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1 양청] 성탄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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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2:1-8
제목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영광받으신 예수님
오늘 함께 살펴본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본문이다. 동방박사들이 왕의 별을 보고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유대 예루살렘을 찾아온 사건이다. 이방의 박사들이 유대 한 작은 마을에서 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유대 땅을 방문한 것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만의 왕이 아니라 온 우주의 왕이 되심을 보여준다. 동방박사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페르시아에서부터 온 별 연구가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에서 유대 땅까지 걸어서 4개월 정도 걸렸다고 하니, 그들 역시도 아기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떠오른 시점부터 선물을 준비하여 넉달 동안 걸어온 셈이다.
그들은 별이 떠 있는 베들레헴으로 곧장 가질 않고,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있던 헤롯대왕을 찾아간다. 아마도 베들레헴 위에 떠 있는 별은 ‘왕의 나심을 상징하는 별'이었기에,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께서 당연히 왕족일 것이라 추측했고, 절차에 따라 왕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아기 예수를 찾지 못하고 결국 베들레헴으로 이동하게 되고, 거기서 아기 예수를 만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역사를 통해 그분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는데, 왜 약속된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그분의 나심에 대해 이방인들을 들어 경배를 받으셨느냐이다. 왜 자기 백성에게 축하와 경배를 받지 않으시고 낯선 이방인들을 통해 경배를 받으셨느냐이다. 우리는 본문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교훈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헤롯대왕이다. 왜 그는 3절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예수께서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동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13절처럼 왜 아기예수를 찾아 죽이려 했을까? 왜 그는 16절처럼 베들레헴과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죽여가면서까지 아기 예수를 없에려 했을까? 지금 로마 치하에서 유대의 분봉왕으로 세워진 헤롯은 혈통적으로 보면 정통 이스라엘,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속이었다. 그는 그의 형 파사엘과 함께 유대 통치권을 놓고 쟁투를 벌였는데, 어릴 때부터 정치감각이 뛰어났던 헤롯은 로마의 실권자들이 바뀔 때마다 줄을 잘 타서 권력을 쌓아갔고, 결국 유대 왕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가족까지 처형하는 일들을 서슴치 않을 정도로 잔혹한 사람이었다. 헤롯보다 정치적 입지가 뛰어났던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모조리 간통죄로 사형을 시켰고,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지적하는 장모까지도 사형시켰다. 그 외에도 다른 아내를 통해 낳은 아들들까지도 다양한 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시켜버린다. 그의 잔혹함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그 지역 인근의 두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잡아죽인 일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가?
혈통적으로도 유대인이 아니었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했으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잔혹한 일들을 서슴치 않았던 그였기에 유대인들, 특별히 율법을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이 그를 지지 했겠는가?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헤롯은 많은 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의 성전이 가장 화려했지만 포로로 끌려가면서 돌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무너져버렸고, 포로귀환 이후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지었는데 일전의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중심에 성전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래서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초호화판 성전으로 새롭게 증축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했다.
이런 부분들을 감안한다면 그가 왜 이토록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의 소식에 소동했는지 이해가 된다. 분명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라고 말했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헤롯은 약속된 메시야가 유대 땅 가운데 나시든 말든 그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기 왕권을 지키는데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던 자였다. 분명 그가 동방박사들에게 한 말은 경건의 말 처럼 보였지만, 이는 경건을 가장한 위선자의 모습이었다.
헤롯대왕은 자신이 증축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을 불러보았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은 헤롯과 뭔가 다른 반응을 보였는가? 하나님을 가장 일선에서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들은 약속된 메시아의 말씀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박사들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왜그러한가? 헤롯대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아주 크고 웅장하게 세움으로서 지금 모든 권력, 모든 재물, 모든 권세의 중심에 그들이 우뚝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벤처기업 말단사원으로 다니다가, 갑자기 삼성대기업의 간부로 스카웃이 된 것과 같았다.
여러분, 교권주의 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부패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너희들과는 다른 특별한 성직이라고 강조하면서, 제사장의 지위를 우상화시킴으로서, 권력을 세속화 시키고, 제도화시키며, 부와 명예와 권세와 성공을 추구하고, 진리를 왜곡하여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는 사싱을 교권주의라고 한다. 본문의 제사장들이 바로 교권주의자였다. 지금 내가 움켜쥔 돈과 명예와 성공으로 인해 메시야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헤롯은 서기관들도 불렀다. 서기관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율법을 기록하는 일을 도맡은 자들이었지만 필요에 따라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가르칠 수 있을 전문가들이었다. 그래서 헤롯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을 때 구약의 예언서들을 읊어가며 정확하게 대답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은 그들의 발걸음을 구주께로 인도하지 않았다. 왜그러한가? 제사장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의 오심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하며, 현실에 만족하며 살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분명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쳤지만,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던 자들이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1:11)"는 말씀이 옳다.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너무 분주해서 주님의 오심을 축하할 겨를이 없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고민들이 너무 심각해서 주님의 오심을 묵상할 겨를이 없다. 지금 당장 즐겁고 기쁜 일들이 많아서 주님 오심이 기뻐할 소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 할 일들이 많아서 주님께 경배하러 나아갈 필요를 못 느낀다.
어쩌면 주님께서 동방의 박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이 낮고 천한 땅 까지 내려오셨건만, 주변에 그 누구도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주님의 나심을 기뻐하지도, 감사하지도 않는다. 넉달이나 걸려가며 이방인이 와야 했을 정도로 그 누구도 주님을 필요로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주님의 나심을 감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주님의 탄생에 감격하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신가? 여러분들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바로 여러분을 위하여 이 낮고 천한 땅 까지 내려오신 주님의 성탄에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이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주님의 오심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고 있지는 않는가?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놓고도 주님의 오심과 별 상관없이 살아간다면, 주님의 성탄에 감격이 사라지고 감사함이 사라진채로 그저 메마른 성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 어느샌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 앞에 놓인 은혜의 촛대를 다른 이들에게 옮기셔서 그들에게서 영광과 기쁨을 받으실 것이다. 마치 이방인 동방박사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처럼.
주님이 무엇 때문에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곳 까지 임하셔야 했는지를 기억하라. 주님이 무엇 때문에 배반을 당하시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셔야 했는지를 기억하라. 주님의 성탄은 곧 나를 대신한 수치와 죽음을 위한 탄생이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더욱 주님께 감사하며 최고의 사랑으로 주님께 올려드리는 이 자리의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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