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바벨론에서 다니엘처럼(9)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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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6:10–16 NKRV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그들이 나아가서 왕의 금령에 관하여 왕께 아뢰되 왕이여 왕이 이미 금령에 왕의 도장을 찍어서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는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니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확실하니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못하는 규례니라 하는지라 그들이 왕 앞에서 말하여 이르되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다니엘이 왕과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내려고 힘을 다하다가 해가 질 때에 이르렀더라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께서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고치지 못할 것이니이다 하니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노년의 다니엘이 바벨론에 이어 메대 바사 제국에 이르기까지 노년이 되어서도 성령에 사로잡힌 민첩한 사람으로서, 털어서 먼지 하나 나지 않았던 정직함과 정식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시리즈 설교도 다음 주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요.
아시다시피 다니엘은 이방 나라의 고위 관료로서 생활하면서도 정직과 정식의 믿음으로 모범이 된 사람 아닙니까? 물론 다니엘을 제거하려는 다른 두 명의 총리들과 고관들의 모함으로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결국 살아나오게 됩니다.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리모콘 / 단6:23)
23 (다리오)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다니엘은 자기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사자 굴에서도 살아나올 수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믿음을 증거로 삼았던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역시 다니엘처럼 크리스천이고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다니엘이 경험한 것 같은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곰곰이 또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도 같은데 유독 나의 하나님은 ‘왜 그렇게 조용하실까?’ 싶어요.
저는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다니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믿음이 다니엘 6장 10~11절에 나타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이방 나라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었던 첫 번째 증거는 다니엘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다니엘 6장에서는 다니엘이 보여준 자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요. (성경 / 10, 11절 합독)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11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다니엘이 정적들의 함정인 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기도했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다니엘은,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하는 일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늘 기도하면서 '그의 하나님'(his GOD)께 감사했습니다. 11절은 다니엘의 정적들이 다니엘의 기도하던 모습을 지켜본 시각으로 기록되었는데, 거기에도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his GOD)께 기도했다고 기록된다. 이렇게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은 바로 다니엘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시고 온 세상 모든 사람을 돌보시는 분이지만,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방 땅의 정적들과 왕의 눈에도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을 섬기고 믿으며 그분과 늘 동행하는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서에는 유독 하나님과 다니엘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특히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모습이 반복되어 표현되고 있는데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다니엘과 세 친구를 향해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특히 자기 꿈을 깨달아 알았던 다니엘에게는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단2:47)”라고 감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메데 바사 제국의 다리오 왕도 금령을 어긴 다니엘을 어쩔 수 없이 사자 굴에 집어넣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16절 혼자)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your GOD)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다음날 새벽에 일찍이 사자 굴에 가서는 이렇게 슬피 외치기도 하죠. (20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총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 (your GOD)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이에 그치지 않고 왕은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나온 후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조서를 내릴 때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26절)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오죽하면 다니엘을 모함하여 제거하려고 혈안이었던 정적들도 (5절) "이 다니엘은 그(의)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탄하면서 다니엘이 섬기는 그의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뿐인가요? 다니엘의 세 친구도 역시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까? 풀무불 속에 들어간 그들을 가리켜 느부갓네살 왕은 이렇게 인정을 합니다.
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29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대하는 이방 땅의 사람들, 지금으로 따지면 그들의 직장 동료들이 다니엘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그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는 친밀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던 것이고, 그렇게 자신의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 낯선 땅에서 살아갔던 것이죠. 그러니 느부갓네살의 꿈과 해석을 다 알아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께 간구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죠. [화면 / 단2:23]
23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다니엘은 자기 조상들의 삶 가운데 응답하신 약속의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사자 굴에서 나와 다리오 왕을 만났을 때도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단6:22)라고 간증합니다. 다니엘이 얼마나 이 ”나의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많았는지 다니엘서 9장에 70년간의 포로기가 끝난다는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나오거든요. 거기서도 계속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라고 자주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다니엘이 단수와 복수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는 소유격으로 표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시고 운행하시고 미래를 책임지시는 위대하고 크신 분이시지만, 이렇게 한 인간의 삶에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고난이 밀려오고 아픔이 계속될 때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친밀함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책에서 로렌스 수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과 친해진 뒤에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친해지려면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귀히 여기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생각하십시오.”
저는 제 가족들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겠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막연하게 여겨지는 거예요.
저는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일 중독자라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열심히 목회하지 않는 사람이 문제지, 왜 열심히 목회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제 열심이 아니라, 제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성공을 늘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보다 제 목회를 더 사랑하고 있다 보니, 누군가 인정을 안 해주면 제 안에 낙심이 생기고 사람에 대한 원망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지!‘ ’인정받아야지‘ 그러던 중에 2017년 한 해를 건강의 문제로 목회를 쉬게 되면서, 제 영적 상태를 점검하게 되니까 제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게 되더라고요. 목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이런 주님과의 친밀함이 더 깊어지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과 일터에서 다니엘처럼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을 때,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회복될 때 반드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증거 삼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증거가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니엘이 이방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믿었던 두 번째 증거는 다니엘은 능력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했다는 점입니다. (화면 / 11절 합독)
11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 ’기도와 간구‘라는 표현이 구약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지만, 신약에도 동일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빌립보서 4장 6~7절(화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에 대한 바울의 중요한 교훈을 보여주는 빌립보서 4장 6~7절의 말씀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게 했던 권면 아닙니까?
