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넷째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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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마태복음 1:18-25
[마1:18-25, 새번역]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사복음서들 중에서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2:1–7)에만 기록되어 있다. 마태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이다. 마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나셨다는 사실, 주의 사자가 이런 일을 미리 알려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들이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시면서도(요셉의 아들), 원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을 드러낸다.

1)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고지(1:18–21)

마리아와 요셉은 약혼한 상태였다(18절a). 주후 1세기 유대에서의 약혼(므네스튜떼이세스, μνηστευθείσης)은 오늘날 우리의 약혼(engagement)보다 훨씬 강한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비록 육체적 관계는 허용되지 않았으나 결혼한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약혼한 사람이 간음을 하면 간음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다(참고. 레 20:10; 신 22:23–27). 일반적으로 약혼한 지 1년쯤 지나서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하지만 약혼한 상태에서도 남편과 아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었다(참고. 16, 19, 20, 24절).)

그런데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하였다. 여러 정황을 가지고 추정해 볼 때 당시 마리아는 임신 4개월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후에 친척 엘리사벳과 석 달을 함께 지낸다(눅 1:36, 56).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18절b). 이는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육체적 관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은 아담에게서 비롯된 원죄를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이 아버지 없이 어떻게 잉태될 수 있는지를 주장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예수님이 아버지 없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선언할 뿐이다. 그런 다음에 그는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법적 정통성, 즉 예수님이 다윗의 법적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19절a). 이는 그가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룬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잘 알고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셉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고 한다(19절b). 이는 마리아가 간음죄를 선고받고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을 막아주려는 의도이다. 율법은 간음한 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령한다(신 22:20–21). 비록 신약시대에는 간음에 대해 구약시대만큼 엄격하게 법적용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간음한 자에게는 혹독한 형벌이 내려졌으며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수치와 모멸을 받았고 결국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가만히 끊으려고 하는 것이다.

요셉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가브리엘)가 꿈속에서 요셉에게 나타난다(20절a; 참고. 눅 1:26–28).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다. 주의 사자가 요셉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것은 다시금 예수님의 법적 정통성을 입증한다. 그리고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한 것은 정식으로 결혼하라는 뜻인데, 이는 그렇게 해야 예수님이 법적으로 요셉의 아들이 되시기 때문이다. 주의 사자는 또한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함으로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을 보증한다(20절b).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한다(21절a). 당시 유대 문화에서 이름은 대단히 중요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굉장히 신중했다. 사람들은 이름이 그의 성격과 인생에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 지어주신 “예수”라는 이름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예수(이에수우스, Ἰησοῦς)라는 이름의 뜻은 주의 사자에 의해 제시되었듯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21절b).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를 포함한 주변국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 이름을 많이 지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실 분이신 성자의 사역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죄로부터의 구원은 선지서에서 줄곧 약속되어 왔던 것이다(예. 사 40:2; 53:6; 렘 31:31–34; 겔 36:25–27; 단 9:24; 슥 13:1). 예수님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참고. 2:6; 3:9; 8:11; 16:18).

2) 임마누엘 예언(1:22–23)

22–23절은 천사가 한 말이 아니라 마태가 한 말이다. 마태는 이사야 7:14을 인용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주전 735년 이사야 시대에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과 아람의 르신 왕이 연합하여 남유다 왕 아하스를 대적하였다. 이때 아하스는 그들로 인하여 극심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때 이사야를 통하여 그에게 특별한 징조가 주어졌다. 그것은 아하스 집안의 한 처녀가 아이(아마도 아하스의 후계자 히스기야)를 낳을 것이고, 그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패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마태는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님의 탄생에 적용한다. 이렇게 하나의 예언이 두 번 이상 성취되는 것을 이중적 성취 혹은 다중적 성취라고 한다. 즉 구약에서 일차적으로 성취된 일이 신약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경우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특별한 의미와 성취를 가진 징조를 주셨는데, 마태는 이것을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징조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당시에 성취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의 오심을 통하여 성취된 것이다. 구약시대에 임마누엘의 예언이 유다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었듯이, 이제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탄생이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음이 되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마태는 처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로 파르떼노스(παρθένος)를 사용하였다. 이사야 7:14에는 “처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알마(עַלְמָה)가 사용되었다. 알마는 젊은 여인이나 처녀를 뜻하는데, 거의 대부분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의미한다(예. 창 24:43; 출 2:8; 시 68:25). 그런데 70인 역의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알마를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성관계를 한 적이 없는 온전한 처녀를 뜻하는 파르떼노스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마태는 70인 역의 번역을 따라서 파르떼노스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의 기록자들과 번역자들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을 드러내고자 노력하였다.

주의 사자는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Ἐμμανουήλ)이라고 했으나, 임마누엘은 실제 이름이 아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예수님의 가족들과 제자들은 언제나 그분을 “예수”라고 불렀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 명칭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라고 하심으로 그 이름에 담겨 있는 약속을 확언하셨다. 결국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무슨 일(우리를 구원하심)을 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그분이 어떤 분(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신지를 보여준다.

3) 요셉의 순종(1:24–25)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데려 온다(24절). 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공적인 혼인 예식을 거행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셉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는다(25절a). 이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보증해 주는 언급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태어난 후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다른 일반적인 부부들처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마태는 “까지”(헤오스, ἕως, until)라고 한정해서 말함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낳고 난 후에는 다른 부부들처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음을 시사한다(참고. 12:46; 13:55). 그러므로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지냈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

요셉은 아들을 낳은 후에 천사의 지시대로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한다(25절b).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 순종하여 메시아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서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을 도왔고, 마리아는 요셉의 의로운 배려 덕분에 순탄하게 메시아를 낳는 복을 누렸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천사의 지시대로 예수라고 지음으로써 온전한 순종을 이루었다.

교훈과 적용

1.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바른 신앙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라고 의아해 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이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다만 선포하였다. 실로 성령은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일 뿐이다.

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성취한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그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을 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자.

3.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의로운 행동이 두드러진다. 요셉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를 곤경에 처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으로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을 때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여 예수님의 태어나심에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는 요셉의 의로운 삶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다른 사람들을 적극 배려해야 한다.

