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복음이었다(몬1: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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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12월 11일 주일 청년부
제목 : 끝내 복음이었다
본문 : 빌레몬서 1장 15-25절 *신351
결단찬양 : 오직 예수 뿐이네
[도입]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을 보면 주인공인 장발장이 고작 빵 하나 훔친 것 때문에 18년 형을 선고받아 옥살이하는 장면으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너무나 억울할 일 아닙니까? 고작 빵 한 조각 훔친 것의 결말이 18년간 옥살이라는 것이 당사자에겐 억울하고 또 보는 이로도 가차없고 무자비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합니다.
하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18년이 지나 출소 후에도 그는 주교 비앵브뉘 집에서 은접시를 훔쳐 야반도주 하다 걸리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는 18년 전과 다릅니다. 비앵브뉘는 그에게 오히려 은촛대를 건내며, ‘이건 왜 두고 갔냐’며 오히려 더 내어주는 모습을 보임으로 장발장의 마음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교 비앵브뉘의 호의는 장발장이라는 사람 하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날의 우리의 모습과 또 예수 믿고 나서의 지금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다른 삶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 믿고 주어진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는 무엇입니까? 저에게 있어서도 많은 부분에 있어 성화되어가고 있지만,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든 교회든 또 우리의 가정과 또 일상에서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분명 맞닥드리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생각의 깊이를 깊게 가져가지 않습니다. 물론 생각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곧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다면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겠지.’ 라는 고백과 함께 곧 생각을 접게 됩니다.
저는 이걸 포기라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중심을 두며,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 즉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 뿐입니다.
장발장은 주교 비앵브뉘를 만나 삶이 변화된 것 처럼, 저 역시 예수를 만나 삶에 많은 변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삶의 변화를 누리고 계십니까?
[15-17절 : 변화된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받아주길 소원한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나눌 빌레몬도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누렸습니다. 사실 그의 과거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좋은 사람이었기에 평판이 늘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가 변화된 것은 세상의 시선을 의식해 선하게 살다가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보니 선한 평판을 듣게된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런 그를 향해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설득하며 권유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15절입니다.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오네시모가 분명 사고를 친 것은 맞으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행동하여 빌레몬을 잠시 떠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를 만나 영원토록 빌레몬과 함께 있기 위했음을 이야기 합니다.
저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지혜를 또 보았습니다. 빌레몬이 어떻게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까?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잠시 거처를 떠나 우연히 들어갔다 빌레몬은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다시금 회상하도록 사도 바울은 ‘잠시 떠나게 된 것’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하튼 이 구절에서도 결국 사도 바울은 복음 생각 뿐이었습니다. 사실 복음을 때어놓고 생각해보면, 오네시모는 죄를 범했고, 그 죄에 대한 죄값을 받는 중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16절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이 당시에 노예제도는 거부감이 아닌 마땅하고 당연한 제도였습니다.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늘 이런 제도를 타파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골로새서 4장 1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종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그들을 하대하지 않고 그들 또한 배려하고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작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하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 누리니 우리 또한 그 은혜를 저버리지 말고 베풀라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의 마인드는 바뀜이 없습니다. 빌레몬을 향해서도 오네시모를 종 대하듯 하기보다 정말 사랑받는 형제처럼 받아주라는 것이지요. 노예 제도를 타파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심리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며 나아가고자 했던 모습은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 질서가 혁파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대 나름 파격적인 마인드를 지녔던 사도 바울은 17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오네시모를 노예로 받아들이기 보다 나와 같은 인물로, 즉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역자로 받아들일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참 아이러니할 때가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들을 우리가 품을 수 있을까? 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보는, 우리의 방법을 보기보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18-20절 : 받아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볼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18절부터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향해, ‘너가 예수를 알지 못할 때, 내가 복음을 전해 너가 구원받은 자로 탈바꿈하지 않았니? 그러나 난 너에게 그 댓가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오네시모가 너에게 빚진 것이 있다면 그 빚은 내 앞으로 달아두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럼 과연 누가 그 빚을 사도 바울 앞에 달아둘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누구도 쉽게 그 빚을 달지 못할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인 네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로 칭찬받던 빌레몬에게 있어서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당장 동일한 일이 우리에게 있었다 해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네시모와 같은 자들을 품어줄 수 있어야 함은, 먼저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입었으며, 또 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로, 또 우리의 동역자로써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동성애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동성애라는 죄를 당연 반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경각심을 가지고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는 죄인이며, 또 그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하며 그들이 범하는 죄를 떠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케 됩니까? 바로 사랑이 가능케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또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 무기가 됩니다.