저는 문득 바울이 복음으로 인해 고난당할 때, ’다니엘의 기도를 염두에 두었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 봤습니다. 왜냐하면 정적들의 모함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순교할 각오로 왕의 명령을 어기고 기도한 다니엘의 모습을 구약 율법에 정통했던 바울이라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서를 쓰면서 머릿속에 바로 그 다니엘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 왜 '기도'를 굳이 '기도와 간구'라고 두 번 사용했을까요? 먼저 '기도'라는 단어는 기도의 일반명사이고, 공적 기도라든가 일상적인 기도를 의미하는 보편적 표현 아닙니까? 그러나 간구'라는 단어는 어떤 목적을 놓고 특별한 마음가짐으로, 또한 특별한 자세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 기도를 한다거나 중요한 목표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한다고 할 때는 ’간구'라는 단어를 씁니다. 다니엘서나 빌립보서에 기록된 '기도'와 간구는 그 용법이 동일한 것이죠.
그래서 다니엘은 자신 앞에 닥친 위기 앞에서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와 간구라고 했던 것이니다. 그런 기도와 간구를 통해 얻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평강이었을 테고요. 다니엘도 정해놓은 시간에 하루 세 번 기도했고,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정적들이 바라본 다니엘의 기도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으로 향해 열린 창문 앞에서 다 보라고 시위하듯 기도하고 있는 다니엘의 모습을 정적들이 보았을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보통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기도했으니 다니엘도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하루 세 번 다 기도하고 있잖아요? 하루 세끼 밥 먹을 때 식사기도. “목사님 저는 아점 먹느라 하루 두 번씩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에는 2가지의 특징이 있는데요. (리모콘 / 10절 합독)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의 기도의 특징 첫 번째는,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여는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왜 굳이 예루살렘으로 향해 창문을 열어놓고 그 방향을 바라보며 기도했을까요? 자신의 정적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문 닫아 놓고 조용히 골방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모르십니까? 솔로몬 왕이 지었던 성전은 이미 무너졌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졌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소망, 즉 하나님이 다시금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 근거의 말씀이 (왕상 8:37-39a 새번역).
37 이 땅에서 기근이 들거나, 역병이 돌거나... 온갖 재앙이 내리거나, 온갖 전염병이 번질 때에,
38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혹은 주님의 백성 전체가, 재앙이 닥쳤다는 것을 마음에 깨닫고, 이 성전을 바라보며 두 팔을 펴고 간절히 기도하거든,
39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판단하셔서,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니엘은 이 말씀을 의지하며 예루살렘 성전 방향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가 타국에서 오랜 기간 지내면서도 사명을 잃지 않고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 갖추어야 할 정식으로 믿는 모습 아닐까요?
세상에서 분주하고 늘 바쁜 직장인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경건 생활은 말씀과 기도 아닙니까? 물론 우리 시대에 일터와 가정에서 유지해야 할 신앙은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합한 삶을 살아나가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년 1월 1일부터는 우리의 믿음을 다시 세우기 위해 드라마바이블이라는 오디오성경을 통해 성경을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성경 일독 프로젝트를 실행하려고 합니다. 2월부터는 매달 첫날 드리던 첫새벽기도회를 매월 첫째 주 토요일에 자녀들과 함께 드리는 온 세대 첫새벽기도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말씀과 기도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리 코로나 시대에 가나안 성도다, 다음 세대가 무너지고 있다, 3040세대가 교회를 떠난다 등 어두운 전망이 많지만, 저 같은 목회자들이 먼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를 예루살렘으로 여기고 두 팔을 벌려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우리 하름교회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기도와 간구로 간절히 나아간다면 여러분, 그 똑바로 정신 차리고 자신의 사명의 자리를 감당하는 목회자 한 사람 때문에 왜 교회가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되지 않겠습니까?
여기 계시는 우리 장로님들과 권사님들, 성도님들이 새벽에 나와 “우리 가정의 하나님, 우리 일터의 하나님” “우리 교회의 하나님” 하며 기도와 간구로 나아간다면 왜 새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나의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흘리며 두 팔을 들고 기도하며 간구해야 할 무너진 예루살렘은 어디이며 또 누구입니까?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올 줄 모르는 내 배우자이십니까? 나를 피 말리게 하는 내 자식들입니까? 내년에도 여전히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지 않은 내 일터인가요? 아니면 무너진 내 신앙입니까? 그렇다면 다니엘처럼 간절하게 기도하고 간구해 보십시오.
