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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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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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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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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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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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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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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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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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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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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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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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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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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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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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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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주 나누었던 세가지
“나의 부끄러운 모습과 이야기.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으시다."
“하나님은 나에게 쉼을 주고 싶어하신다.”
를 아침 저녁으로 묵상하며 지내고 있었나요?
이 선포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저는 아주 확신해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더 성숙하게 그리고 성탄을 더 기다리게 만들어 줄거에요.
잊지 말고 꼭 묵상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이 말씀은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너가 아기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내용이에요.
한번 이상씩을 들어봤을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오늘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남자를 알지 못했던 십대 소년 마리아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보였던 반응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음으로 받아드렸는가에 관한 것이에요.
26절부터 읽었지만 1장 전체를 살펴볼 거에요.
마리아 외에도 주의 사자를 만나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이 있어요.
그는 마리아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높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고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우리는 마리아와 이 사람의 반응에 대한 차이점을 먼저 알아야 해요.
그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요.
사가랴는 오랜 시간동안 자녀를 낳지 못한 상태였고,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해왔었어요.
그런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 말을 해요.
하지만 사가랴는 믿지 않았어요.
18절이에요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나도 아내도 늙었는데 어떻게 애를 낳는다는 것입니까?”라고 반문해요.
그는 제사장이에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에요.
적어도 그가 진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분의 전지전능함을 믿었던 제사장이라면, 이 말을 그대로 받아 “아멘"이라고 했어야 해요.
사람들에게 삶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의무가 있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어요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거에요.
회의적인 모습은 당연한거에요.
“늙은 남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으니까요.
의심해요.
믿지 않아요.
제사장이었던 그가 의심하고 회의적인 모습을 보여요.
그 결과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요.
말을 하지 못하는 사가랴에게 정말 아기가 생겼고, 6개월정도 지난 후 마리아에게 천사가 찾아왔어요.
그리고 그녀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인사를 해요.
만약 천사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저렇게 인사를 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은가요?
일단 믿지 않겠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천사요? 가브리엘요?
예?”
“장난하지 마세요.
몰카인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요?
마리아도 똑같아요.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라는 인사를 듣고 이렇게 반응해요 .
29절이에요.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해요"
처음보는 자가 찾아와서 여자.
처녀인 자신에게 말을 거는데, “은혜.
주께서 너와"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는데, 이런 인사를 받으니 굉장히 당황스러웠을거에요.
29절을 다시 볼까요? 마지막에 “생각하매”로 끝이나죠?
굉장히 당황스러운 그 상황 속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이 단어는 ‘매우 이성적으로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음'을 뜻해요.
굉장히 심사숙고 하고 있는거에요.
처음 보는 자가 와서 말하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은데, 그가 던지는 그 인사가 너무 의미심장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너가 아기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해요.
이 때 마리아의 나이가 몇살 이었는 줄 알고 있나요? 15살이에요.
물론 지금과 그때 나이가 같지 않고 여러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15살은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었어요.
만약 여러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은가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사가랴처럼 반응'할거에요.
“제가요?
제가 어떻게 아이를 갖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 잘못 찾아오신거 아닌가요?”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일거에요.
그런데 마리아는 좀 다른 반응을 보여요.
되물어요.
사가랴처럼 “그 말을 부정하고 무시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어요.
마리아의 이 반응은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반응이에요.
“되물음"은 그리스인이 반드시 가져야하는 믿음의 자세이거든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받아드리기 위한 과정.
즉 질문"이 동반되어야 하거든요.
상황에 대한 이해와 질문 없는, 무조건적인 수용은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고 말아요.
들은 것에 대한 질문과 의문을 갖고,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는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 해요.
그래야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선명해져요.
질문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알아가고 싶다’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어요.
질문을 통해 상대를 파악하고, 내가 믿고 따르고 소화시킬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되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 이해하거나 받아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에요.
우리는 내가 아는 만큼, 내가 경험한 만큼, 내 사고의 경계 만큼만 딱 이해 할 수 있어요.