마태복음 주석 (상~하)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18~25)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18~25) )

1:1과 1:18에서 공통으로 “게네시스” 용어가 사용되므로, 1:1~17은 18~25절과 서로 연결되고 1:1~25은 1~17절과 18~25절로 나뉜다. 1:18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와 병행을 이루고 16절의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와도 연결된다. 1절과 18절의 관계는 2~17절의 내용이 18~25절의 내용과 연결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16절의 설명에 따르면 “야곱은 마리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18~25절은 16절에 대한 설명으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어떻게 공식적으로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었고 요셉이 법적인 부친이 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한다. 18~25절에 나타난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모세의 유아기에 대한 유대 전승과 비슷하다. 예수와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삶은 모세 모형론으로 설명된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은 이렇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했을 때, 그들이 동침하기 전에 성령에 의해 임신한 것으로 드러났다.

[18] 18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리키기 위해 1:1에서 소유격으로 표현된 “게네시스”가 사용된다. 2~17절은 하나님 백성의 계보를 다윗 왕을 중심으로 설명했는데, 18~25절은 2~17절에서 설명한 계보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16절에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표현이 없으므로, 18절 이하는 어떻게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요셉의 아들, 다윗 계통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마태는 1절과 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언급함으로써 이 계보가 메시아와 관련됨을 알린다. 17과 18절에 반복되는 “그리스도”는 예수의 정체를 메시아로 강조하며, 2:2~4에서 그리스도 (4절) 는 “유대인들의 왕”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주후 1세기에 약혼은 법적으로 혼인과 같은 효력을 지녔기에 “남편 요셉”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19절). 약혼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음, 이혼 등의 법적 구속력을 지녔으며, 남편이 죽거나 이혼을 했을 경우 외에는 부부 관계는 유지됐다 (신 22:23~27; 참조. m. Yeb. 2:6; 4:10; 6:4; m. Ketub. 1:2; 4:2; m. Giṭ. 6:2; 11QTemple 61).) 약혼 기간에 여자는 결혼식 전까지 최대 12개월 동안 아버지의 책임 하에서 있었고 신랑과의 성관계는 허락되지 않았다 (m. Ketub. 5:2; m. Ned. 10:5; Str-B 2.393~98).114) 약혼 기간에 일어난 성적인 불륜은 이혼의 사유였다. 약혼 기간이 끝나면 여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공적인 예식을 거쳐서 (예. 25:1~12) 남편과 함께 살았다 (m. Ketub. 5:2; Ned. 10:5).) 18절의 “동거”는 한 집에 사는 것 또는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동거나 24절의 아내를 데려오는 행위는 모두 약혼 기간 이후에 이뤄지는 공식적인 결혼 생활을 가리킨다.

약혼 기간에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 수동태인 “나타났다”(유레쎄) 는 동사는 마리아의 역할을 누가복음의 묘사와 달리 수동적으로 묘사한다.) 성령의 능력은 인간의 성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은 구약에서 생명을 창조하거나 (창 1:2; 시 33:6) 부여하는 (시 104:30; 사 32:15; 겔 37:1~14) 행위를 반영한다.) 만일 1:1의 “게네시스”와 창세기를 연결한다면, 성령께서 생명을 잉태하게 한 일은 새 창조와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창 1:2). 성령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므로 남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할은 특별한 방식으로 아이를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처녀로서 (1:23) 성관계를 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 또한 메시아의 탄생이 성령에 의해 가능하게 된 것은 구원사에서 성령의 주된 역할이 새로운 시대, 회복의 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 성령의 역할은 메시아의 사역과 연결된다 (마 3:10~17; 참조, 사 11:2; 42:1; 61:1).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인이었고 그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이혼하려고 했다.

[19] 약혼이 법적인 부부 관계를 의미했기 때문에 마태는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소개한다. 남편으로 번역한 “아네르”(ἀνήρ) 는 “남자”나 “남편”을 뜻하는데, “그녀의 남편 요셉”으로 되어 있으므로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를 혼인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약혼 기간에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은 약혼을 파기하는 사유였고, 약혼 기간에 저지른 간음에 대한 형벌은 투석형이었으나 (신 22:13~21), 로마 치하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판결권과 집행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참조. 예수의 산헤드린 재판).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는 그가 유대의 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인가 (신 22:20~21),) 아니면 동정심이 가득하고 배려심이 깊다는 것인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긍휼과 배려심이 많다는 뜻보다는 법 또는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킨다는 의미다.121) 요셉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예수 역시 토라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보여 주실 것이다.) 한편, 고대 유대교에서 음행이 행해졌을 때 이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명령으로 요구됐기 때문에 123) 요셉은 반드시 이혼을 해야 했다. 아내의 음행을 확인한 남편이라면 요셉은 마리아의 사건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이혼을 택하기 마련이다 (참조. 이혼에 대한 미쉬나 자료: m. Soṭah 1:4~6; 3:6; 4:2; 5:1; m. Ket. 2:9; m. Ned. 11:12).) 그러나 요셉은 “가만히”(마 1:19; 2:7; 막 5:33) 이혼하려고 했다. 이 부사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비밀리에 처리하는 것을 묘사하는 용어다 (참조. 2:7; 요 11:28; 행 16:37).) 개역개정에서 “끊는다”로 번역한 “아폴뤼오”(ἀπολύω) 는 “자유롭게 하다”, “석방하다”(마 27:15~26; 막 15:6~15; 눅 23:16~25; 요 18:39; 19:10, 12; 행 3:13; 5:40; 16:35이하; 26:32; 28:18), 어떤 장소에서 “보내다”(마 14:15, 22; 15:32, 39; 막 6:36, 45; 8:9),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다”, 결혼 관계가 “깨지다”, 즉 “이혼하다”(마 5:32; 19:9; 막 10:2, 4, 11; 눅 16:18) 등의 뜻을 지닌 단어다.) 본문에서는 “이혼하다”를 의미한다. 정리해 보면, 요셉은 법적인 아내에게 공적인 수치를 주지 않고 은밀히 이혼하려고 했다. 요셉은 율법을 지키는 의인이었지만, 동정심으로 인해 공적인 수치를 주지 않고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127) 요셉은 의인 됨과 동정심의 조화를 보여 주며, 요셉의 태도는 마태복음 전체에서 의와 동정심 (또는 긍휼)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고 교회를 통해 행해져야 한다는 교훈을 미리 보여 준다.

