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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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1-15
서론
오병이어 사건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나요? 오병이어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신가요? 드넓은 들판에 성인남자만 5천명이라고 했으니 대충 가족단위로 생각한다면 2만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 그들의 모습이 어떠한가요? 억지로 끌려와서 듣고 있나요? 졸면서 듣고 있나요? 모두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어요. 광신대 체육대회를 하는데 2천명이 모였다고 생각해보세요. 평소 화요일, 목요일 수업이 있는 날 저녁에도 주차장이 꽉 차는데, 2천명이 한순간에 모이면 주차하느라 정신이 없고, 화장실은 계속 만원이고,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면 줄을 1시간은 기본으로 서야하고, 밥먹는 곳도 마땅치 않을거에요. 사람들로 인해 쓰레기통은 쌓이다 못해 탑을 이루겠죠. 광신대에 2천명만 모여도 난리가 날텐데, 약 2만명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있었어요. 덥고 냄새나고 목소리도 잘 안들리고 그러한 모든 불편감을 감수하고도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인 거예요. 그런 그들이 졸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까요? 아니에요. 그들은 엄청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배고프기 시작했어요. 2만명의 사람이 어디가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한 마을로 가서 밥을 먹는다고 하면 아마 밥먹다가 하루가 끝날 것 같아요. 이에 예수님은 무리 중에 있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더니 갑자기 무한 복사가 되었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원하는대로 배불리 먹었음에도 떡 2조각과 물고기 12 바구니가 남았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인 열정적인 사람들과 그들을 기적으로 먹이시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미지가 어떤가요? 능력의 예수님. 배고픈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이 떠오르신가요? 여기서 제가 다시 한번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사건은 해피엔딩입니까? 세드엔딩입니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기록을 살펴보면 해피엔딩처럼 보입니다. 2만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이야기가 끝나니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만 유일하게 그 뒤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오병이어 사건에 담겨있는 진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앞 5장을 살펴보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안식일 논쟁이 일어납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예수는 누구인가입니다. 이 논쟁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영생을 주는 자라고 가리쳐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행하신 일을 아들도 행한다고 말씀하시며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처럼 아들도 그러한다고 말하죠(5:19-20) 이는 아버지가 자기 속에 생명을 있게 함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5:26) 그러면서 너희가 영생을 위해 성경을 연구하지만 그 성경이 나에 대해서 기록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죠.(39) 모세는 나를 위해서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너희가 모세를 믿으면 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죠.(5:46-47) 이러한 논쟁 이후에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1절에 나오는 “그 후에 ”는 이러한 문맥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지금까지 성경의 기록이 가리키는 분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맥락에서 오병이어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2절을 살펴보면 큰 무리가 모인 이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인데요. 이때 그들이 본 표적은 갈릴리에서 있었던 왕의 신하의 죽은 아들을 살린 것(4:46-54)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입니다.(4:45)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하는데, 이때 사용된 동사는 과거 미완료로 과거형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큰 무리는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계속해서 지켜본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오자 예수님은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이겠냐고 물어봅니다. 이는 빌립을 시험코자 함인데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무리를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려고 했습니다. 안드레가 아이와 함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이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얼마나 되겠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앉히시고 떡과 물고기에 축사하시고 무리에게 나눠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 표적을 본 후,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합니다.(14절)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라”는 약속을 말합니다.(신 18:15-19) 무리는 모세와 같이 음식을 제공하는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오병이어 사건은 해피엔딩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해피엔딩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상황의 발생, 영웅의 극적인 등장, 영웅의 극적인 형태의 해결, 사람들의 환호. 누가봐도 이것은 해피엔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오병이어는 베드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요한복음의 진 엔딩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15)로 끝납니다. 이때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는 말은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며 “너희랑 도저히 못있겠다 너희는 그러고 살어” 이런 뉘앙스로 제자들조차 모르게 혼자 가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화가 나셨을까? 분명 그 앞절만 보면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왕으로 삼으려는 게 그렇게 화날 일인가요? 노예로 붙잡아 감금해놓고 계속 떡을 복사하도록 하게 만든다는 것도 아니고 왕으로 세운다는데? 예수님은 이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새번역 6:26) 이 말의 의미를 살려 표현해보자면, “야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 이유는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즉, 내가 이 땅에 온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내가 행한 행동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나를 따라오면 자기들의 만족이, 욕심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너희들 정작 나에게는 관심이 없자나.” 예수님이 엄청나게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35절을 보면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새번역 6:3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50-51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를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새번역 6:50-51)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5장 유대인과의 논쟁을 통해서 자신을 영생을 주는 자라고 말하셨는데, 이것을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서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주는 떡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십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은 기꺼이 자기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먹고 마심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이며, 앞으로의 예수님 사역이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큰 무리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가 나의 배가 부르기 때문이 아닌가요? 배가 부른다는 것은 나의 욕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으니까,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으니까,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으니까, 교회를 통해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관계가 넓어지니까,.... 등등의 이유 때문은 아닌가요? 정말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으신가요? 그분과의 사귐을 온전히 누리고 계신가요? 예수님을 앎이 나의 삶을 바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도구적으로 대하지 않고, 예수님을 그 자체로 대해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을 통해서 오병이어 사건의 진 엔딩이 세드엔딩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혼자서 다시 산으로 가신 이유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도구로 전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의 주인이시며,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마실 때 그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에게 들어오시고, 예수님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늘 나를 부인하며 나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를 통해 성령님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기도문의 “일용한 양식”을 구하라는 기도는 참 양식이신 예수님을 구하라는 기도입니다. 또한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의 영원한 사귐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을 구하며, 삶 가운데 먹고 마시며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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