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두려움을 이긴다
0 ratings
· 17 views1. 왜 믿어야 해? 2. 하나님과의 화목이 먼저 3. 내면의 숨겨진 두려움 보기 4. 우리가 바라봐야 할 복음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왜 믿어야 하지?
왜 믿어야 하지?
어느 날 밤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마무리를 하고 있던 목자들에게 한 무리가 나타나요. 처음보는 사람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천사들이었어요.
그들을 통해 목자들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어요.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이 땅에 왔다.”는 이야기였죠.
“엠바고"라는 말이 있죠.
취재는 하되 “정해진 기간까지 보도하지 않고 보류하는 것"을 엠바고라고 하는데,
엠바고를 거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스포일러를 막기 위한 의도이면서
동시에 그 자료에 대해 언론이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에요.
지금 목자들이 들은 “메시야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엠바고가 걸린 내용일까요?
아니에요.
이건 지금 당장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당장 전해야하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그들은 그 밤에 일어나서 큰 별을 보고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한 이야기를 하면서 메시야가 이 땅에 왔다!’라고 외치기 시작해요.
갑작스러운 목자들의 등장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졌고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18절을 보면 “놀랍게 여기되"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처럼, 들은 사람들은 “다 놀랐어요.”
목자들에게 일어난 일과 지금 태어난 아기가 메시야라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들었어요.
그럼 그 이후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이 아기가 메시야라고? 우리가 지금 메시야의 탄생을 목격한거야?”
“천사가 말한 그 메시야가 이 아기라고? 진심? 진짜로?”
“아 에바야"
뭐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 어디를 봐도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없어요. 사람들은 “놀랍게 여겼어요.” 거기서 끝이었어요.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메시야가 이 땅에 왔다는 그 놀라운 이야기에 큰 영향을 입은 것은 이 목자들이었어요.
왜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목격담이 포함되어 있는 이 이야기를 듣고 놀라기”만 했을까요?
그냥 듣기만 했기 때문이에요.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여러분이 유튜브를 통해 다른 분들의 설교를 들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잘 듣는 것"이에요.
분별하면서 잘 듣는 것이 중요해요.
제대로 새겨듣지 않는다면 어려움 등이 생길 수 있어요.
사람들은 “잘 듣지 않았”어요.
“메시야가 왔다”는 엄청난 메시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구별하여 듣지 않았”어요.
왜요?
이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이 목자였기 때문이에요.
잘 배우지 못했고 사회적 지위와 권력도 없는 평범한 목자들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에요.
목자들은 지금 놀라움과 환희에 가득 차 있어요.
천사들에게 이 이야기를 직접 들었으니까요.
천사들이 찾아와서 목자들에게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했고, 그들은 인격적인 만남을 했기 때문에 너무 생생한거에요.
지금 그들은 굉장히 큰 감동 속에 빠져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 감동까지 도달하지 못했어요.
사람들은 평범한 목자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람들이 호들갑 떠니까 듣고 놀라기는 했어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어요. 그들의 머리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을거에요.
“저 사람의 말을 내가 왜 믿어야 해?”
우리들도 비슷한 상황이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평범한 목자'일 수 있어요.
아니 ‘평범한 목자보다 못할 수도 있어요.’
우린 천사를 본 적도 없고, 계시를 받은 적도 없거든요.
말씀을 전하는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인간이죠.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들에게 우리는 특별히 매력적인 존재들은 아닐거에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비그리스도인처럼 살 때가 더러 있거든요.
성경 읽으려고 하면 분량도 많고 읽기도 어렵고 이해도 잘 안되니까 그냥 넘어가기도 하죠.
앞에 서 있는 저를 비롯해 많은 목사들은 다 크고 작은 흠과 문제들이 있어요.
우리나 세상 사람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분명하게 다른 것이 하나 있어요.
우리나 그들이나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분명하게 다른 것이 있어요.
흠이 많은 저를 통해 그리고 자주 넘어지지만 그래도 일어나려고 하는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거에요.
제대로 듣지 않고 흘려버리면서 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저도 여러분도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대로 살기 위해 적용하는 삶을 산다는 것.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차별되어지는 부분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듣지 않을 수 있어요.
“내가 왜 믿어야 해? 내가 왜 저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해?”라고 되물어 올 수 있어요.
그 때 좌절하지 마세요. 그들의 그러한 의문과 거절은 우리가 잘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니까요.
“평범한 목자들은 메시야를 알았고 그 기쁨의 소식을 전했"어요.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어요.
“평범한 우리들은 메시야를 알고 있고, 그 기쁨의 소식을 각자의 방법”으로 전하고 있죠.
사람들은 메시지를 듣지 않을 것이고, 깨닫지 못할거에요.
그래도 “평범한 목자들은 예수를 전했어요.” “평범한 우리도 예수를 전할거에요"
목자들과 우리가 전하는 것은 ‘분명한 세상의 진리'이고 ‘유일한 소망. 빛'이에요. 그래서 세상은 그것을 믿지 않고 거절하는거에요.