[20] 요셉이 이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주의 천사가 꿈에서 그에게 나타나 말했다. “다윗의 아들 요셉아, 마리아를 네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그 아이가 성령에 의해 마리아에게 잉태됐기 때문이다.

[20]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은 신적 기원에 의한 것이라고 알린다. 천사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수가 다윗의 계보라는 점을 확인해 준다. 누가복음에서 마리아가 가브리엘을 만나는 것처럼 (눅 1:26~38) 마태복음에는 요셉이 꿈에서 주의 천사를 만난다. 19절에 있는 “가만히 끊고자 하여”의 동사 “하여”(ἐβουλήθη, 에불레쎄) 와 20절에 있는 “이 일을 생각할 때에”의 분사 “생각할 때에”(ἐνθυηθέντος, 엔쒸메쎈토스) 는 모두 과거형으로 요셉은 사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미 마음을 정한 사실을 의미한다.) 그때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났다. 주의 천사는 하나님의 현현이라기보다는 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천사다. 천사의 이런 기능은 제2성전기 유대교 묵시문헌에 흔히 나타난다. 신적인 계시를 전달하는 꿈과 하늘의 계획을 알리는 천사가 함께 사용되는 이유는 묵시와 하늘을 공동 언어로 공유하는 독자들에게는 가장 신뢰할 만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단 4, 7, 10장; 슥 3장; 에녹1서 22:1~14; 레위의 유언 2:4~6; 에녹2서 1:8; 에스라4서 12:10~38; 바룩2서 36~76). 나아가 유대 묵시문헌에서 신적 계시를 천사의 도움으로 전달받은 사람들이 주로 경건한 의인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의인인 요셉이 꿈에서 천사가 전달해 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은 1세기 당시의 상황에서는 계시의 신뢰성을 주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요셉 자신이 꿈에 나타난 천사의 신적 계시를 순종함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의 독자들 역시 의인 요셉에게 이런 방식으로 메시지가 전해진 것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는 효과가 있다. 1~2장에서 요셉은 네 차례에 걸쳐서 꿈을 통해 천사의 지시를 받는데, 이는 요셉의 행동을 이끄는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한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의 이름은 예수로 불릴 것이다. 이는 그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21] 천사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알린다. 처녀의 잉태와 관련해서,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마리아의 잉태를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아이를 잉태한 그리스–로마 신화와 연결한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같이 대단히 유대적인 성격의 복음서에서 이런 신화에 영향을 받은 개념을 담는다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당시 유대 교사들은 이교적 윤리와 신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130) 또한 아브라함과 다윗의 하나님이 이방신 제우스와 같이 인간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유대 전통에서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 메시아사상에서 메시아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으며, 마리아의 잉태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어서 천사는 아이의 이름을 예수 (Ἰησοῦς) 로 지으라고 한다. 21절의 “예수”는 1, 16, 18절에 이어 네 번째로 나오는 이름이다. 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16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는 자”로 나타난다. 21절은 마태복음 구원론의 핵심 이슈인 구원의 주체, 방법, 범위를 내포하기 때문이며,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의 관점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구원을 받는 대상은 누구인지, 구원을 베푸는 주체는 누구인지 암시한다.) 1:21이 마태복음 전체에서 어떻게 중심축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면서 어떻게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수”: 구원의 주체

마태는 1:21에서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예수의 사역을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임마누엘”(Ἐμμανουήλ) 을 부르는 주체는 복수형으로 표현되므로 (καλέσουσιν, 칼레수신), 이는 예수의 구원을 경험한 공동체 (또는 백성) 의 고백적이고 상징적인 칭호다.) 말하자면,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21절), 구원을 경험한 교회는 예수를 통해서 임마누엘을 고백한다 (23절). 두 이름의 의미는 모두 구약에 근거한다. “예수”는 히브리어 “예슈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의 헬라어 형태이며, 천사는 이 이름을 줌으로써 메시아의 구원자 역할을 언급한다. 구약에서 구원자는 여호와 (참조, 신 32:15; 삼상 10:19; 시 23:5; 사 12:2; 43:3, 11~12) 인데 ) 천사는 태어날 아이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태는 1:21 이후 죄와 구원을 결합해 언급하지 않는다 (참조. 눅 1:77; 약 5:15, 20). ) 즉 1:21을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죄 용서를 통해 구원한다는 표현이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죄 용서와 관련해서는 “소조”(σῴζω) 가 아니라 “용서”에 해당하는 동사 “아피에미”(ἀφίημι: 9:2, 5, 6; 12:31; 26:28) 와 명사 “아페시스”(ἄφεσις: 26:28) 가 사용된다.) 마태는 “예수”의 이름에 있는 “구원”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1:21에는 죄 용서의 용어 대신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후에는 죄 “용서”를 구원의 중심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1:21과 27:37에 있는 예수의 이름은 십자가와 죄 용서의 관계를 보여 준다 (참조. 27:37, 40, 42, 49).)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거나 그 뜻에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또한 죄는 창조의 주와 구원의 주이신 유일한 하나님 외의 다른 무엇을 의존하고 경배하는 것이다.141) 죄의 결과로 수직적으로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고 수평적으로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파괴된다. 이런 관계를 고든 웬함은 속건제의 의미에서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죄는 이웃과의 관계에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창조주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죄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수평적으로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값을 지불함으로써 그들과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빚진 것도 배상해야 한다.” ) 이스라엘의 경우에 죄 때문에 하나님과 백성의 분리는 속박 상태로 나타나지만 (1:17), 예수의 구원은 임마누엘의 복을 선사한다 (1:23).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포로 상태가 된 이스라엘의 희망은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이라는 데 있다 (사 40:1~2; 렘 31:31~40; 겔 36:24~25, 28).) 구원자의 함께하심이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고 구원받은 열매를 맺게 하므로 임마누엘은 구원하는 방식이면서 구원의 증거다. 죄 용서를 통한 자유와 해방을 얻은 사람은 144) 언약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가져다주는 은혜를 누리며 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박에서의 구원은 정치적 의미로 인식될 수 있으나,) 독자는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이 구원은 정치적이거나 민족주의적 개념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메시아를 통해 (사탄의) 속박에서 자유를 주는 나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자기 백성의 죄에서”: 구원의 방법

죄에서의 구원은 마태복음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그 의미가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 구원의 대상 (백성의 범위) 과 구원의 방법 (예수의 죽음이나 피) 이 제시된다. 예수 당시의 정치적 메시아사상과 비교하면, 죄에서 구원한다는 표현은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위해 고난을 겪는 종의 노래를 떠올린다 (사 52:13~53:12).)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53:12).

