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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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70 423 261 277
본문 스가랴1:1-6(구1312)
제목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슥1:1 ‘다리오 왕 제 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학개1:1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 임하니라’ 보시듯이, 학개 선지자는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에, 스가랴 선지자는 다리오 왕 제 이년 여덟째 달에 하나님의 종, 곧 선지자로 부름 받았다. 학개가 스가랴보다 2달 먼저 선지자로 부름 받았다. 이처럼 이 둘은 동시대에 각각 하나님께 부르심 받아, 주신 소명에 따라 사역한 동시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왜 하나님은 ‘다리오 왕 제 이년’이라는 시기에 학개에 이어, 스가랴까지 부르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세우신 것일까? 도대체 이 때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두사람이나 세우셨던 것인가? 학개와 스가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사역을 시작한 때인, ‘다리오 왕 제 이년’이라는 시간을 꼭 기억하고 계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리오’는 북 이스라엘의 왕도, 남 유다의 왕도 아니다. ‘다리오 왕’은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움 받은 이방민족의 왕이다. 그 나라는 바로 ‘바사’라는 나라이다. 세상 역사에서는 ‘바사’라는 나라를 ‘페르시아’라고 부른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를 바벨론 이라고 불리우는 신 바빌로니아 제국이 멸망시키고, 또한 신 바빌로니아 제국을 바사라고 불리우는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시키며, 그 이후에 그리스가 세워지고, 그 이후에 로마제국이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페르시아 제국을 살펴볼 것인데, 그 중에서도 성경에 기록된 페르시아 왕들은 초대 왕인 ‘고레스(CyrusⅡ)’, 다리오(Darius Ⅰ), 아하수에로(Xerxes Ⅰ), 아닥사스다’ 이렇게 4명이다. 그 중에서도 다리오 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의 군대 장교였는데, 캄비세스가 죽고 난 후 페르시아 왕으로 등극한 인물이다.
먼저 페르시아를 세운 초대왕 고레스는 성경역사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감동케 하심을 입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하라고 칙령을 내려, 포로귀환의 시대를 연 인물이기 때문이다. 에스라1:1-3 말씀이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에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 하나님의 백성들은 3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 그리고 또, 3차례에 걸쳐 귀환하였다. 3차례의 귀환 모두 바사 왕들의 시대 때였다. 제1차 귀환은 고레스 때 이루어졌고, 제2차 귀환과 제3차 귀환은 모두 아닥사스다 왕 때 이루어 지는데, 2차 귀환은 에스라7장에, 3차 귀환은느헤미야2장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다리오 때는 제1차 포로귀환과 제2차 포로귀환 사이 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귀환과 더불어, 무너졌던 중요한 어떤 무언가를 한 가지씩 회복시키셨다. 제1차 포로귀환과 더불어 회복시키신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다. 제2차 포로귀환과 더불어 회복하신 것은 학자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를 통한 ‘하나님의 율법의 회복’이다. 제3차 포로귀환과 더불어 세운 것은 ‘예루살렘 성벽’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포로귀환과 더불어 ‘성전, 율법, 성벽’을 차례대로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이 진정한 왕으로서 좌정하시고 통치하시는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그렇다면,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다리오 왕은 제1차 포로귀환 이후, 아직 제2차 포로귀환 전이니깐, ‘성전, 율법, 성벽’ 중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관계된 때임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재건은 고레스 때 칙령을 내려 제1차 포로귀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성전재건은 순조롭게 성전의 기초까지 놓는데 이르렀다. 그런데 성전의 기초를 놓고 기념식을 한 뒤, 문제가 생겼다. 그 문제는 혈통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혼합된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들이라며 함께 성전재건 공사에 동참하고 찾아왔지만, 제1차 포로귀환 공동체가 신앙의 순수성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 때문에 그 동참요청을 거절하고 거부함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이 되려 원수로 돌변하여 성전재건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방해로 인해 성전재건공사가 중단되게 되는데, 이 사실을 에스라4:5말씀은 이렇게 증거 한다.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라고 말이다. 그리고 에스라4:24 말씀은 또 이렇게 증거 한다.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중단 되니라”라고 말이다. 언제까지 예루살렘 성전재건공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인가? 다리오 제 이년까지이다.(그 다음해에 성전 재건공사가 재개되어 제 육년 아달 월 삼일에 완공됨) 다리오 제 이년까지 성전재건공사가 중단이 된다. 그런데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 언제 부름 받았다고 했는가? 다리오 제 이년 여섯째 달과 여덟째 달이다. 즉, 성전재건공사가 중단된 막바지에, 달리 말하면 성전재건공사가 다시 재개되기 직전에, 학개와 스가랴는 선지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리오 왕 제 이년’에 학개 선지자에 이어 스가랴 선지자를 연속해서 부르시고 그들을 말씀의 종으로 세우신 이유는, 중단된 성전재건공사를 다시 재개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에스라5:1-2말씀은 이렇게 증거 한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 이처럼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역사를 다시 재개하기 위해서 다리오 제 이년에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당신의 말씀의 종으로 세우신 것이다.