그러니 여러분은 잘 살아내고 있는거에요.
아기 예수가 태어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놀랍게 여기고” 지나갔는데, 유일하게 한 사람은 그 이야기를 굉장히 의미있게 받아드렸어요.
19절에 있어요. 누구죠? 맞아요.
마리아는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생각한다는 것은 세 가지 뜻을 갖고 있어요.
문맥 속에 둔다. 연관 짓는다. 숙고한다.
마리아는 이 아기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잖아요.
처음보는 목자들이 와서 “이 아기가 틀림없는 메시야”라고 말하고 있는거에요.
마리아는 해산의 고통으로 아파하다, 이 이야기를 들은거에요.
그리고 천사를 만난 것, 10개월을 배에 품어 온 것 그리고 지금 아기가 태어난 모든 상황의 문맥을 연관 지어 생각하면서 심사 숙고 하고 있는거에요.
“아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야가 맞는 것이구나!”
10개월동안 알고는 있었지만 그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묵상하지 못했던 마리아가, 지금 이 문맥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진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리고 목자들의 이야기를 새기고 있어요.
새기다의 의미는 정서나 마음과 더 관계가 깊은 표현을 말해요.
“마음에 새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생생히 간직하거나 음미하는거에요.
태국에서 똠양꿍을 처음 먹었을 때 저는 충격을 받았어요.
‘와 뭐 이런 맛이 있냐.’ 하면서 똠양꿍을 먹었는데요.
지금도 그 맛이 기억날 정도로 굉장히 생생한 첫 충격이었어요.
마리아는 지금 이 상황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음미하면서 듣고 보고 있어요.
머리 뿐만 아니라 내면 깊이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죠.
마음에 새기는 일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요.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상대가 말하는 무언가에 대해 집중하겠다는 태도를 말해요.
우리는 귀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있는거에요.
지금 이 자리가 여러분에게는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받아드리면서, 깊이 영향을 받고 있는시간이라는 것이죠.
마리아처럼 말씀을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는 일. 이 두가지를 하지 않으면 메시지를 참으로 들을 수 없어요.
한귀로 흘려 듣게 될 뿐이에요.
함께 나누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속으로 배어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 어떠한 위로나 확신 그에 따른 변화를 절대 경험하지 못할거에요.
세상이 우리의 말을 듣고 믿는 그 반응을 보이도록 하려면, 우리는 “말씀을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는 두 가지”를 꼭 해야 해요.
하나님과의 화목이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이 먼저
14절에 “평화"라는 단어가 나와요.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는 우환이 없고 평온한, 만사형통하는 삶을 뜻하지 않아요.
적의가 사라지가 전쟁이 끝나는 것을 말해요.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끝없는 전쟁을 끝냄으로 찾아오는 관계의 회복. 화목을 이야기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왕이 되려 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늘 도전을 하죠.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삶의 주인처럼 살아가요.
내가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 중심적 통제와 지배욕을 인정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끼리도 평화로울 수 없어요. 부러워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면서 불화가 생겨나요.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타인을 향한 적의로 이어지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어요.
아무리 좋은 취미를 가져도, 또 좋은 책을 읽고 음악을 들어도 절대로 “진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어요.
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 전쟁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할 수 없어요.
성탄절이 바로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해 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된 날이에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통해 그분과 화목할 수 있게 된 존재들이에요. 그리고 그 화목. 화평을 세상에 전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구요.
우리는 반드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 속으로 퍼져야 해요.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 누리는 그 삶의 기쁨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해요.
여전히 하나님께 적의를 들어내면서, 하나님과 끝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누리고 있는 그 화평을 나누어 주어야 해요.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 회복되어진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해요. 저와 여러분을 통해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져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계셔요.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이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Peacemaker” “화평하게 하는 자"에요.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에 화평을 만들어 내는 사람.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이죠.
“나 지금 평안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도대체 뭐에요?”
라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과 진정한 화목을 이루고, 그분이 주시는 화평을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흠과 약점을 인정한 사람이에요.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나는 약하다고, 하나님 없으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자존심을 버리는 사람이에요.
만약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흠과 약점을 인정했는가?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나는 약하다고 인정하며, 자존심을 내려 놓았는가?
한 주를 살아가며 치열하게 고민해야 해요.
내려 놓아야, 하나님과의 불화가 종료되고 화목한 감정을 누릴 수 있게 되어요.
내면의 숨겨진 두려움 보기
내면의 숨겨진 두려움 보기
10절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소개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앞에 내용이 좀 의미심장해요.
일반적으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해지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야 하잖아요? 얼마나 기쁜 소식이길래 “큰 기쁨"이라고 표현을 했겠어요.
그런데 본문을 보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라고 하면서 그 앞에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해요.
좋은 소식을 들으면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무서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천사들의 등장.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충격적인 상황을 보고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나의 사고와 경험을 벗어난 충격을 받으니, 무서워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두려움을 모르던 존재들이었어요.
