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값어치(고후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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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12월 14일 수요일
제목 : 예수의 값어치
본문 : 고린도후서 4장 7-15절 *신289
결단찬양 : 주는 완전합니다
도입_컵의 존재 목적
제가 주방 용품 중에서 관심을 가지는 몇 용품들이 있는데, 그중 컵에 대한 수집 욕구가 조금 있는 편입니다. 그 컵의 금액이 아무리 저렴하다해도 이쁘면 왠지 사고 싶습니다.
그러나 둘이 사는 집에 컵이 필요해봤자 얼마나 필요하겠나 싶어 참고 참아 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 보았던 컵이 다시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며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 어차피 사람들이 집에 많이들 놀러오니 손님들을 위해 사자!’
나름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로 구매의 이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컵들을 하나 하나 모으다보니 쓰기 가장 편한 컵, 가장 심플하나 질리지 않는 컵들이 찻장의 앞쪽에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는 그때의 즐거움으로 끝나고 점점 뒤로, 또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밀려 들어간 친구들은 물대신 먼지만을 담아가고 있습니다.
컵의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컵은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물을 담아 우리가 마실 수 있게 하던가, 또는 사과주스나 포도주스같은 것을 담아 마시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때로는 커피를 담아 카페인을 충전해주는 것이 바로 이들의 목적입니다.
도입_무엇이 담겨 있는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저희 집에 모든 컵이 제 역할을 해내고 있진 않습니다. 누군가는 물을 담아내는 근면성실한 모습을 보이지만, 안쪽에 있는 친구들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근무태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컵에는 담기냐, 담기지 않느냐에 차이가 존재하지만, 무엇이 담기냐에도 차이가 존재 합니다. 저희 집에서 컵들은 대부분 물과 커피나 차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이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이 생겨 찾아 보았습니다. 제 기준 비싸서 사먹을 수 없는 물은 ‘에비앙’인데, 물이 비싸면 얼마나 비쌀까 라는 생각과 함께 찾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가장 비싼 물의 값어치는 얼마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질문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는 ‘어머니의 눈물’이 가장 비싼 물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찾아본 결과, 저희 어머니도 가장 비싼 물의 값어치를 듣는다면 눈물이 쏙 들어가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Aurum79’.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이름 해석을 듣는 순간 상당히 비쌀꺼라는 직감이 옵니다. 라틴어로 ‘빛나는 새벽’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원소 기호로 Au는 ‘금’을 의미하며, 원소 번호로 79는 ‘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물병은 잔과 함께 세트로 나오는데, 금과 다이아몬드와 크리스탈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물의 값어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물은 500ml를 기준으로 10억 2천 6백만원의 값어치를 한다고 합니다. 제주 삼다수 500ml를 하루에 2병씩 매일 마신다 가정했을 때, 1,611년을 마실 수 있는 금액이라 합니다.
다이소에서 천원짜리 컵을 사서 아우룸을 담아둔다면 천원짜리의 컵 가치는 상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장인이 만들어준 컵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것이 수돗물이거나 또는 먼지 정도라면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할 뿐더러 가치도 그리 높지 않을 것입니다.
주제제시_본문 속으로
우리의 인생과 삶을 컵에 비유했을 때, 우리는 어떤 컵이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또 우리 인생의 컵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내려줍니다. 오늘의 말씀을 함께 나누실 때,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이곳 가운데 깊이 임하길 소망합니다.
본문_보배를 담은 질그릇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질그릇에 담긴 보배에 대한 본문입니다. 질그릇이 어떤 그릇입니까? 흙을 이고 다지고 굳히고 만들어낸 그릇이 바로 질그릇입니다.
이 질그릇에 특징이 무엇입니까? 다른 그릇에 비해 나약하고 또 영원하지 않습니다. 알루미늄 그릇과 질그릇만 비교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한 번 떨어뜨릴 때, 알루미늄 그릇은 부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질그릇은 깨지고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또 알루미늄은 시간이 지나 변색이 되어도, 되돌이킬 수 있으며 형태 또한 압력이 가해지지 않는 한 본래의 형태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질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단단해지기보다 금이 가고 금세 부셔집니다.
