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4 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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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찬송 405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본문 마 9:35-36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2022년도 보름남짓 남았다. 연말연시를 준비하면서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의 시기와 더불어,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코로나시대를 통해 마주해야만 했던 고립과 외로움, 단절, 상처, 우울함과 같은 불안한 정서들, 아울러 삶속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과 아픔들, 그렇게 한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을 맞이하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싶으셨을지를 묵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그 감동을 주시기를, ‘상황과 형편이 어떠할지라도 변함없이 택하신 백성들을 향해 부어지는 그리스도의 마음’ 주님의 그 마음 에 대해 말씀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전하는 설교의 주제도 이와 같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위한 주님의 마음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그 사랑과 그 자비, 그 긍휼하심에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시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축원한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 많은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왜 주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된 자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셨는가? 왜 주님은 병들고 귀신들린 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을 고쳐주셨는가?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 마음 가운데에서 쏟아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백성들이 그 질병으로 고통받고, 죄로 인하여 억눌려 있으며, 상황과 형편 가운데 답답해 하고 있고, 사탄의 권세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 그 모습들을 바라보시며 그분의 속에서부터 솟구치는 자비와 긍휼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은 속과 겉이 다른 삶을 사시지 않았다. 그분이 보이신 모든 삶의 형태들은 그분의 마음을 증명한다.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다.
복음서 안에서 이러한 주님의 모습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8:2-3 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 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나병환자가 주님을 찾아와 구한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어떤 행동을 취하셨는가? 그의 간구에 고민하시지 않았다. 그의 간구에 이것 저것 계산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자마자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병환자는 주님의 가장 깊은 소원에 대해 물었다. “주님께서 지금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그것이 제가 깨끗해지는 것이라면 저는 그것이 능히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심으로서 자신의 깊은 소원이 그를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임을 나타내셨다.
또한 마9:2 를 보면, 예수님께로 중풍병자를 짊어진 친구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힘겹게 중풍병자 동료를 침상에 뉘여서 주님께로 짊어진 채로 다가왔다. 한 성인남자를 들것에 실어서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자체만으로 고된 작업이다. 어쩌면 들것에 실어 주님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힘도 들고 숨도 헉헉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힘겹게 주님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미처 주님 앞에 아뢰기도 전에, 마9:2 주님은 먼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들이 입을 열어 도움을 구하기도 전에 먼저 주님께서 확신과 안도의 말씀을 건네신다. 그를 향한 주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마9:35-36 을 보면, 주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다니시며 그분을 보기위해 모인 무리들을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이는 모인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을 보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터져나와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주님의 공생애 사역동안 그분의 자비와 긍휼은 멈추지 않으셨다.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주님은 그 샘솟는 긍휼로 병자들을 고치셨다. 마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주님은 그 샘솟는 자비로 주린 자들을 먹이셨다. 또한 막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말씀처럼 주님은 큰 무리를 바라보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눅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인생 가운데 상실을 경험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셨다.
방금 말씀드렸던 “불쌍히 여기시다" 라고 번역된 구절에는 원어로 보면 다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의 창자를 가리킨다. 이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가리키는 고대의 표현방식이었다. 마치 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으로, 마치 내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폭발하여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이다. 주님께서는 고난받는 그분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내면 깊은데서부터 우러나오는 긍휼과 자비, 연민을 느끼셨다. 그 감정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폭발하여서 이제는 도저히 억누를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고, 쏟아져나오는 것이다. 그 긍휼하심이 결국 주님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자비하심이 놀라운 치유의 이적을 이끌어내었다. 그 불쌍히 여기심이 놀라운 회복을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또한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매우 슬퍼하시며 눈믈을 쏟으신 사건이 복음서에 2번 기록이 되어 있다. 두번 모두 주님 자신의 비참한 운명 때문에, 혹은 자신이 당하시는 고통 때문에 흘리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대상을 위한 눈물이었다. 한번은 눅19:41 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을 위한 눈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요11:35 에 기록된 대로 세상을 떠난 나사로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주님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택하신 백성들의 고통이었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을 흔들어서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이는 택하신 백성들의 눈물 때문이었다.