하지만 학개서와 스가랴서는 차이점이 있다. 둘 다 성전재건을 독려하기 위해 선지자로 세움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하지만 그 시작, 즉, 그의 사역의 시작에 있어서 맨 처음으로 꺼내는 말이 서로 다르다. 먼저 학개서의 시작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라고 한다. 반면, 스가랴서의 시작은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이다. 여러분,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시작은 각각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지를 아시겠는가? 학개 선지자는 ‘지금 방치되어 있는 성전’, 즉 고레스 칙령 이후에 성전재건공사가 시작되어 기초까지는 놓았지만, 그 이후로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인해 십 수 년 동안(약16년동안) 중단된 여호와의 성전을 염두에 두고 ‘이 백성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스가랴 선지자는 ‘지금 방치되어 있는 성전’이 아니라 ‘이미 무너져 없어진 성전’, 찬란했던 솔로몬의 영광으로 지어졌던 그 성전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징계하심으로 무너져 없어진 솔로몬 성전을 염두에 두고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학개 선지자는 ‘지금 방치되어 있는 성전’을, 스가랴 선지자는 ‘이미 무너져 없어진 성전’을 염두에 두고, 성전재건의 역사를 위한 예언(말씀)사역의 첫걸음을 각각 내딛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은 스가랴 선지자가 ‘이미 무너져 없어진 성전’을 염두에 두고, 왜, 현 세대들, 즉 포로귀환 세대들에게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 이유, 그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오늘 본문의 3절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얻게 된다. 3절 말씀 함께 읽어보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무슨 뜻인가?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하신다. 회개할 것을 촉구하신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대, 즉 포로기라는 하나님의 형벌이 지나고 다시 포로귀환을 하여 이스라엘에 정착하기 시작한 이 세대가 지난 날의 하나님의 형벌을 기억하고 그 앞에 겸손히 행하는 바른 방향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조상들과 같이 그릇된 방향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인가? 바른 삶을 살고 있었더라면 회개하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임하였던 포로기라는 형벌의 시간동안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비참한 생활을 했더라면, 과거 역사를 살펴보며 자신들을 겸손히 낮추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는 교회다움을 회복했어야 하는 저들이었는데, 포로귀한한 세대들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았다는 것이다.
그럼, 이와 같은 그들에게, 그릇된 방향의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이미 무너져 없어진 과거의 성전’을 염두에 두고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라고 말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 즉 소극적인 의도와 적극적인 의도가 있다. 소극적으로는, 그릇된 방향의 삶을 살았던 옛 조상들에게 진노의 심판을 쏟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6절 하반절에(6절 하반절은 옛 조상들의 고백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 우리에게 행하셨도다’라고 하는 것처럼 그릇된 방향의 삶을 살았던 옛 조상들이 그 길대로, 그 행위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멸망당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적극적인 의도로는, 이제 돌이키라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우리 조상들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한다면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 뻔하니 지금이라도 돌이켜 회개함으로 바른 방향의 삶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너희 마음에 무너진 성전을, 또는 너희 마음에 중단되어 있는 성전건축을 재건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스가랴 선지자가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통해 현 세대들에게 옛 조상들의 심판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그 목적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방향을 설정해 주기 위해서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하나님께서 과거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셨던 이유는 먼저 저들의 마음의 성전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셨다면, 이제 시작될 하나님의 회복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졌던 백성들의 마음의 성전부터 재건함으로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이다. 마음의 성전이 재건된다면 하나님께서 중단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너진 마음의 성전을 바로 세우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 선지자가 과거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뼈아픈 과거사를 통해 현 세대들에게 제시하는 방향성이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가 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라고 말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본받지 말라는 것인가? 4절 하반절 말씀을 보라 “①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③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②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현세대들이 옛 조상들을 본받지 말아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한다.