마태복음의 내러티브를 보면, 먼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부근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죄를 자백한 (3:5~6) 세례 장면은 죄 용서의 필요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세례 장면에서 이들이 죄를 용서받았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구원 (또는 용서) 과 심판을 결정하는 주체는 요한이 아니라 예수이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을 대상이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열매 맺는 백성이라는 사실 (3:8~10) 과 예수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시킬 심판자라는 사실은 “새 백성”과 구원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기독론”을 강조한다.) 예수라는 이름표가 붙은 십자가에서 예수는 남 (자기 백성) 을 구원하고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다 (참조. 26:28).) 9:6에서 예수는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능을 보여 주신다. 예수의 권위에 의존함으로써 믿음을 현재 경험해야 하는 것처럼, 마태는 죄 용서를 교회와 연결하여 독자들이 현재적 죄 용서를 경험할 것을 가르친다. 임마누엘의 공동체에 주어진 죄 용서의 권위는 공동체 강화 (18장) 에서 암시된다 (18:15~20, 21~35). 20:28에서 인자인 예수는 “많은 사람들”(1:21의 백성을 암시) 을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드려 죄에서 구원할 것을 선언하신다. 20:28은 예수의 몸값을 이사야 53장에서 여호와의 종이 겪는 대속적 희생과 연결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남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음으로써 구원하는 대속의 개념은 이사야 53:5~6에 나타난다 (자세한 내용은 20:28의 주석을 보라).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죄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고 선언하시는데, 본문은 크게 세 가지를 알린다 (자세한 내용은 26:28의 주석을 보라). 첫째, 포도주는 언약의 피다. 둘째, 피 흘림은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셋째, 피는 죄 용서를 위한 것이다. 본문에는 마가복음에 없는 “죄 용서를 위해”가 있다. 이처럼, 마지막 만찬에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결합되어 나타난다. 많은 사람을 위한 예수의 대속적인 피 흘림은 이사야 53장에 있는 고난받는 종의 그림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예수의 피 흘림이 죄 용서를 위한 언약의 피라는 사실은 예레미야 31장 31, 34절의 새 언약과 죄 용서와 연결되므로, 고난받는 종의 죽음은 새 언약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피 흘림은 죄 용서를 분명한 목적으로 한다. 죄 용서는 대속적 죽음의 결과이며 새 언약 백성을 만드는 방식이다. 주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로서 제자들과 이후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 이 죽음이 가져온 혜택 (또는 은혜) 을 기억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3) “자기 백성”: 구원의 대상과 범위

1:21의 “백성”은 구약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지만 (예, 시 130:8),)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또는 마태복음을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에게, 21~23절의 “백성”이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 (2:6; 10:5~6; 참조. 15:24) 에서 모든 민족, 즉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16:18).) 4:15~16에서 이사야 9:1~2을 인용한 의도, 기적 내러티브 (8~9장) 에서 “백부장”이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를 받는 장면 (8:5~13),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두 사람이 치유받는 이야기 (8:28~34) 는 모든 백성에 이방인이 포함되는 것을 입증한다.)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이 치유 받은 사건에 대해, 마태는 이사야 42:1~3을 인용해 이방 나라들도 예수께서 일그러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신 것을 기다린다고 평가한다 (12:18~21).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장소가 이방 지역인 가이사랴 빌립보였던 사실도 백성의 범위를 암시한다 (16:13). 특히 십자가 사건을 기점으로 이스라엘 백성 (27:25) 은 예수를 배척한 반면, 이방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자기 백성”에 포함된다 (27:54).) 27:42에는 “구원하다”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예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구원을 요청하지 않는다 (16:25).) 따라서 십자가에서 벌어진 장면 (27:37~43) 은 다윗의 아들 (1:1) 인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자 (1:21) 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밝힌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면서 임마누엘을 약속하신다 (28:19~20).) 이미 1:1의 “아브라함의 아들”과 예수의 계보에 등장한 네 명의 여자들은 예수께서 구원하는 백성의 범위가 이방인들을 포함할 것을 암시했으며, 내러티브의 전개에 따라 점점 분명해지고, 이 백성은 마지막 장면의 “모든 민족” 중에서 반응하는 자들이 된다 (28:20).

정리해 보면, 마태복음 1:21에서 시작해서 20:28, 26:28 등은 예수께서 어떤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지를 알려 준다.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 (몸값) 로 줌으로써 (20:28) 백성을 구원하신다. 구체적으로 죄 용서를 위해 피를 쏟아 (26:28) 백성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1:21). 1:21은 백성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며, 죄에서 구원받는 백성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새 백성”(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교회”로 드러남) 인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내러티브는 토라가 아니라 예수 (의 피) 를 통해서 구원이 많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알린다 (20:28).

[22] 이 모두는 주에 의해 그 선지자를 통해 말씀된 것이 성취되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22] 21절은 천사가 전해 주는 예수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며, 22~23절은 마태의 설명이다. 22~23절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 개의 성취 공식 중 첫 번째다. 탄생 내러티브에서 마태는 22절 외에 네 번에 걸쳐서 구약 본문을 근거로 성취를 알릴 것이다 (마 2:6미? 5:2; 마 2:15호? 11:1; 마 2:18렘? 31:15; 마 2:23사? 11:1). 성취 공식은 구약 본문을 언급하고 나서 나오지만, 22~23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었고 같은 현상이 21:4~5에도 나타난다 (참조. 2:15). 그리고 22절은 2:15과 함께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1:23과 2:15에서 인용된 내용의 화자가 하나님인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성취 공식으로 마태는 예수의 기원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사실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 본문은 사무엘하 7:14, 시편 2:7, 98:2–6이며, 사해 사본에도 비슷한 용어가 나온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낳았을 때”(1QSa 2 11~12),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것이며, 그들은 그를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로 부를 것이다”(4Q246 2 1).)