[25절 : 왜 사랑으로 받아주어야 하는가? 우리가 은혜 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조금 급히 빌레몬서를 끝내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사실 빌레몬은 알면 알수록 2-3주 한다고 끝낼 수 없는 책임을 알게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측면이 드러남과 동시에 무엇보다 복음적 측면이 너무나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 빌레몬서를 이렇게 마무리 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큰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인 25절을 함께 보며, 이 곳에 담긴 사도 바울의 복음적 메세지를 함께 나누며 잘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메세지만큼은 여느 서신서와 같은 축복으로 마무리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며 누리게 되는 분복에 있어서 시작도 끝도 다 은혜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마냥 말입니다.
어떻게 마지막 메세지가 시작과 끝 모두 은혜 아니고서야 아닌 것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3절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의 빌레몬서는 지극히 개인적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복음으로 시작해 복음으로 끝나는, 결국 복음밖에 남지 않는 아주 귀한 서신서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만을 강조한 사도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사도 바울이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신약성경을 가만히 보시면, 은혜를 이만큼 강조하여 사용한 자는 사도 바울 뿐 입니다. 사도 바울은 온전히 은혜에 사로잡힌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란, 본질적으로 공로 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내리사랑과도 비슷하다 말할 수 있겠죠.
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저서를 통해 은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은혜는 나타나는 형태가 너무 다양해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정의 비슷한 것을 시도해 볼까 한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신앙 훈련과 자기 부인에 아무리 힘써도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로운 싸움에 아무리 발 벗고 나서도 다 소용없다.
은혜란 또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인종 차별, 교만, 포르노, 간음, 심지어 살인죄를 지어도 별 수 없다.
은혜란 무한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최대치만큼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뜻한다.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가고 있으며, 교회 생활을 하고 있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 시작한 구원이니 천국 문을 들어갈 때 까지도 은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이지요.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빌레몬은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만약 빌레몬이 이 권면을 듣지 않았더라면 빌레몬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가 비록 짧은 서신이지만 이 서신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이 담겨져 있음을 보았고, 그 복음이 바울의 영혼과 삶과 인간 관계 속에 어떻게 소화되고 역사하고 있는가를 보았으며, 아무런 쓸모가 없던 도망친 노예 속에 역사하여 바울의 심복이 되게 하며 복음의 조력자가 되게 만들 수 있는지도 살펴 보았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손해와 상처를 입힌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라는 충격적인 권면과 심지어는 그 이상의 동역자로서 받아들이라는 권면을 함으로 복음의 조력자로 사용하게 해 달라는 요구까지 보았습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겸손하고 사랑에 찬 권면이 가능한 것도, 바울이 당시대 관습으로 보자면 불가능하고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요구까지 빌레몬에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두 사람 속에 역사하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때문 이었습니다.
제가 이 빌레몬 강해를 시작하며 자료를 준비할 때, 소제목으로 정해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당신의 가능성’ 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각자의 모습으로 죄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연약한 점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우리 가운데 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각자의 모습으로, 가장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오네시모의 연약한 점을 하나님은 은혜의 복음으로 덮으시고 새사람이 되어 복음 외에는 어떠한 것도 유익함이 없음을 알게끔 하시어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빌레몬의 삶 가운데 은혜의 복음으로 더하시어 더 하나님의 복음 앞에 무릎꿇어 살아가게 하시며, 사도 바울의 삶에도 은혜의 복음으로 더해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해 더욱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가는데 힘쓰게 각자의 가능성을 활용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에 친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임해 우리의 가능성을 사용하실 것을 기대하시고, 또 소망하시며 순종으로 성장해가는 귀한 청년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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