뭔가 생각하기 어렵거나 복잡해서 그저 수용하고 받아드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남지 않고 다 허공으로 날아 가 버리고 말아요.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어떻게 내가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어떻게 그 믿음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었나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 분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그 은혜가 너무나 선명했기 때문에,
그랬던 은혜가 나에게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믿음이 나의 것으로 소화되는 그 순간은 “상황에 대한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질 때"에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 사고체계와 이성을 허물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받아드리려면 “의심하고 질문을 던져야 해요"
사가랴와 마리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사가랴도 마리아처럼 의심을 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사가랴의 의심은 ‘해답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시키는 닫힌 마음이었어요.
내 삶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라는 것이죠.
나의 삶에 대한 확신이 있는거에요.
그는 제사장이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본이 되어야 했던 사람인데,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려 했어요.
“내가 얼마나 늙었는데, 아내도 늙었는데 우리가 무슨 아이를 낳습니까?
말이 안됩니다"
그 것에 대한 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체, 이미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죠.
마리아의 의심은 어떤 의심이었을까요?
그녀의 의심은 ‘해답을 구하는 열린 마음'에서 나온 의심이었어요.
그녀도 자신이 아이를 갖고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남자를 모르는 여인이 갑자기 임신을 한다는 것은 진짜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녀는 ‘심사숙고'한 후 질문을 통해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어요.
내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고,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해답을 달라 묻고 있어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드리기 위해서,
상황에 대한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거에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서 있을 때,
혹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그 순간 앞에 서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믿음의 반응을 보이고 선택해 오고 있었나요?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그 의심은 “해답을 봉쇄 해버리는 닫힌 마음" “해답을 알고자 하는 열린 마음" 중 어느 쪽에 있나요?
아니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며, 내가 믿는 그 대상과 신앙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을 갖고는 있나요?
이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싸워내면서 얻어내야 그 것이 온전히 나의 믿음으로 아주 단단하게 맺어질 수 있거든요.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
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갖는데 있어 마리아의 믿음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저와 여러분의 믿음도 단계적으로 성장했을거에요.
믿음을 갖도록 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체험은 각자 달라요.
믿고 돌아서서 받아드리고 그 것을 삶에 적용시키는 시간과 속도가 다 다르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도 두가지 단계를 걸쳐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받아드렸어요.
먼저 유연한 의심의 시간을 가졌어요.
자신에게 말하는 천사를 향해 “어찌 이 일이 생기겠습니까?”라고 물어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닫힌 질문이 아니라, 열린 질문이에요.
“전혀 말이 안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라고 말한 것 같지만 이 말에는 ‘어이 없고 믿기 힘든 일이지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겉은 굉장히 유연하게 반응하면서, 마음은 강하게 먹고 있는거에요.
내가 당신의 말을 듣고 신뢰할 수 있도록,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내가 알도록 더 많은 정보를 나에게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유튜브에 홀리 컴뱃이라는 ‘변증'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더라구요.
그것을 보는 청년들도 있겠죠.
어쩌면 그것을 보고 굉장히 속 시원하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거에요.
저는 홀리 컴뱃을 보며 불편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도 기획의도와 전하는 메시지는 좋다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복음은 굉장히 오랜시간동안 세상이 던지는 의심들에 ‘변증'을 하며 답을 주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많은 궁금증과 의심을 갖고 있는 지금 이 세대에게 ‘변증'을 통해 복음을 잘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왜 홀리 컴뱃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도 비그리스도인도 홀리컴뱃을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무의식적인 궁금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마리아와 같은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이죠.
의심을 갖고 바라보지만 그 답이 궁금한거에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
저들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은 것이죠.
정보를 달라는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믿을 수 있는 정보를 달라!고
마리아도 홀리컴뱃을 보는 사람들도, 그리고 우리들도 늘 말씀과 찬양을 부르는 이 모습은
“내가 당신을 신뢰할 수 있는, 붙잡고 갈 수 있는 확신과 정보를 주십시오!”라고 묻고 있는거에요.
이렇게 확신을 갖고자 하는 유연한 의심을 먼저 던지고 답을 들은 마리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순하게 수용'.
받아드려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오 그렇군요! 아주 분명히 알겠습니다.
저를 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이 아니에요.
“아 그렇군요.