[23] “보라, 처녀가 잉태할 것이며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23] 마태는 마리아의 잉태를 이사야 7:14의 성취로 해석한다. 임마누엘은 히브리어 단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이사야 7:14과 8:8에는 임마누엘, 8:10에는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는 문장이 나온다. “우리와 함께”(μεθʼ ἡμῶν, 메쓰 헤몬) 는 언약이 종말론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암시한다 (사 43:5; 겔 34:30; 37:26~27; 슥 8:23; 11QTemple 29:78; 희년서 1:17, 26; 계 21:3).) 70인역 이사야 7:14에서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인칭 단수 (καλέσεις, “칼레세이스”) 인 반면, 마태는 “그들이 부를 것이다”(καλέσουσιν, “칼레수신”) 또는 “그들이 호칭할 것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3인칭 복수). 예수를 임마누엘로 부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다. 21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의 구원을 경험한 교회가 예수를 임마누엘로 고백한다. 마태는 독자들이 예수를 임마누엘로 부르는 사람들에 포함될 것을 기대한다.

23절은 세 가지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마태가 처녀로 번역되는 “파르쎄노스”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이사야 7:14이 성취됐는가? 임마누엘은 예수의 신적 신분을 가리키는가?

(1) 동정녀 탄생

학자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관련된 논쟁에서 “알마”, “베툴라”, “파르쎄노스”와 같은 몇 개의 핵심 용어를 필수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최근까지 발표된 많은 논문들은, 어휘 분석 방법으로는 일치된 견해를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의견들을 역사적 자료에 근거해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논의를 정리하는 것은 본 주석에서 다룰 범위를 넘어선다. 여기서는 이 용어들의 정의를 간단히 언급하면서 마태가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를 의도하고 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히브리 본문 이사야 7:14에는 명확히 처녀를 지칭하는 “베툴라”가 아니라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알마”가 사용된다.) 동정녀 탄생을 지지하는 보수적인 학자들은 “알마”는 임신을 할 수 있는 나이지만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예, 창 24:43; 출 2:8; 대상 15:20; 시 46:1; 68:25; 잠 30:19; 아 1:3; 6:8).) 오스왈트에 따르면, “알마”는 “베툴라”처럼 처녀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는 않지만 처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의도적으로 사용된다.162) 오스왈트는 “알마”가 처녀성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70인역에서 “알마”를 “파르쎄노스”로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지자가 혼인 관계에서 아이를 낳는 “여자” 혹은 “아내”를 가리키는 용어인 “이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결혼한 여자가 아이를 낳는 현상이 아님을 내포한다.164) 오스왈트는 이사야 7장의 예언에서 “베툴라”가 아니라 “알마”가 사용된 목적은 “단기적으로는처녀 잉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처녀 잉태 아이가 아직 어릴 때 유다를 위협하는 두 나라가 멸망당할 것, 즉 하나님의 함께하심 (=임마누엘) 이라고 이해한다.) 오스왈트의 견해는 마태가 이사야 7:14을 사용한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태는 이사야 7장의 문맥에서 강조하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동정녀 탄생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의도적으로 70인역의 “파르쎄노스”(παρθένος) 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마태는 동정녀 탄생과 임마누엘을 모두 강조한다.

(2) 모형론적 성취

주전 735년에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임마누엘 예언은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임박한 미래에 유다의 원수들이 물러날 것을 예고한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북쪽 왕국과 시리아가 동맹해서 남쪽 왕국 (유다) 을 공격했고 (주전 735년) 이후 여러 나라들이 연합해서 쳐들어 올 태세였을 때, 즉 국가적 위기에 주어졌다 (사 7:1~2). 유다의 왕 아하스는 강대국 앗수르와의 조약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왕에게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사 7:9). 이 말은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는 다윗 언약을 떠올린다 (삼하 7:16).) 이사야는 자신이 한 말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왕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표적을 약속한다. 풍전등화와 같은 순간에 이사야는 남쪽 왕국의 왕인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표적이 나타날 것이며, 그것은 바로 젊은 여자가 임신해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를 낳는 것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7:14~16). 표적의 내용에 따르면, 임마누엘로 불리는 아이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나이에 이를 때 두 왕국인 아람과 에브라임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가 약속한 표적대로 두 왕국이 망함으로써 임마누엘의 예언이 성취됐다. 이사야가 예고한 임마누엘의 표적은 오랜 시간이 지나 1세기에 처음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태는 어떤 점에서 마리아의 잉태를 이사야 7:14의 성취로 선언하는가? 학자들은 마태의 이사야 7:14 인용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한다. 첫 번째 접근은 “예고적 성취”(predictive fulfillment) 다.) 이사야가 예언한 아기는 그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먼 미래에 다윗의 아들로 태어날 메시아를 지목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아기가 이사야 시대에 태어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시대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성을 잃는다. 두 번째 접근은 “모형론적 성취”(typological fulfillment) 다.) 두 번째 접근이 마태가 이사야 7:14을 사용한 목적에 맞다. 탄생 내러티브에서 마태는 모형론적 성취의 관점에서 인용 공식을 사용한다는 점도 두 번째 접근을 지지한다 (예, 2:15의 호세아 11:1 사용). 모형론은 구약에 일어난 사건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식 (패턴) 을 신약 저자가 더 깊은 의미에서 확장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사야 7:14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식을 보여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스코비는 이사야 7:14의 모형론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신탁은 기본적으로 확신을 심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현재 임신한 아이가 기한이 돼 태어날 때, 즉 지금부터 9개월 이후에, 상황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뜻하는 낙관적인 이름인 임마누엘을 입증시킬 만큼 충분히 변할 것이다.……이 신탁은 본래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한 패러다임이 되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보존됐고 결국 정경의 부분이 됐다.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유다가 가장 어려운 시절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는 임마누엘, 곧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알리는 표적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처녀의 몸을 통해 아기를 보내 함께하심을 증명하신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특히 암울한 시기에 유다에게 임마누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과 같이, 하나님은 예수의 계보가 보여 주는 것과 같이 포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고 포로 상태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임마누엘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7:14의 문맥에 나타난 구원 방식과 마태복음의 문맥에 나타난 구원 방식은 같지만, 이사야 7:14의 의미는 예수의 사건에서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처녀의 몸을 통해서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신 아들이 성육신하심으로써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죄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죄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구원과 해방을 베푸는 방식이기에, 예수는 고난받는 종으로서 십자가에 달리는 수치를 겪으면서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은 구원하실 때도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구원받은 백성과도 영원히 함께하신다.