주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분은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자들, 사회적으로 비난받던 자들,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는, 그런 일말의 자격도 없던 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공감해주시고 동정을 베푸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다가가셨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님이 진정 “죄인의 친구”라는 칭호에 어울릴 법한 분이셨는가? 우리 주님은 메시야셨다. 구약에서 그토록 많이 강조되고 예언되었던 기름부음 받은 자 이셨다. 주님은 모든 약속된 예언들을 이루실 분이셨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실 택하신 백성들의 소망과 염원의 대상이 되셨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셨기에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셨다. 또한 그분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능가하는 권위를 나타내신 탁월한 성경교사이셨다. 어떠한 권세자보다 힘이 있으셨고, 어떠한 마술사도 따라할 수 없는 신비한 권능을 보이셨다. 주님은 이처럼 위대하시고 강하신 분이셨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주님을 살펴볼 때 이와 같이 강하고 능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도 주님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면, 그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위대하시고 탁월하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께서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이다. 도무지 은혜를 입을만한 어떠한 자격도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만저주심을 바라고, 하나님의 위로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사모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찾아가셨으며, 그들을 만져주셨고, 그들을 만지시고 안으시며 보듬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교도 목사였던 리처드 십스는 말하기를, “불행한 사람들을 주께서 바라보실 때 그분 안에서 창자가 들끓는듯 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의 사역은 그분의 창자로부터 흘러나왔다" 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주님은 단순히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시다. 마치 태양에서 빛줄기가 뿜어져나오는 것처럼, 그분의 자애로운 감정이 주님의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부터 흘러넘쳤던 것이다.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자비와 긍휼을 쏟아주셨던 대상들을 떠올려보라. 하나같이 번듯한 사람이 없다. 병에 찌들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죄인이고, 귀신들린, 하나같이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 뿐이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정결법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과 접촉해서도 안되고, 그들이 머물렀던 곳에 머물러도 안되었다. 오히려 부정한 자들이 근처에 있을 때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져서 그들의 부정함이 나에게 미치지 못하게 해야만 했고, 부정한 자들은 입술을 가린 채로 “나는 부정합니다" 를 외쳐서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율법적인 부정함은 전염성이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을 생각해보라. 지구 상에 존재했던 사람 중에 주님보다 율법적으로 정결하신 분이 또 있는가?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고, 거룩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셨다. 어떤 존재도 주님보다 거룩하지 못하다. 상상해보라. 아주 오랫만에 목욕탕에 가서 시원하게 때도 밀고 아주 단정하고 깨끗하게 씻고 나왔다. 그렇게 목욕을 끝내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이제 집에 가기 위해 목욕탕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길에 아주 더러운 오물들을 보게 된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 더러움이 나에게 묻지 않게 하려고 조심조심 그 길을 지나오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손세차를 했다. 차의 더러운 오물들을 깨끗이 닦아내고 차에 오랜만에 광택도 좀 내어 보고 했다. 그렇게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길에 흙탕물 웅덩이를 만난다. 세차도 하고 광택까지 내었는데 혹여라도 흙탕물이 차에 튀면 더러워질까봐 그 물웅덩이를 아주 조심조심 천천히 지나가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뭔가 부정한 것을 만나고, 더러운 것들을 앞에 두게 되었을 때, 내가 저것과 실수로 접촉해서 부정해지고 불결해질 것을 두려워하고 신중을 기하며 벌벌 떠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 아담의 죄로 인하여 본성 자체가 더러워지고 불결해진 우리임에도 눈 앞의 더러운 것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한다. 율법적으로 불결해진 것을 실수라도 만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물며, 이 세상 가장 존귀하시고 거룩하신 주님은 더욱 부정하고 불결한 것을 만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셔야 맞는 것 아닌가? 아주 조그마한 옥의 티라도 그분의 거룩함을 훼손할 것이 뻔해 보이는데, 아주 작은 오염도 그분의 존귀하심을 훼손시킬 것이 뻔해 보이는데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아주 마땅해 보인다.
그런데 주님께서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을 마주하셨을 때 어떻게 하셨던가? 온갖 창기들과 죄인들과 나병환자들을 마주하셨을 때, 혈류병 여인과 귀신들린 자들과 온갖 오랜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마주하셨을 때, 주님은 가장 먼저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깊은 연민의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다.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시며 그들의 상실과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비참한 상태에 연민을 느끼셨다. 그리고 진정한 자비의 물결이 그분의 마음 속으로부터 홍수처럼 솟아났다. 주님은 그들과 어울리셨고, 그들을 어루만지셨다.
