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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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열두제자중에 디두모라는 제자를 특별히 소개하고 있다. 이 디두모라는 제자, 도마는 처음 소개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특별하게 소개되는 것 같이 소개되고 있다, 왜 굳이 특별하게 소개 되어 나타났을까? 이 디두모는 특별한 의미를 갖기보다는 쌍둥이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그를 쌍둥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와 진짜 쌍둥이일지 뭘지는 모르겠지만 , 뭐가 되었든 특징을 가진 자라는 말이다.그에게 보여진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신 것을 드러내실 그 때에 도마는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이 일로 특별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우리는 이것만 봐도 알 수 있게 된다. 이게 문학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와 비슷한 것으로, 전제를 까는 것이다. 황순원 소나기를 읽었을 때, 보라색 꽃, 소나기라는 전제가 소녀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배웠었는데, 그런것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도마를 특별히 보여주면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마에게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라고 고백했다. 증인이 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야 대박대박! 이런 일이 있었어! 이러면서 얘기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 있었던 수 많은 일 중에 놀랄만한 아주 경악할 일이 있으면 바로 전하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런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 때 도마의 대답은 이렇다. 내가 주의 손의 못자국에 손을 넣어보고, 옆구리에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드라마를보면 한번씩 답답해하면서도 주인공의 입장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쟤랑 쟤랑 좋아하는 거 알고 있는데, 답답하면서도 그 주인공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것처럼 오늘 본문을 봐야 한다. 디두모, 도마는 당연히 다른 제자들은 직접 두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도마는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그래서 당연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도마의 의심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드레 이후에 찾아오셨다. 그들이 잊을만한 시간이다. 그 사건이 있은 후 8일이 지난 시점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히 그냥 쉬엄쉬엄 지나갔을 시간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번엔 도마도 함께 모여있을 때에 제자들의 앞에 나타나신다. 제자들이 여전히 모여서 앉아있을 때 제자들에게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선포하시면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도마에게 찾아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손에 그리고 옆구리에 니 손을 넣어보고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제자들과 이제는 다르지 않아진 것이다. 똑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두 가지를 드러내신다. 첫 번째는 자신의 부활을 다른 제자들에게 보였듯이 알리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보기 전까지 도마랑 똑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경험한 이후에 우리가 부활을 보았다! 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에도 계속된다. 두번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니가 했던 말을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기적들을 많이 경험했지만, 이번에 특별히 다시 그런 기적들과 비슷한 것을 보여주시면서 나는 변하지 않고 너희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나는 형상만 그냥 나타난 게 아니라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너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신 그리스도, 그래서 도마에게 너는 믿음있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그 앞에 도마는 하나의 고백을 올려드린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넘어서, 그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 그 믿음의 고백이 나의 고백입니다! 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응답하는 것이다. 또 상징적인것이 이 고백이 요한복음, 4복음서에서 가장 마지막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의 흔적이 된다. 도마는 참 현실적인 것이다. 눈으로 본 것을 믿는 것이다. 아니! 직접 경험한 것만 믿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다 비슷하다. 자연스럽게 믿음이 생긴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직접 경험한 것으로 믿는 사람도 많다. 직접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라는 것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전도사님도그랬고 전도사님 친구도 그랬다. 전도사님은 너무 빨리 하나님을 만나서 부인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나아갔다. 별 말씀은 안하셨는데, 그냥 하나님이 곁에 있다는 것이 느껴지게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처음에 좋아하던 자매 때문에 교회에 갔지만 그 날 이후로 다른 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난 뒤니까 예배하고 나아가는 게 훨씬 중요해졌다. 전도사님 친구는 모태신앙인데, 성인이 되고나서 말씀을 하도 들어서 하나님이 계신 건 알겠는데, 그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고, 주변에 수 많은 친구들이 신앙을 고백하니까, 자기만 소외된 거 같은 느낌을 받았었고, 대학 들어가니 막상 너무 힘들어서, 술 한잔 걸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근데,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 친구를 직접 만나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얘기하긴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전도사님이랑 비슷하게 곁에 있다는 확신을 주셨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편안함을 얻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딱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처음에 했던 것은 평안할지어다!라고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을 예수께서 알고 계시고 그 증거로 부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 그리고 그런 자의 신앙 고백 속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고백이 있었던 것이 결국 제자들의 모습이다.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가? 보고 믿는 믿음도 있고, 보지 않고 믿는 믿음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인격적이셔서 우리가 찾는다면 우리가 만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충분히 만나주신다. 하지만 그 하나님께서 만나주신다는 것이 크게 만나주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예전에 전도사님 따라 교회 나오던 친구가 있었는데, 예전에 가족들이랑 교회 욕을 엄청하던 친구였지만 한 6개월동안 전도사님 따라서 교회왔었는데, 그 이후에 그 친구가 가족들이랑 얘기하면서 교회욕을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이게 뭐지 하는데, 하나님이 계신가 생각하다보니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쩌다보니 자신도 모른 사이에 믿게 되었던 친구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진 자의 반응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그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면서 나아간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끼는 자의 삶에서 항상 자신의 입술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넘쳐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 하나님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자의 고백은 그를 넘어서 흐르기 마련이다. 그 고백이 넘쳐흐를 때,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현재 말씀에는 없지만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은 사도행전, 이후로 너무 유명한 말씀이다. 성령께서 함께 계시고, 성령 충만함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자리에 있게 된다.
외계인을 믿나? - 은지원은 외계인이 있다고 믿고, 다른 pd 1명은 외계인이 없다고 주장하는 토론이 있었다. 신서유기? 1박 2일? 중에 하나 예능에서 방송했었는데, 외계인에 대해서 이렇게 논란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또 논란이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있는 지 없는지이다. 이 세상을 만든 신, 있는가 없는가 그거에 대한 논란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찰스 다윈이 쓴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무신론을 전재로 작성된 책이다. 그리고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유신론, 그것도 유일신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인식할 수 없기때문에 이런 논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본문도 가만보면 이것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도마이다. 이 도마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의심이 많은 제자로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 인물이 의심이 많은가에 대한 것을 생각해봤을 때 전도사님이 봣을 때는 의심이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의심 많은 제자라기 보다는 다른 느낌의 제자라는 것을 전도사님이 생각하게 되엇고, 그것을 함께 나누면서 오늘 설교를 시작하려고 한다.
오늘 본문 첫 번째 절을 보면 디두모라하는 제자 도마가 있었는데, 이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실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