아직 그 말의 뜻을 전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힘껏 따라는 보겠습니다.”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믿고 따라가 보겠습니다.”라는
말이에요.
마리아의 이 모습 우리와 똑같지 않나요? 우리의 신앙의 발걸음이 이렇지 않았나요?
의구심이 들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을거에요.
왜 내 삶은 이러해야 하는지 혹은 왜 이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지 생각할 때가 있을거에요.
왜 나에게 이런 상황이 자꾸 생기는 것인지 답답할 때도 있을 것이고
그냥 내 삶이 너무 평탄하고 행복해서 크게 문제가 없다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나랑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을거에요.
하지만 여러분은 계속해서 신앙의 길을 걷고 있죠.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듣지 못한 답이 있지만,
도대체 내가 3년, 5년, 10년 뒤 뭐가 되어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고 있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이유 “아직 다는 모르겠는데, 힘껏 따라보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목사인 저도 “이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매일 매일 해요.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네비게이션처럼 “길을 잘 못 들었다.
목적지를 재설정해라.
우회전 해라.
유턴해라.
직진해라"라고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좀 기다리지 않게, 딱 믿음을 주시고, 딱 길을 보여주시고, 딱딱딱 다 알아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시고, 지체하시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믿음을 갖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요?
(쉬고)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믿음은 우리 스스로 결심해서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 삶에 그 의심을 해소시켜 주시고,
사라진 의심 속에 믿음이라는 것을 심어주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에요.
참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절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아요.
내가 내 마음 속에 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꾹꾹 눌러 담아 저장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심과 고민 그리고 궁금한 모든 마음을 열어 재낀 후, 부정적인 모든 부분을 다 깨부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세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은 믿음을 갖게 되어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계속 회복되어질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거에요.
신앙은 흥정이 아님
의심을 했고,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받아드리기로 했던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고백해요.
앞으로 자신이 겪게 될 모든 일들이 참 어렵고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순종하겠다는 것이죠.
자신의 순종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고, 종이라 고백하고 있는거에요.
“수치를 당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삶이 되어도 나는 감수할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도 결혼한 친구나 아는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10개월이 되었나 계산할 때가 있죠.
허니문 베이비? 혹시 식 전에? 10개월 애매하다.
뭐 이런 생각할 때가 있죠.
마리아도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계산하겠죠.
10개월이 안되는데 어떻게 된거지? 왜 결혼도 전에 배가 불러?
이것은 자신만 욕먹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모든 집안 사람들, 결혼 할 요셉의 집안 사람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태어나게 될 아기까지 욕을 먹는 것과 같았어요.
아이를 낳고 잘 키우면 끝난다? 아니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라고 까지 했으니까요.
여러분들도 결혼하면 “이런 가정을 꾸리고 싶다" 생각하고 있거나 하겠죠? 그 어느 누구도 불행한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을거에요.
자신만 욕을 먹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어요.
내가 욕먹는 것은, 내가 선택했으니 감수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온 가정이 그리고 아들이 욕을 먹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을거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마리아는 ‘순종'하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의심하던 그녀.
정보를 더 달라 말하던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천사를 만났을 때 마리아의 나이는 15살이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사회 계층상 밑바닥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어요.
마리아가 이 제안을 받아드리면, 밑바닥에서도 더 밑바닥 인생이 되는거에요.
배우지 못한 가난한 이 소녀는 사회적으로 매장 될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를 가졌고 태어났다 해도, 그건 마리아만 아는 것이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겠어요?
천사가 나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할 아기라고 말했다.
이 아기의 아버지는 여호와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쳐다보겠어요.
받아드리는 순간 그녀의 삶은 칠흑과도 같은 어두움만 가득한 상태가 돼요.
세상은 이런 믿음을 갖고 고백하는 사람을 향해 미쳤다.
라고 말하도록 하고 매장시킬거에요.
솔직히 저도 마리아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순종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결혼도 하기 전에, 가정을 꾸리기 전에 이미 실패한거잖아요.
전 이렇게 살기 싫어요.
행복하고 싶어요.
결혼도 전에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무시당하고 욕먹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은요?