그런 질그릇 안에 담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보배, 즉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합니다. 보배를 담았다 해서 질그릇의 강도가 알루미늄처럼 단단해지기라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질그릇 안에 야채를 담아도, 보석을 담아도 질그릇은 질그릇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우리를 질그릇이라 표현했습니다. 조금 더 단단한 존재였으면 참 좋았을텐데, 그저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본문_예수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 1. 나는 질그릇 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너무나 멋진 비유임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알루미늄이나 철그릇에 비유한 것이 아니라 질그릇에 우리가 비유되었음이 참으로 아름다움이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이 나약하고 깨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배를 품고 있지만,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지만, 만약 그 질그릇이 너무 견고하고 튼튼하여 부서지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다면, 그 질그릇은 보배를 담았다는 사실에 더 아름다운 그릇이 되려 했을 것입니다.
‘내가 보배를 담은 그릇인데, 나의 가치는 다이아몬드 그릇정도 되야지?!’ 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은혜로 찾아온 보배 예수 그리스도를 이유 삼아 우리가 높아지려 합니다.
하지만, 질그릇이기에 감사한 것은, 우리가 금이 가고 깨지면 깨질수록 보배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값어치가 빛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약한 질그릇임에 참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첫 번째는, “우리는 질그릇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깨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우리가 다이아몬드 그릇이 되려 하면 안됩니다. 예수를 담았으나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 심히 견고한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합니다. ‘열국의 아비’라는 뜻을 지닌 아브라함도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였고, 다윗 또한 자신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하여 죄를 범한 것 또한 인간의 연약함을 보입니다.
구약에서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연약함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도망간 제자들도 인간의 연약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다를 것 없습니다. 우리도 지난 날 돌이켜 볼 때, 연약했던 모습이 참 많지 않습니까? 연약함 시리즈로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면, 끝없는 장편 영화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우리게 귀한 것이 쥐어진다면, 우리는 쥐어진 보배에 감사하며, 올바르게 사용하고자 해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는 연약하기에 가진 것에 감사보단 가진 것을 가지고 자랑하며 우리의 의를 높이려 하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 안에 보배가 담겼으니, 깨져 그 보배가 드러나야 하는데, 오히려 깨지기 보다 ‘왜 우리가 다이아 그릇이 되지 않았는가?’ 에 대한 불만과 불평의 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먼저 질그릇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즉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는 것이 주님의 값어치를 높이는 일에 있어 첫 발자국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_예수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 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감격을 회복하라.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여 우리가 질그릇임을 깨달게 된다면, 우리의 다음 발걸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늘 기쁨이었고 감사였습니다. 옥중에 있어 분명 상황이 좋지 못한 순간에서도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또 복음을 받아들인 오네시모를 보며 ‘그는 나의 유익이 된다.’고 또 ‘그는 나의 심복’이라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1장 18절을 보니,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에게 있어서 옥에 갇힌 환경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처한 모습이 질그릇과 같아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저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 이었습니다.
그의 지난 날 모든 순간이, 자신이 쌓아온 업적들이 전혀 기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은혜의 감격을 회복케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3장 8절과 같이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세상의 것을 충분히 누리고 살았을 사도 바울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세상 것은 배설물이며, 오직 자신이 기쁨과 은혜를 누림은 예수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이찬수 목사님께서 쓰신 서적, ‘아이덴티티 : 예수 안에 있는 자’를 보면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가끔 교통 경찰에게 딱지가 떼일 때, ‘이 정도는 봐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들면서 억울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 불쾌해지지 않는 비결이 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내 마음으로 하는 독백이 있다. ‘안 들킨 게 훨씬 많지롱!’