또한 존재론적으로 이사야 7:14의 아이와 마태복음의 임마누엘은 다르다.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은 그 아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여 주는 표적이었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여 주는 표적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다.

한편,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은 8:8, 9:6~7, 11:1~5에서 반복되는 주제다.) 마태는 이사야 7:14만을 생각하지 않고 6~9장 전체 문맥을 염두에 두고서 임마누엘의 의미를 전달한다.) 또한 이사야 9:6~7에서 이 아이는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며, 11:1~5에서는 이 주제가 메시아적 예언으로 연결된다.

덧붙여서, 마태는 이사야 7:14의 문맥에서 임마누엘의 표적을 신뢰하지 못하는 아하스와 그의 백성이 멸망하게 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7:17~25).) 하나님의 약속 외의 어떤 수단과 방법도 무익할 뿐이다 (8:5~10). 1세기의 이스라엘 백성 역시 임마누엘을 영접하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결과는 멸망이다 (참조. 24:1~2).) 역사 가운데서뿐 아니라 역사의 끝에도 임마누엘의 표적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다.

(3) 예수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보는 근거는 마태가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묘사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예. “경배하다”[4:9, 10; 14:33; 28:9, 17]; 예수의 신현[14:22~33]; “임마누엘” 모티프[18:20; 28:20]). 반면 어떤 학자들은 임마누엘은 존재론적으로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역할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놀란드는 “임마누엘”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176) 양쪽의 주장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마태가 예수를 임마누엘이라고 말했을 때는 그의 탄생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여 주는 표적일 뿐만 아니라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예수 자신이 바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을 의도한다. 내러티브 읽기의 관점에서, 놀란드가 “예수 = 하나님”이라는 구도를 내러티브의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은 유대 독자들에게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내러티브 전체를 통해서 예수를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 부분은 타당하다.) 이는 마태가 예수의 정체 (예, 하나님의 아들) 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복음서 전체를 읽은 독자가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서의 아들로 고백하기를 원한다. 비록 1:23부터 아기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전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복음서를 읽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복음서는 전체로 읽히는 것이므로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는 명확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거듭 입증된다. 다시 말해서, 마태는 독자가 복음서 전체를 순서를 따라 읽으면서 예수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도록의도한다.) 예수는 참 인간이요 순종하는 아들로서 자신의 목숨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드리실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마태는 이사야 7:14을 인용하면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마태복음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다 (18:20; 28:20; 참조. 17:17; 26:29).) 교회는 임마누엘의 공동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18:20). 마태복음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로 끝난다. 1:23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μεθʼ ἡμῶν ὁ θεός, “메쓰 헤몬 호 쎄오스”) 는 28:20의 “내가 너희와 함께한다”(ἐγὼ μεθʼ ὑμῶν εἰμι, “에고 메쓰 휘몬 에이미”) 와 병행을 이루는데, 20절의 “에고 에이미”는 여호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마태의 관심은 예수를 임마누엘로 드러내는 것이다. 마태는 복음서의 처음부터 이 사실을 독자들에게 암시하며,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를 임마누엘로 확인하기까지 임마누엘의 주제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할 것이다. 또한, 만일 14:26의 “나다”(“에고 에이미”) 가 구약의 여호와를 가리킨 칭호라고 한다면 (마 14:28의 주석에서 욥 9:8을 연결한 부분을 참조 바람), 피조 세계 (와 악의 세력) 를 제압하신 예수는 분명히 신적인 존재로서의 아들이며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14:33]). 그러므로 마태의 임마누엘은 요한복음 1:14에서 표현한 성육신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처녀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심으로써 역사에 개입하는 방식을 사용하셨는데, 이 방식은 임마누엘로 불리는 아들을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임마누엘인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임마누엘은 예수의 정체이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백성과 함께하심으로써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백성들과 함께하신다.

[24] 그러자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주의 천사가 그에게 명령한 그대로 행했고, 마리아를 그의 아내로 받아들였다.

[24] 22~23절에 나타난 마태의 설명이 끝나고, 21절에 있었던 탄생 이야기는 24~25절에 이어진다. 요셉이 일어났다는 표현은 환상을 본 자가 순종할 때 하는 행동이다 (겔 2:1~2; 단 8:27; 눅 1:39).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아들을 낳기까지 아내와 동침하지 않고, 아이의 이름을 예수로 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18절 설명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는” 또는 “받아들이는” 행위는 결혼이 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의미다.)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부부 생활이 시작된다.

[25] 요셉은 아내가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동침하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예수로 지었다.

[25]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음으로써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사실을 확증하는 일에 기여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탄생은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마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19절) 의로운 요셉의 순종에 초점을 맞춘다 (24~25절). 마태복음에서 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은혜) 과 이 은혜에 대한 순종, 즉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은 약속에 의로우시다!) 와 인간의 반응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로운 행위로 반응한다!) 둘 다를 의미한다. 요셉은 이사야 7:14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순종한다.) 마치 예수께서 모든 의를 성취하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처럼 (3:15), 요셉의 순종으로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이 성취된다. 마태복음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예. 임마누엘) 와 하나님의 뜻 (또는 법) 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며, 이러한 순종은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는다. 의로운 행위는 소자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며 (예, 18:21~35; 25:31~46),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태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탄생 기사의 요셉은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인 “의”에 대해 예고하는 인물이다.

