 계속되는 대림절을 보내시기 바라며 아울러 성탄의 기쁨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천국을 선물로 저희에게 주심도 감사합니다! 값진 보화를 저희에게 주셨다는 그 기쁨이 저희를 압도하게 하시고 그 기쁨 때문에 저희들의 삶을 아버지께 모두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참 보화이신 아버지께 올인하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도 천국을 많이 경험하게 하시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사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보잘것없는 저희들이지만 최고로 여기셔서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저희도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태산을 넘어 험곡을 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이 땅에서 겪더라도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는 그곳이 하나님 나라임을 알게 하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예배의 자리를 지키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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