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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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변호사가 아니다. 법대를 다닌 적도 없다. 하지만 법정 드라마 〈로 앤 오더〉(Law & Order)를 메모까지 해 가면서 밤새도록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의 있습니다!”라고 크게 외치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판사에게 “존경하는 판사님, 변론을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나서 나는 법정에 갔다. 고소를 당했고 승소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고소 내용은 거짓이었고, 나는 즉시 방어 태세로 돌입했다. 나는 모함을 당했고, 반드시 내 권리를 지켜 낼 참이었다.
변호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하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이건 소액 재판에 불과해. 네가 원하는 건 합의 아니야? 법정에서 변호를 하느라 하루를 허비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냥 합의 사항 제시하고 마무리해. 분명 저쪽도 그걸 기대하고 있을걸?”
나는 아주 좋은 조언이라고 말하며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어림도 없지!”
이것이 내가 〈로 앤 오더〉를 밤새도록 본 이유였다. 재판일이 되었고, 나는 서류 가방과 비행기 표를 샀다. 이윽고 법정에 들어섰다. 〈로 앤 오더〉 제작자 딕 울프가 나를 봤어야 하는 건데! 나는 진술을 하고 내 권리를 주장했다. 판사는 내 손을 들어 주었다. 나는 한 푼도 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법정을 빠져나왔다. ‘암, 누구도 나를 이용할 수 없고말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옳은 일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셨을까? 확실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꿈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라는 제목도 꽤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가르쳐 주신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예수님의 본보기를 살펴 왔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한 번에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의 기초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가르침들을 전해 주신다. 특별히 예수님은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기준을 크게 높이신다.
예수님은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대할지에 관한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뒤집으셨다. 예수님은 여섯 번이나 “이미 너희가 들었다”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이 기존에 배운 것을 인용하셨다(마 5:21, 27, 31, 33, 38, 43 참조). 이것은 랍비가 토라라고 하는 구약 율법의 가르침을 인용할 때 흔히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모두가 알고 받아들이는 성경의 가르침들을 언급하셨다. 요즘으로 치면 이런 말이다. “너희가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다는 것을 안다.” “너희 부모가 이런 식으로 말했겠지?” “네가 어릴 적부터 다닌 교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쳤겠지만.”
예수님은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로 시작하셨다. 그렇게 예수님이 구약의 가르침을 인용하실 때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하지만”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며 인간관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인류에게 원하셨던 바를 올바로 해석하고 더 깊은 차원의 의미를 알려 주신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산상수훈의 몇 가지 가르침을 살펴보자.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경고부터 하고 싶다. 산상수훈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가르침이 적지 않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대부분의 생각과 상충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다 보면 기존의 관계 관념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장을 읽다 보면 당신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굴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이 살면서 만나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떠올리며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본능과 서로 충돌한다. 한 번에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은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대하는 그분의 길에 우리의 삶과 관계를 나란히 놓으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약속하신다.
첫째, 복을 받는다. 산상수훈은 “복이 있나니”라는 일련의 약속으로 시작된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은 복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복으로 이어지는 길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반직관적이게 들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길과는 반대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대로 따르면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이 복을 받는다.
둘째, 영향력을 갖게 된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은 복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기를 원한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다(13-14절 참조). 그러고 나서 소금을 더하고 빛을 발하는 관계 방식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 당시에 소금은 많은 기능을 했다.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특히 구운 감자나 찐 옥수수 같은 것은 소금 없이 먹으면 영 별로다. 나는 소금을 뿌리지 않은 찐 옥수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사람들을 대하면 소금이 제 역할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소금을 뿌리지 않은 찐 옥수수와도 같다. 한마디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한 번에 한 사람이라는 접근법을 삶에 적용하면 사람들 눈에 하나님이 좋게 보인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주목하고 좋아하게 된다(마 5:16 참조).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충돌하는 그분의 뜻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들을 대할 때 당신은 으레 어떻게 반응하는가? 학교에서 폭력을 일삼는 불량학생들, 무례한 동료, 화를 돋우는 형제자매, 짜증 나는 이웃,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 이기적인 친구…….누군가가 상처를 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누군가가 당신을 배신하면? 누군가가 당신을 거부하면? 누군가가 당신을 조롱하면? 누군가가 당신을 이용하면? 누군가가 당신의 험담을 하고 다닌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38).그렇다. 나도 분명 그렇게 들었다. 그리고 듣기 ‘좋았다.’ 누군가 나를 때린다면 그대로 한 방 갈겨 줄 것이다. 내게 고함을 지른다면 같이 고함을 질러 상대해 주겠다. 먼저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겠지만 상대방이 언성을 높인다면 나도 높일 수밖에 없다. 내게 욕을 한다면 똑같이 욕으로 갚아 주겠다. 내게 경적을 울린다면 나도 경적을 울리겠다. 아니, 상대방이 경적에 손을 대는 순간 내 경적은 이미 울리기 시작한다. 경적을 최대한 크게 울리고 상대방의 경적이 멈추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경적 시합에서 매번 상대방을 이길 것이다! 내게는 ‘눈에는 눈’ 방식이 익숙하고 편하다. 어디 나만 그런가. 이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잘 맞아떨어진다.예수님은 널리 알려진 구약의 법인 ‘눈에는 눈’을 인용하셨다. 이 법은 동해보복법으로 알려져 있고, 꽤 합리적으로 보인다. 불의를 강하게 다루면 사람들이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 이 법 이면에 있는 논리다. 또한 이 법은 갈등이 난투극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준다. 처벌이나 응징이 ‘상대가 해를 입은 만큼’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시작하셨지만 이어서 새로운 기준을 주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 5:39). 예수님은 주로 전체적인 원칙을
#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0)잠깐, 예수님! 누군가가 제 뺨을 때리면 복수하지 말고 다른 뺨도 대라고 하셨죠? 싫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소송을 걸어 제 몸에서 속옷을 벗겨 가면 제 겉옷도 주어야 한다고요? 제게 소송을 건 사람에게 제 옷을 예쁜 쇼핑백에 담아서 주라고요? 이건 단순히 다른 뺨을 대는 것과 같은 평화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 아닙니까? 잔인함을 친절로 갚아 주라니요?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속옷은 몇 벌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겉옷은 대개 ‘한 벌’뿐이었다. 그리고 그 겉옷은 쌀쌀해지는 밤에는 담요로 사용했다. 출애굽기 22장은 모든 사람에게 겉옷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겉옷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겉옷을 가지는 것을 기본적인 인권으로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겉옷을 빼앗으려는 소송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때로 자신의 권리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때로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이 가르침에 관해 생각하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겉옷을 양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우리 할머니에게는 양보할 수 있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추위에 떠시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내가 추운 편이 낫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은혜를 갚아 줄 사람에게는 기꺼이 자신의 겉옷을 내줄 것이다. 하지만 소송을 건 사람에게 겉옷을 내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에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요점이다. 이런 종류의 반응에는 세상이 주목하게 되어 있다.이쯤에서 앞서 이 장을 시작하며 꺼냈던 소송 사건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내 변호 기술만큼은 자부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읽고 나서 내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게 소송을 건 사람을 만나 보지 않았다. 고소인의 이름도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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