첫 번째는 ‘옛 조상들의 악한 길(=악한 삶의 방식)과 악한 행위’이다. ‘악한 길, 악한 행위’라고 했는데, 모두 복수로 되어 있다. 즉, ‘악한 길들과 악한 행위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옛 조상들의 악한 길과 악한 행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들의 옛 조상들이 범했던 죄악들은 다양하게 지적될 수 있겠지만, 다른 선지서들을 참고해 볼 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요약본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이사야서 말씀이다. 우리가 지난 본문들을 통해 살펴봤던 이사야서의 배경에서는 옛 조상들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요약한다. “1. 위선적인(형식적인) 예배(11-14절) 2. 공의의 상실(=사회적 불의/15-17절) 3. 우상숭배(28-31절)”라고 말이다. 이와 같은 옛 조상들의 악한 길과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조상들을 본받지 말아야 할 두 번째는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는데, 이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경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약 안에서 말씀에 순종할 의무가 있는 그들이 순종하기 위해서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조상들을 본받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세 번째는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했다.’라고 하는 것처럼 ‘회개의 거부’이다. 이처럼, 이와 같은 옛 조상들의 영적인 문제들을 현세대들은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본받지 말라’는 것은 그릇된 방향으로 걸어간 옛 조상들처럼 똑같은 길을 걸어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가지지만,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릇된 방향에서 돌이켜 올바른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의미도 가진다. 즉, 본받지 말라는 말은, 악한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선한 것을 적극 추구하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본받지 말라는 명령의 소극적인 면은 경계하라는 것이고, 적극적인 면은 조상들이 받은 심판을 반면교사 삼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마치 무엇처럼? 십계명의 계명들처럼 말이다.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라고 해서, 살인하지 않는 것만으로 이 계명을 잘 지킨 것인가? 살인하지 않는 것은 계명의 소극적인 면이고, 적극적인 면은 도리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오늘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라는 명령도 똑같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소극적인 면을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면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받지 말라’의 적극적인 명령은 무엇인가?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본받지 말아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반대로 하면 된다. 즉 1)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정한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 2)공의를 실천하라는 것, 3)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 4)말씀에 청종하라는 것, 5)회개의 명령을 수용하라는 것. 이것이 바로 본받지 말라는 명령의 적극적인 명령인 것이다. 이와 같이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에 두 의미가 담긴 것은 곧 ‘마음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 이다. 또한 마음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조상들의 죄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이제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시는가?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회복과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영광을 맛보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메시지의 핵심이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가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영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다시 한 번 불같은 성령이 이 땅 위에 역사하여 죄악을 불사르고 새 마음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회복과 치유, 부흥’과 관련된 찬양들을 우리의 입을 통해 뜨겁게 부른다. 그러나 ‘회개가 없는 회복, 회개가 없는 치유’가 있을 수 있을까? 오늘 스가랴 선지자는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외친다. 오히려 오늘 우리에게 회복과 치유를 위해서는 회개가 절실하다고 외친다.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일일이 다 말하지 않아도 참으로 우려되는 일이 많지 않는가? 아니, 부패하고 썩은 것들이 너무도 많이 드러나지 않는가. 특별히 교회와 연관되어 이러한 불법과 악행들이 나타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위로의 메시지를 고대하기보다 오히려 심판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하는 경고의 말씀, 돌이키게 하는 회개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기에 오늘 스가랴 선지자의 외침은 그때 그 당시 하나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가장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여러분, 옛 조상들의 잘못된 전철을 다시 답습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 오늘 스가랴 선지자의 외침을 기억하고, 냉철히 오늘 내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바울이 고전10:11말씀을 통해 이렇게 권면하였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라고 말이다. 따라서 나의 예배생활, 나의 신앙생활, 나의 믿음, 처음부터 열까지 옛 조상들의 잘못된 것에 빗대어 내 영적 위치를 점검하고, 오늘과 내일 나아가야 할 선한 방향을 잘 설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고, 치유와 회복과 영광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할 때에,
1.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자. 위선적이고 형식적이던 예배, 불의와 부정을 일삼던 죄악의 삶,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겨왔던 나의 모습들을 회개하자. 또한 나의 불의와 부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 적이 있다면 회개하자.
2. 또한 결단의 기도를 하자. 형식적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되도록, 우리의 삶 가운데 부정과 불의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 살아낼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세상의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되도록, 마지막으로 회개의 명령을 힘써 지키어 하나님께 죄용서의 은혜를 받고,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스런 자녀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