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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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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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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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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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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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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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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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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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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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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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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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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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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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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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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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1_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 현실
얼마 전, 국내선교부에서 군선교를 다녀 왔습니다.
강원도 철원에 백오부대라는 곳이 있는데, 부대 안에 있는 백오교회에 방문해서 위문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백오교회는 우리 성도님들이 잘 모르실 수 있는데, 높은뜻숭의교회 시절에 세운 교회입니다.
그래서 약 16년동안 후원관계를 맺어오고 있고, 그래서 교회 이름도 높은뜻백오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동안 코로나로 인해 방문이 어려웠었는데, 3년 만에 처음으로 방문해서 함께 예배드리는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날이 공교롭게도 제가 군입대를 한 지 딱 2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20년 전 군입대하던 날은 오늘처럼 무척이나 추웠었는데, 이 날도 강한 추위 때문인지 그 날의 기억이 스물스물 떠올랐습니다.
20년이 지나고 나서, 제가 새파랗게 젊은 청년장병들 앞에 서 있는데, 20년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내 인생은 정말 올바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후회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우리 인생에 대해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지나 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성장해 있는 자신을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퇴보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당혹스러운 것은, 어느 순간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입니다.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보이고, 그다지 나 자신이 쓸모 있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지?’, ‘나는 왜 지금 이 모양 이 꼴인거야?’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빈약한 우리의 자아를 다른 무엇으로 자꾸 포장하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그 틀에 우리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 인생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흘러갑니다.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면,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민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다르게 해석하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다시 인생을 산다면'이라는 책의 저자 김혜남 선생님은, 우리가 열등감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인생은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당신이 스스로를 실패자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거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각 말고,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그것부터 결정하세요.
김혜남 선생님은 그녀의 나이 마흔 셋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부터, 자신의 지나 온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놓쳐서는 안 될 인생의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죠.
22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면서도 그녀가 유쾌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기특하며 대견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삭개오의 이야기로 초대받았습니다.
삭개오는 어쩌면 평생 자기 자신을 잃은 채 살아 왔던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무시하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마음의 갈등이 컸던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던 삭개오는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그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본론1_삭개오의 정체성-세리장, 부자
삭개오는 우리가 교회학교에서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이죠.
삭개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게 있을까요?
키가 작았다,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님을 만났다...세리장이었다, 죄인이었다...대략 삭개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 정도일 것입니다.
당시 삭개오라는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좋지 않은 평판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리장이었는데, 이 세리장이라는 직업이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제국에게 갖다 바치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동족의 피를 빨아 먹고 원수에게 그것을 갖다 바쳐 부를 축척한, 거의 매국노 수준으로 낙인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 삭개오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일단 우리는 삭개오에 대한 편견을 거두어 들일 필요가 있는데요, 세리장이라는 그의 직업이 삭개오의 도덕성에 심각한 결함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삭개오의 입장에서,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리장으로서 그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이 세리장을 관세청장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 삭개오가 한 일은 관세를 매기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거죠.
하지만 그가 거두어들인 세금이 결국 로마 제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문제였을 뿐입니다.
사실 한 사람의 직업이 그 사람의 윤리성을 대표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날 욕을 많이 먹는 직업군이 있는데, 제가 목사이니 목사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는 일탈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분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목사님들이 나쁜 분들은 아니라는 것이죠.
대중의 인식 속에는 나쁜 목사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을 뿐이지, 사실 목사님들 중에는 저처럼 괜찮은 목사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세리장이라는 직업 때문에 우리가 삭개오의 윤리성이나 삶의 태도에 대한 편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삭개오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나쁜 부자라는 인식입니다.
우리가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다른 이의 재물을 취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삭개오가 세리장으로 있던 여리고라는 지역은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여리고 지역에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왔다갔다 했겠습니까?
아마 세리장으로서 받는 월급과 추가수당은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정보만으로 추측해본다면, 우리는 삭개오가 나쁜 부자가 아니라 나름 정당한 수단으로 부를 획득한 부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삭개오는 사회적으로는 지탄받는 직업에 종사했지만 최소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획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자기 배만 불리는 것 같은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대중의 인식 속에 나쁜 사람으로 각인 되어 있을 뿐이었죠.
하지만 우리는 삭개오의 이름만 보아도,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의 이름 ‘자카이'는 ‘깨끗한, 순수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당시 세리장이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죠.
성경은 보통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이름을 통해서 암시하곤 하는데, 삭개오는 세간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항상 깨끗하고 순수한 삶을 추구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본론2_ 예수님과 삭개오의 반응
자, 들어보니 어떠십니까?
삭개오에 대해 좀 다르게 보이십니까?