하나님과 직통 교류를 할 수 있었던 첫 사람 아담처럼,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던 존재. 하나님과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런 존재들이었어요.
그런데 죄가 들어왔죠.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기 시작하면서,
잘 보이던 우리 앞에 왜곡된 형상들을 가져다 놓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긴거에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깨지면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긴 것이죠.
우리는 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을 해요. 그리고 노력하는 우리를 향해 세상은 이렇게 말하죠.
“네 인생의 주관자는 너야"
“너가 잘해야 행복 할 수 있어.”
“너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니까 불행한 것이고,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거야"
스스로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을 절대 불가능해요.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들어 내거든요.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삶을, 그 두려움을 통제 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이 있어요. 정말 기가 막히게, 드라마틱하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일순간 사라지는 때가 있어요.
저와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두려움은 사라져요.
저와 여러분이 나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게 될 때, 두려움은 사라져요.
인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그 두려움이 계속해서 커져가는 이유는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갈 때 두려움을 몰랐어요.
짐승들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맹수들과 함께 뒹굴며 놀만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었어요.
저와 여러분의 삶에 대한 불안이 들거나 혹은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감추려 하기 때문이에요.
그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거에요.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한 그 의도는
“두려움과 답답함을 사라지게 만들 큰 기쁨의 소식을 너에게 준다.”
“이제 내가 너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라"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무서워하지 마라. 눈을 들어 보아라"
“보고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큰 기쁨의 소식을 믿고 제대로 보아라" 에요.
제가 중 1 때 정말 많이 했던 기도는 담대하게 해달라는 것. 두려움을 이기게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제가 살았던 집에서 교회를 가는 지름길은 짧은 산길을 지나가는 것 이었어요. 그런데 그 짧은 산 길에 무덤이 5-6개 정도 있었어요.
그리고 가로등도 하나밖에 없었는데, 센서가 고장나서 사람이 지나가면 꺼지고 사람이 없으면 커지는 이상한 가로등이었어요.
교회에 놀러 가고 싶은데, 그 길을 지나가는게 너무 무서운거에요.
전설의 고향처럼 무덤에서 귀신이 튀어나와서 “내 다리 내놔!”라고 할 것 같고, 가로등은 자구 꺼지죠, 바람이 불면 들리는 나뭇잎 소리들 때문에 머리가 쭈삣쭈삣 설 때가 정말 많았어요.
그 때 마다 기도했어요.
“담대하게 이 길을 지나가게 해주세요. 교회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이 길을 지나갈 수가 없어요.”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게 해주세요"
무려 4년을 넘게 기도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길이 더 이상 무서워지지 않았어요.
제가 성장했기 때문에 무서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에요.
그 어떤 것도 나를 하나님에게서 떨어뜨릴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길이 무섭지 않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분명하게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세요.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라"
“너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두려움을 이젠 바로 볼 때가 되었다."
“눈을 들어 보기만 하라"
우리가 바라봐야 할 복음
우리가 바라봐야 할 복음
10절의 “보라" 라는 이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어요.
두려워하지 말라. 깨달으라.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다.
“보면 두렵지 않다.”
“시간을 들여 내가 너에게 전하는 큰 기쁨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그 복음으로 너는 평안해 질 것이다.”
우리가 바라 볼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에요.
“나를 위해 구세주가 이 땅에 오셨다.”라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에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거부당할 것을 알고 오셨어요.
신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 형이라는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꼈어요.
그런데 그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선택을 했어요.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보고 그 길을 걸어가셨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서 거부당할 것과, 세상에서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복음을 바로 보려 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은 없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게 될 거에요.
여러분 성경 10장 읽기, 기도 1시간 하기, 찬양 30분 부르기 다 좋아요.
그런데 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냥 보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내 삶에 일하실 것을 “그냥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우리가 바라 볼 복음은 “역사 속에 찾아오신 예수님"이에요.
말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
전능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통제권을 잃고 아기가 되어 오신 예수님.
역사 속에 실제하셨던 그 예수님을 우리는 바라 보아야 해요.
그 분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꺼이 두려움을 선택하셨고,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보여 주셨어요.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우리가 바라 볼 복음은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성탄절을 통해 그 분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보아야 해요.
그 분이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는가를 묵상해야 해요.
마리아처럼 듣고, 생각하고 깨닫고 마음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두려움, 압박은 모두 다 사라지게 될거에요.
우리가 바라 볼 복음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보여주신 “역사 속에 찾아오신 예수님"
나를 위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예수님" 이에요.
곧 다가올 성탄절을 기대하며,
모든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기를 소망해요.
지난 한주 생각 이상으로 1분 묵상 댓글을 달아주어서 정말 너무 행복했어요.
이번 한주도 1분 묵상이 올라갈거에요. 이번 주처럼 꼭 그렇게 묵상하고 생각을 댓글로 달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더 기대하고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해요.
그 어느 때의 성탄절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어내고, 그 화목을 우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