이런 최악의 선택을 할 수 있겠어요?
(쉬고)
마리아가 이러한 최악 중의 최악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
는 ‘나는 실패하는 삶을 살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의심하고 질문하고 던지는 과정을 통해,
그 의심이 하나씩 해소되어지는 그 시간들을 통해,
의심의 자리가 믿음으로 대체되는 그 상황들을 통해 그녀는 답을 찾은거에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녀를 향한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어요.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한가요?
곧 다가올 성탄절을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나요?
마리아는 어리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소녀였어요.
하나님께서 아무리 확실한 말씀을 주셨어도,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거부 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자신을 통해 이루어나가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고 순종하기로 결정했어요.
받아드리는 순간 그녀의 삶은 어두움 속에 빨려들어간 것 같아보였지만,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마리아"라는 사람은 알아요.
예수님의 어머니였다는 것 다 알고 기억하고 있어요.
그녀의 순종은 단순하지 않아요.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던 엄격한 문화였기 때문에, 매장을 넘어 실제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도 그녀는 목숨까지 걸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렸어요.
마리아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이 특출나게 좋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우리가 몇 달 전에 살펴 보았던 아브라함과 똑같은 상황이에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 길을 갔어요.’
아브라함도 마리아도 보장된 모든 것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 포기하고 길을 떠났어요.
저와 여러분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묵상하고 고백하려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갈 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가야 해요.
신앙은 흥정이 아니에요.
내가 이 것하면 이거 주세요.
이 정도면 충분히 하나님을 위해 살았잖아요.
기도 응답해주세요.
내가 하나님께 물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어요.
이제 내 삶 풀리게 해주세요.
공부 할 시간, 취업 준비 할 시간 다 포기하고 사역 했어요.
이제는 좀! 이라고 하면서 흥정 해서는 안돼요.
신앙은 흥정이 아니에요.
갈 바를 알지 못해도 걸어가는 것 그 것이 신앙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순탄할 수 없어요.
평온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원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거에요.
실망과 역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 깊숙하고 진득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되거든요.
환난과 고난은 우리의 내면과 신앙 그리고 영혼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요.
“겉사람은 낡아져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고린도후 4장 16절.
아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갖고 계셔요.
그리고 우리를 통해 그 일을 이루기로 창세 전부터 이미 작정하셨어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에 우리를 팀원으로 끼어주셨어요.
우리를 통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로 마음 먹으셨어요.
우리가 그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써놓으신 이야기를 그저 걸어가기만 하면 돼요.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연한 글씨 위에 연필로 따라 쓰죠.
그것처럼 저와 여러분은 이미 결과가 정해진 이야기를 읽으면서, 쓰며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거에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이루실 일을 다 만들어두셨어요.
마리아는 자신의 처지가 비록 가난하고 어리고 가진 것 없는 사람에 불과했지만, 과소평가 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 일을 이루어내겠다.라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크신 분이기에, 과소평가 하지 않고 하나님께 삶을 내어드리기로 기꺼이 선택했어요.
마리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에요.
그녀는 십자가를 알기도 전에 그 길을 갔어요.
저와 여러분은 마리아보다 더 나은 조건 속에 있어요.
우린 십자가의 길을 이미 알고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신 그 성취와 놀라운 일들을 보고 듣고 이미 결과를 알고 걸어가는 사람들이에요.
최소한 우리는 마리아와 다르게 ‘갈 바를 알고 가는 사람들'이에요.
사랑하는 가온누리 청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정말 놀라운 일을 계획하셨고, 함께 하고 싶어하세요.
그리고 그 계획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다가올 성탄절을 기쁨으로 준비하고 맞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래요.
그래서 이번 주 여러분이 해야 하는 미션이 있어요.
“하나님과 팀플을 하는 나는 작지 않다.”
“나 스스로를 과소평가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겠다.”
라는 마음을 담아 내일부터 올라갈 1분 묵상을 보고, 느낀 점을 댓글로 다는거에요.
짧은 1분 그리고 별 것 아닌 댓글이 아니에요.
내 삶의 의미를 더욱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시간이 될거에요.
그러니 꼭! 이 미션을 함께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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