너무 삭개오에 대한 후한 평가가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칫 놓칠 수 있는 것은, 삭개오라는 사람에 대한 재평가도 중요하지만,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왜 삭개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왜 누가는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이야기를 배치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삭개오 이야기 앞 부분에는 부자 관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같은 부자라는 측면에서 삭개오와 공통점이 있죠.
그런데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부자 관원은 자기의 소유를 다 내놓지 못한 반면에,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내놓으려고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자 관원에게는 재산 전부를 내놓으라고 하셨지만, 삭개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던 것일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차이점을 분명히 파악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부자 관원은 자기가 얼마나 종교적으로 완벽한 사람인지를 거론하면서,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20-21 입니다.
눅 18:20-21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내가 성경에서 말하는 계명을 다 지켰으니, 이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부자 관원에게는 갈급해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조건을 충족시켰으니 자기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상급에만 관심 있었던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간파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러자 그 부자 관원은 크게 근심하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반면에 삭개오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재산을 내놓으라 말씀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것이 들통나서 배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신은 정직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재물에 욕심없이 정직하게 살 것이라는 자기 고백입니다.
삭개오는 도대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아마도 삭개오는 부자 관원처럼 ‘이 정도면 되겠지’가 아니라,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이렇게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내면의 갈급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삭개오의 갈급한 마음을 아셨고, 그에게 특별한 말씀을 하시기보다는 그저 그의 집으로 초대받고 싶다고, 그와 함께 밤새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더 채우고 싶으십니까?
혹시 부자 관원처럼 ‘이 정도면 되겠지’라며 자신을 합리화하며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을 드리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삭개오가 가장 먼저 취했던 행동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상류층에 속했던 삭개오가 자신의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예수님을 보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올라야 할 돌무화과나무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해야만 우리 주님을 다시 보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그 갈급함을 우리 주님께 드러내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보기 위해 무언가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나무 위에 서 있는 여러분들을 발견하신 예수님께서 마침내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더 나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본론3_자신을 찾은 삭개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을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눅 19:9-10 말씀입니다.
눅 19: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어떤 의미인지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남부러울 것이 살아갔던 족장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지하고는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가 오른 여행길은 너무나도 불확실한 여행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으로 가긴 가지만, 그 곳에 대한 정보도 없고 아무런 전망도 없이 그저 낯선 땅을 향해 갈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낯선 땅을 여행하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는데요, 창 18:19 입니다.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소돔과 고모라에서 무고한 백성들이 그 성의 관리들에게 짓밟히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땅의 억울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공의와 정의를 세워가는 일에 부름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께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8절에서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누군가에게 속여 빼앗은 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다른 사람에게 최소한 피해는 입히지 않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변화됩니다.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아야한다는, 자기 의만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공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게 된 것이죠.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공적 신앙을 가진 신앙인으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 번 보십시오.
신문과 뉴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삭개오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냥 먹고 살만하니까, 크게 잘못한 것 없이 적당히 살면 된다는 생각이라면 그렇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는 마음의 질문을 가지고 어떤 삶이 더 가치 있는 삶인지를 묻기 시작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해’라는 생각에서, ‘우리 가족이 저런 일을 겪을 수도 있어’ ‘지금 저 가족들의 심정은 얼마나 괴로울까’ ‘우리 가족이 저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을까’로 바뀌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러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변 사람들과 교제하시면서 그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 정도면 되겠지'가 아니라 ‘이래서야 되겠는가'라는 거룩한 열망을 품으셔서,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찾으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론3_ 길을 찾아 나서는 그리스도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떤 역할을 준비해 놓고 우리가 거기에 맞추어주기를 기대합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디에 투자를 해야 되고, 직장인으로 성공하려면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어떤 물건을 가지고 어떤 차를 타야, 어디에 살아야 성공한 삶이며,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야만 가치 있는 삶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매스컴을 통해 학습되고 거기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날카롭고 거북한 모서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둥근 구멍에 박아 넣은 네모난 말뚝과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인정사정없이 깎아 내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저항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필립스 신약성경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로마서 12:2 (필립스 신약성경)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틀에 억지로 맞추지 말고 하나님이 새로 만드시는 사람이 되어 마음의 태도를 전부 바꾸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하고 완전한 뜻을 여러분은 실제로 입증할 것입니다.
세상이 만들 틀에 순응하라는 압박이 너무나 강력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결국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의 요구 앞에서 순응하기보다, ‘이래서야 되겠는가?라는 질문하는 신앙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유지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키가 작다며 군중들 뒤에 파묻혀 아무 것도 하지 않기보다, 적극적이면서도 주도적으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갈 때, 우리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더욱 더 날카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의 공의를 위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때, 이 세상은 우리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매끄럽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길을 잃은 우리들에게 주님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또 이 대림절의 기간에 우리들을 만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다시금 그 의미를 되찾아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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