주님은 그들의 상태에 공감하시는 정도로 머무시지 않았다. “많이 아팠겠구나, 힘들었겠구나" 정도로 그분의 마음이 머물지 않았다. 주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자비과 긍휼은 결국 그들의 상처와 그들의 삶을 어루만지시는데까지 나아갔다. 그들을 안아주셨고, 보듬아주셨던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프리허그" 운동이 일어났었던 때가 있다. 과도한 경쟁의 사회에 내몰리면서 현대인들의 마음 가운데 여러 상실감과 우울감, 허탈함, 삶의 다양한 상처들이 있는데, 그런거 일일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아무 말없이 상대를 꼬옥 안아주는 운동이었다. 사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운동에 바쁘게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때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회복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처럼 따뜻한 포옹은 그 자체만으로 지닌 힘이 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 강력한 힘이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어루만지심에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력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주님께서 부정한 죄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의 삶 가운데 들어가셨으며, 그들의 상처를 만지시고, 그 아픔들을 안아주셨지만, 주님은 부정해지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분과 접촉이 일어난 죄인들이 깨끗해지고, 부정한 자들이 정함을 입게 되었으며, 아픈 자들이 회복을 경험하고, 비참했던 운명들이 복된 상태로 옮겨지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주님은 그분의 공생애 기간 중에 실로 다양한 지역들을 다니시며 택하신 백성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셨다. 주님을 이토록 움직인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분의 마음이다.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그 마음이 주님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굿윈은 주님을 가리켜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살로 뒤덮인 사랑이다". 여러분, 1984년에 개봉했던 터미네이터 라는 영화를 아실 것이다. 마치 인간과 똑같은 피부를 입은,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인간처럼 보이는 로봇이 등장한다. 그 로봇을 덮고 있는 살을 벗겨내면 그 안에 실체인 로봇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토머스 굿윈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살을 벗겨내면 그 실체인 사랑밖에 나올 게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죄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 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을 돌아다닌다면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왜인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을 살아가실 때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지금은 어떠하실까? 부활승천하셔서 하늘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은 공생애 때의 모습과 달라지셨을까?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자 결론이니 잘 들으시길 바란다. 우리가 잘 아는 히13:8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라고 말씀한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쏟으신 주님은 외로움 속에서 절망하는 여러분과 함께 슬퍼하신다. 손을 내미셔서 나병환자들을 만지시던 예수님께서 인생 가운데 온갖 오해와 갈등과 마찰로 얼룩진 우리의 상처를 팔로 감싸주신다. 더럽고 부정한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해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상한 심령 가운데 찾아오셔서 여전히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긍휼을 구하는 우리의 미지근한 마음에 불가항력적 정결의 능력을 베푸심으로 응답하신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는 마음을 지니고 계신다.
비록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올려지셔서 지금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나, 그분의 마음은 지상의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영, 성령님을 통하여 모든 일을 행하고 계신다. 지금도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그분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만져 주시고, 우리의 대표가 되시는 주님은 성령 안에서 교회 가운데 거하여 주시며,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은 지금도 자신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강하게 붙들어 매시며,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대해 말씀한다.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매우 중요하다. 고전6:15-16 에서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라고까지 말씀하지 않던가? 여러분, 생각해보라.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만나셨던 수많은 죄인들, 고난받던 자들은 기껏해봐야 주님의 몸에 접촉했을 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을 가리켜 주님의 몸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만져주심이 필요한 존재들이 아니라, 우리를 가리켜 아예 주님의 몸이라고 말씀하신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아름답고, 광대하신 주님의 몸이 된다고 선언하신다.
2천년 전의 율법적으로 부정했던 자들은 주님과의 접촉을 통해 주님을 경험했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으로서 주님을 경험한다. 이전의 수많은 이들보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은 더 가까우시다는 것이다. 수많은 이적을 경험했던 그들보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훨씬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거룩하신 주님의 몸으로서 그분을 경험하는 것,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전으로서 성령의 친밀한 어루만지심을 누리는 것이다.
사랑의 주님께서, 연약한 자기 백성들을 향한 불붙는 심정으로 돌아보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쏟아내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으로, 과거 2천년 전에 온갖 부정하고 불결했던 죄인들을 어루만지셨던 그 주님께서 그와 똑같은 심정으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대하신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이, 우리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찬송 291 외롭게 사는 이 그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