※ 결론과 적용 (1:18~25)

복음은 하나님이 다스리셔서 나라를 회복하기 시작하셨다는 소식이다 (사 52:7). 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가져오고, 회복된 나라는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임재, 의인들의 구원과 죄인들의 심판을 경험한다. 회복된 나라가 온 증거로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자기 죄에서 구원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탄생 소식은 복음이다.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 (18절),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 성육신한 분이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러 이 땅에 태어난 다윗의 아들이다 (20~21절). 예수는 임마누엘로서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며, “함께하심으로” 하늘나라 백성을 구원하고 지키실 것이다 (23절). 이렇게 하여 마태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린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왕의 모습과 달리, 예수는 정치적인 속박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21절). 예수의 구원은 의인을 죄인들에게서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해서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세상의 문제는 죄다. 죄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하신다. 죄는 모든 민족의 문제이므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죄 용서를 통해 성취된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탄생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요셉의 순종이 사용되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계획은 은혜의 소식, 곧 복음이다. 이 계획은 순종하는 의인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된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사람의 반응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요셉의 반응은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인 “의”의 개념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뜻 (은혜), 더 나은 의 (순종) !”

2)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기원과 이름(1:18–25)
이 단락의 절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원(동정녀 수태)와 그의 이름을 구체적인 구약 예언과 견주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이 구절들은 마리아의 경험보다는 전적으로 요셉의 경험에 집중하고 있다(2:13–23에서도 그렇다). 심지어 예수님의 놀라운 수태에 관한 이야기도 그 이야기가 요셉에게 영향을 미쳤다라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다른 곳들에서는 요셉에 대해서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마태가 요셉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태가 유아기자료들(요셉이 11절부터 분명하게 부재해있는 2:1–12을 제외하고)을 요셉과 연관이 있는 특별한 자료로부터 가져왔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준다(누가의 매우 다른 설명들은 분명하게 마리아의 기억에 의존해있다). 이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합법적인 가계를 요셉의 라인을 통해서 세워나가려고 시도했던 마태의 관심을 반영하는 결과일 것이다. 즉,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에게 어떻게 이전에 등장하는 족보의 인물들이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려는 마태의 신학적 관심인 것이다.
예수님이 요셉과 무관하게 어떻게 동정녀 어머니를 통해서 잉태되었는지가 이 단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22, 23절에 기록된 구약인용의 근거 역할을 한다. 이같은 사실은 논쟁이 되거나 설명되어지지 않고 으레 그럴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요셉이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 수태고지 이후에 마리아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은 것,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천사들의 설명,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적 근거들을 마태가 강조하는 것에는 변증적인 요소들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후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생아로 간주했었기 때문이다(참조, Brown 534–542). 그러나 어떻게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한 것이 예수님의 기적적인 수태와 연결되는지를 알기 원했고 또한 마태 자신이 옛 예언들의 구체적 성취의 과정들을 조사하고 발견했던 것과 같은 기쁨을 발견하기 원했던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위해서 이러한 설명들이 고안된 것으로 이해해도 본문은 잘 이해될 수 있다.
동정녀 탄생이 이사야 7:14에 근거한 마태 혹은 그보다 앞선 사람들에 의한 상상력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에 사실에 비추어서 그 설자리를 잃는다.
첫째, 마태의 기사에서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알려진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
둘째, 누가복음 1:26–56, 2:5의 형태와 비교해 봤을 때 마태의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해서, 이사야 7:14이 인용되고 있는 22, 23절은 기사에 설명을 위해서 더해진 것이다. 이 기사 안에서 22, 23절 없이도 21절은 24절에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22, 23절은 기사의 원천이나 기원이 아니다. 동정녀 탄생의 전승이 여자들과 성적인 관계를 갖는 이방 신들의 이야기에서 기인했다고 하는 주장들도 있는데, 이같은 주장은 이방 신들의 이야기에 있는 상당히 다른 특색들을 무시한 주장이며 또한 이러한 이야기가 팔레스타인 유대인 상황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도 무시한 주장이다. 마태복음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설명은 내용이나 표현에 있어서 매우 유대적이다.
〈18〉 예수님의 이름을 생략한 RSV의 독법은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마태는 메시아의 기원(게네시스, genesis)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18절은 그의 메시아 됨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잉태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정혼했을 때 발생했다. 유대법에서 약 1년 정도 지속되었던 정혼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약혼보다는 훨씬 더 무거운 것이었다. 정혼이라는 것은 구속력을 가지는 약속으로서 육신의 죽음(정혼했다가 남자가 죽어서 남겨진 여자는 ‘미망인’으로 불렸다)이나 혹은 일반 결혼처럼 이혼에 의해서만 종료되어졌다. 남자는 이미 남편으로 불려졌지만(19절) 여자는 여전히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결혼은 남편이 정혼한 여자를 공적인 예식 후에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을 때 성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24절; 참조, 25:1–13). 그런 후에야 그들은 같이 거할 수 있었고, 성적인 관계도 시작되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잉태(참조 20절)가 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은 누가복음에 의해서도 강조되어있다(1:35). 구약성경, 특별히 창조와 생명을 주는 장면(창 1:2; 겔 37:1–14 등)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사역의 대리인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신적인 주도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메시아 시대(사 11:2; 42:1; 61:1; 욜 2:28 등)를 여는 데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19〉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결혼 전 부정한 행동에 대한 형벌은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었다(신 22:13–21).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신명기 24:1에 근거해서 이혼이 법제화 되었다(참조, 5:32; 19:3이하). 의로운(다시 말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던 요셉은 공적인 재판을 필연적으로 야기하게 될 부정한 행동에 대한 고발조치를 통해서 법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고 어쩌면 또한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 마리아를 드러내고(똑같은 일반적이지 않은 헬라어가 골 2:15에서 그리스도를 통치자들과 권세들 앞에서 ‘구경거리로 만들었다’라고 할 때 사용되었다[NEV, NIV])싶지 않았던 요셉은 당시 허락되었던 또 다른 방법인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사적인 이혼을 하기로 결심한다(미쉬나 Sotah 1:1, 5).