3천 년 전의 다니엘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 아닌가요? “사랑하는 하름교회 성도 여러분! 일터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 시간은 언제이고 장소는 어디인가요?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의 하나님을 찾고 계십니까?”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까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다니엘서 강해>를 보면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문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그것을 탈출구가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로 이해하게 되었다. 즉 이 창문은 다니엘의 기도를 내보내는 통로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통로였다. 다니엘의 기도의 삶은 정치와 행정이라는 고단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날마다 그의 기도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그가 하는 일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이 창문을 통해 비쳐진 빛은 그의 삶에 어두운 세상 속에 비춰줄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 기도의 창문을 예루살렘을 향해 열려 있게 하셔서 하나님의 빛이 임하는 진입로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다시 오신다 약속하신 예수님을 열려있는 그 기도의 창을 통해 초대하십시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런가하면 다니엘의 기도의 특징 두 번째는, 나의 하나님께 감사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리모콘 / 다시 10절)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는 전용기로 이동할 정도로 바쁜 삶을 사는 분 아닙니까? 그런 그녀가 아무리 바빠도 일과를 마무리하면서 매일 빼놓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감사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루 동안 일어난 일 가운데 다섯 가지 감사 목록을 적는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게 성실히 감사 제목을 적는 것도 놀랍지만, 감사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뭐 거창한 게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감사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둘째,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셋째,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넷째, 얄미운 짓을 하는 동료에게 화내지 않았던 저의 참을성에 감사합니다.
다섯째, 좋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여러분, 놀랍게도요. 오프라 윈프리는 이런 감사 일기를 40년 넘게 지속해서 쓰고 있다고 합니다. 매일 매일 감사하는 습관이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하고 가난에 시달리는 등 수많은 아픔과 역경을 딛고 세계 최고의 토크쇼 진행자로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다니엘도 인간인데, 자기를 죽이기 위해 왕을 속여서 무서운 법령까지 발표하게 한 이 사악한 적들의 음모에 왜 마음에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그 기도금지령 공포된 날은 ‘이제 내가 곧 죽는구나!‘ 하면서 창문을 열고 눈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염려와 두려움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않았어요. ”전에 하던대로“ 기도의 줄을 놓치를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문제로 기도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기도하라(마 6:33)는 가르침을 따라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도의 내용에 ”감사“가 빠지면 안 됩니다. 어린 나이에 낯선 땅에 포로로 끌려오는 모진 운명이었고 욕망이 가득한 바벨론 왕궁에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차별과 압박과 유혹이 있었겠어요? 감사할 수 없는 조건이 많았음에도 그는, 항상 감사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감사로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릴 때부터 감사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교육입니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은 감사하는 신앙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다니엘의 기도에는 감사가 가득했기 때문에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감사가 하루 하루 축적되다보니 인생 최대 위기의 순간에도 돌파할 힘이 생긴 것입니다.
왕의 금령이 선포된 날, 원망과 불안으로 기도할 수 있었지만, 그는 이 또한 하나님의 크신 주권 아래에 있음을 믿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소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감사로 사는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러고보면 이 땅은 내가 편하게 누리는 곳이 아니라,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 할 곳인 것 같습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늘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면 정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진짜 하나님이 크신 분이라고 생각이 드는 게요. 제가 부목사 시절에는 월요일 새벽설교 하는 게 저에게는 한 주를 기도하며 간구하게 하는 영적인 힘이 되는 자리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난 2주간 부교역자가 없어서 월요일 새벽 설교를 하다 보니까요. 전정재 목사님이 그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 그분이 강단에 서 있던 모습이 너무 그립고 사무실에 앉아 있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죠?)
심지어 지난 월요일 새벽에는 일어나는데 갑자기 제 안에서 ’아! 월요일은 좀 쉬고 싶다‘ 이런 불평이 나오는 거예요. ’이 부목사는 좀 일찍 오면 좋을 텐데‘ 저도 모르게 불평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아니, 그 새벽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시는 분들을 두고 더욱 기도하고 간구해야 하는 담임목사라는 사람이 기도를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게 제가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같이 새벽예배 드리러 가는 제 아내에게 부끄럽고, 설교하러 올라가서 성도님들 얼굴 보는 것도 부끄럽고 ‘아~ 이렇게 내가 미숙하구나!’ ‘내가 목사라는 타이틀만 달았지, 담임목사라는 사람이 불평의 길을 걸으면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싶어서 한 주간 감사의 길로 돌이키는 기도만 드렸거든요. 그러면서 저에게 주신 찬양이 바로 이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입니다. 가사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가사)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 행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가사를 생각하시면서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함께 다짐의 기도를 드리길 원합니다.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제가 손을 높이 들고 눈물로 간구해야 할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 속에서 원망과 불평이 아닌, 우리의 모든 생각과 소망을 뛰어 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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