장난기 가득한 이 멘트를 목회와 연결하여 또 한 번 동일하게 설명하시며, 이렇게 마무리 하셨습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안 들키고 은혜로 덮인 것이 더 많지, 억울한 게 더 많겠는가? 이것을 상기하고 나면 마음의 감격이 회복된다.
우리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보았을 때, 배설물과 같은 지저분함이 참 많으나 이 모든 것을 때마다 드러내지 않으시고, 때로는 눈감아 주시며 손잡아 주시며 위로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더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은혜를 놓치고 삽니다. 행하신 주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오히려 책망하시고 진노하실 때, 역지사지로 되려 우리가 화를 냅니다. ‘이게 뭡니까 주님! 제가 주님 앞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이런 일을 보이십니까?’ 하고 소리친 적이 더 많지 않습니까?
은혜가 사라져갈 때, 은혜의 감격을 회복하지 못할 때, 우리는 지난 날을 보지 못하고 되려 큰 소리 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의 감격을 회복할 때, 우리는 지난 날에 연약함도 덮어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고, 진노하실 때 회개하게 되고, 앞으로의 삶을 결단하게 됩니다. 은혜의 회복은 결단을 이끌어 냅니다.
본문_예수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 3.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라.
결단, 참 많이 합니다. 그러나 말뿐인 삶은 공허한 삶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천으로 한 걸음 더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 대표적 인물입니다. 본문 15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는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에, 그 받은 은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순간만 영광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을 보니, “이는 그가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는 예수님을 만나 질그릇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감격으로 회복하니 매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날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사람의 제 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에 답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창조 목적이 됩니다. 마치 컵이 물을 담아 마시게 하는 것이 존재 목적인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컵에 먼지가 가득할 때, 물을 담을 수는 있지만 마실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은혜를 담으려 하지만, 실천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실천하는 환경적 요소의 어려움으로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의 마음에 세상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배의 시간을 모두 참석하며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함께 하지만, 은혜가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우리 마음밭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은 은혜의 감격을 회복하지 못하는 자들과 또 환경적 요소로 실천이 어려움이 아닌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려워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은혜의 감격을 회복치 못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실천의 발걸음이 어렵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밭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를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까? 아니면 나의 부유함, 욕심, 욕망, 권력과 권능을 위해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막연하고 어려운 일 같지만, 또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을 볼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목표치의 금액을 모으기 위해 때로는 허리띠를 졸라 매기도 하고, 목표한 직급을 위해 시키지도 않은 야근과 때로는 월차와 연차를 반납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라면 모든지 할 수 있다 다짐만 합니까? 실천도 합니다. 이것 저것 빠짐없이 지원합니다. 사람 뿐입니까? 하나님은 더 하셨지 않습니까? 본문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일까지 행하셨습니까?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로 걸어가게 허락하신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니시겠습니까?
삶의 은사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이 우리인데, 나를 살리시고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내는 것, 마땅하며 당연한, 그리고 충분히 가능한 삶 아니겠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 가운데 예수를 보내주셨고, 또 그 날을 기억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기준으로 약 11일 정도 남은 이 시간, 함께 결단과 기도로 기다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우리가 값매김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나, 우리의 목숨을 살리신 분이기에 굳이 가격을 책정해보자면, 우리의 목숨값이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한 사람이 아닌 전 인류의 모든 목숨을 합친 가격이겠지요.
그런 주님을 바라보며 영광과 찬양 돌리는 우리 되길 소망합니다.
질그릇이 깨져야 그 안에 있는 보배가 빛을 발하듯, 날마다 주님 앞에 우리는 죽고 오직 예수로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한 것으로 바꾸신 주님을 기억하시며, 함께 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제목]
1) 질그릇임을 인정하고 나의 나약함,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2) 질그릇 안에 계신 보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회복케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삶 되게
하소서
3) 성탄절을 기다리며 기쁨과 감사로 준비하는 우리, 또 교회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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