〈20〉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의 합법적인 다윗계열의 계보가 세워지기 위해서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그의 집으로, 다시 말해 결혼을 완성하는 것)은 필요한 과정이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을 짓는 것(21, 25절) 또한 공식적으로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세워지는 것이다(Brown 138–139). 마태복음 전체에서 꿈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는 다른 예는 27:19(빌라도의 아내)이 유일하기 때문에,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유아기 기사의 독특한 특징이다(참조, 2:12, 13, 19, 22. 한 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요셉에게 꿈이 주어졌다).
더욱이 이 꿈들 가운데 세 번은 주의 사자(참조, 2:13, 19)가 등장하는데 이 천사는 28:2에 가서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교한 천사론이라든가 동시대 유대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혁신적인 계시와 같은 것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단지 구약의 영적인 세계의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주의 사자’는 종종 하나님의 가르침들을 그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존재이다(창 16:7이하; 22:11이하; 31:11이하 등). 헬라어 앙겔로스(angelos)는 원래 ‘사자’(messenger)라는 의미를 가진다(마 11:10; 눅 7:24; 9:52). 요셉이 본 천사는 아마도 영적인 존재일 것인데, 그의 역할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요셉을 인도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출생과 유아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의 방향이 성경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몇 장에 보여지고 있는 마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초점이다.
〈21〉 여기서 사용된 언어들은 이사야 7:14뿐만 아니라 이제 곧 인용될 구약성경(창 16:11; 17:19 등)의 유사한 계시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름들, 특별히 신적으로 계시된 이름들은 깊은 의미들을 담고 있는데, 이 의미들은 종종 언어유희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여기서 언어유희는 사용된 이름의 어원과 반드시 상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헬라어 형태는 요슈아[Joshua] 혹은 예슈아[Jeshua]인데, 흔한 이름이었다. 27:16을 보라-역주, 어떤 사본에는 ‘바라바라하는 예수’라고 씌여져 있다)라는 경우에 있어서, 발음(참조 히브리어 요시아[yôšî’a], ‘그가 구원하실 것이다’)이나 아마도 이 단어의 기원(‘여호와는 구원이시다’ 혹은 ‘여호와여 구원하소서’)은 둘 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는 문구를 잘 설명해 낸다. 자기 백성은 일차적인 측면에서는 유대인들 의미하는 것이다(마태는 라오스[laos]라는 단어를 선택한 백성을 나타낼 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28:19을 통해 봤을 때 이 단어는 긍극적으로 더 넓은 함의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표현된 희망(예를 들어, 사 53장, 렘 31:31–34; 겔 36:24–31)과 후대의 메시아적 기대(솔로몬의 시 17:28–29, 41등)의 요소를 담고 있으나 아주 현저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불쑥 튀어나온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메시아를 그 당시 독자들이 기대했던 민족을 해방시켜줄 해방가로서 기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계속해서 펼쳐지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기능하게 된다.
〈22–23〉 공식 인용문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본서 서론을 보라). 누가복음 1:31도 같은 구절인 이사야 7:14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같은 사실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적절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마태만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 구절은 2세기 중반에 가서는(예를 들어, 순교자 저스틴 등) 동정녀 탄생의 전통을 방어하는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무기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러한 적절성이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해서 논쟁이 되곤했다. 첫 번째 반대는, 히브리어 알마(alma)는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데 반해 마태는 헬라어 파르테노스(parthenos, 처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알마(’almâ)는 구약성경에서 총 7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 적어도 2회만이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 사용되었다(창 24:43; 출 2:8). 이 단어는 그 밖의 경우에서는 아이의 출생(혹은 심지어 결혼)과 관계되어서 사용된 경우가 없다.
결과적으로, 통상적으로 이샤(issa, ‘여인’, ‘아내’)가 사용되어야 할 이사야 7:14의 문맥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아마도 이사야는 일반적인 결혼 안에서 발생하는 아이의 탄생과 다른 출생을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이같은 이유 때문에 칠십인역은 파르테노스(partheno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따라서 이것이 필연적인 번역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가능한 번역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반대는 이사야 7:14은 아하스의 통치시대에 근접한 역사적 상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 먼 훗날 완성될 메시아 시대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맥이 근접한 역사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14–17절에서 분명히 나타나있다. 그러나 종종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런 것처럼 그 예언은 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분명해지기에 특정한 하나의 사건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이사야 8:8에서 ‘임마누엘’의 주제가 재차 도입되고 있고 구원자로서 한 아이가 태어날게 될 것이라는 주제가 반복적인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9:6–7; 11:11이하) 7:14이 이사야의 전체 안에서 발전해가는 메시아 주제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분명히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이 특이할만한 파르테노스(partheno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 단어가 일반적인 출생보다 특별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알마(alma)의 선택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과 상징적이 이름인 ‘임마누엘’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 번역자들이 옳았다고 하는 것을 시사한다.
이사야 7:14은 예수라고 이름을 짓는 것(21절)을 통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18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기원과 이름에 대한 모든 설명들 속에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된다(참조, 22절의 이 모든 일이라는 문구). 초점은 예수님이 실제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가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인간들에게 가져왔다라고 하는 그의 역할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바로 예수님의 실제 이름과 연결되어져 있는데, 인간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분리시킨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에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마태가 이름의 의미를 번역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마태는 이곳을 제외한 27:33, 46 두 곳에서만 번역을 제공하고 있다)은 그가 그 이름 안에서 예수님의 사역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힌트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임마누엘)이 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28:20에서의 확신이 이 구절과 함께 마태복음의 신학적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24–25〉 이렇게 해서 결혼은 공적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까지 아직 절정에 이른 것은 아니다. …까지라는 헬라어 표현은 마리아와 요셉의 성적인 관계가 예수님의 탄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들’(참조, 12:46)은 결과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정상적인 혼인관계에서 출생한 것이다. 마리아가 ‘지속적으로 동정녀’로 남아있었다는 전승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찾아 볼 수 없다.
R. T. 프랜스, 마태복음,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권해생 and 이강택, 초판., vol. 1,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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