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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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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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19UNLIKELY
Conscientiousness
0.29UNLIKELY
Extraversion
0.49UNLIKELY
Agreeableness
0.61LIKELY
Emotional Range
0.24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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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_ 새로운 것은 회의와 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고등학생 시절에 회심했던 저의 삶을 돌아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심을 전혀 갖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저는 고등부와 청년부 회장을 거치면서 전형적인 교회오빠의 길을 걸어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독교 신앙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있는데, 바로 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신학적 회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사건을 통해서, 저는 그냥 덮어놓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와 어떻게 충돌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탐구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와중에 참 다행인 것은, 제 믿음이 없어지거나 방황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믿음을 지켜 주셔서 저는 신학을 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저처럼 아무 의심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신앙에 대한 어떤 검증을 통해 믿음을 세워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처음부터 제대로 알아보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요, 그러고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성품과 기질에 맞게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은, 역설적이게도 회의와 의심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고 성경을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실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도 어찌보면 이와 비슷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녀가 불 같은 사랑을 하면서도,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도 무조건적 신뢰와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태도가 우리 믿음을 더욱 성장시켜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 가운데 견고한 믿음, 뜨거운 사랑과 같이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해주는 것은 회의와 의심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맹목적인 신앙과 사랑이 아닌, 머리는 차가우면서도 가슴은 뜨거울 때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새로워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1_ 갈릴리 가나 출신의 나다나엘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게 될 그 사람 역시,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인데요, 생각보다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 중에 나다나엘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발음도 어려워서 ‘나다니엘, 나다넬' 이렇게들 발음도 하시던데요, 그만큼 생소한 인물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나다나엘은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인물인데요, 빌립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공관복음에 나오는 바돌로매와 동일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1:46 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지금 나다나엘이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뭔가 시큰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그 이전에,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지역에 대한 편견도 있어 보입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영남과 호남 사이에 지역감정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나다나엘의 고향이 갈릴리 가나였는데요, 나사렛은 바로 옆동네였기 때문입니다.
지도
여기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렇게 갈릴리 가나와 나사렛은 가까운 동네이자,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마치 우리 동네가 더 좋아! 이런 식의 어떤 지역우월주의와도 같은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이지요.
나사렛 바로 옆동네에 살았던 나다나엘로서는, 나사렛에서 메시야 구세주가 나타난다는 말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굳이 이런 지역감정이 아니더라도, 메시야가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나올 수 없다는 합리적 의심도 있었습니다.
사실 예언서에는 메시야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했기 때문에, 나사렛 출신의 메시야는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마도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순간, 나다나엘의 머릿 속에는 이 합리적 의심과 지역감정이 혼재되어 작동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무엇이라 말했을까요?
네. “와서 보라"라고 말합니다.
‘합리적 의심 좋아.
하지만 그것도 너의 편견일 수 있어.
그러니 너의 편협한 사고를 내려놓고 두 눈으로 직접 보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직접 경험해보라는 말이었습니다.
회의와 편견을 접어 두고, 그리스도 예수를 직접 대면하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 생기는 합리적 의심과 편견이 있다면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이 결국에는 자신의 합리적 의심과 편견을 거두고,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함으로써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자리로 나아가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초월하여 우리 주님을 직접 경험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본론2_ 예수는 우리를 편견 없이 보신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느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의심과 편견으로 예수님을 바라 보았지만,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그렇게 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삐딱하게 바라본다 하더라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의심 없이,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요 1:47-48 입니다.
요 1: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데요, 첫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 둘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봤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참 이스라엘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면 이스라엘 사람이지, 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여러분, 혹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아십니까?
네. 이스라엘은 야곱의 바뀐 이름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여호와의 사자와 씨름하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이름이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야곱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깨끗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평생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고 뒷통수를 쳤던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마음 중심이 어떠한지 신적인 능력으로 그를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삭개오가 그 이름 그대로 순수한 사람, 옳은 사람이었듯이 예수님은 삭개오를 알아보신 그 능력으로 나다나엘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시다시피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무 중에 하나인데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실수로써, 이스라엘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유대인 랍비들의 문헌에 따르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합니다.
유대인들의 성경공부장소가 무화과나무 아래였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고대하면서 말씀을 간절히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깨끗한 마음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나다나엘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삼삼오오 순모임으로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을 때,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보실 것입니다.
그 성경공부의 자리에서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게 될 때,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보시고, 여러분들을 제자의 길로 초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공부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시선은 항상 이 현실에만 고정되어 있다보니,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미래를 바라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다보니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실 그나라를 열망하고 또 기도하는 나다나엘을 보면서, 나는 과연 어떻게 지금 이순간을 살아가고 있는가 반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제 마음에 한 가지 소망이 생겼습니다.
언제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구나.
우리가 그 분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시는구나.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때로는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의심이 들 때에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우리 마음의 중심을 높게 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게, 그리고 그 하나님 자체를 열망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여러분을,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만나주실 줄 믿습니다.
본론3_ 예수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만나시면서 장차 그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시는데요, 요 1:50-51 말씀입니다.
요 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오늘 이 본문에서 특징적인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로 ‘보다'라는 단어인데요, 46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8절에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50절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시고, 51절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조금씩 차이점이 있습니다.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요, 빌립이 말했던 ‘와서 보라', 그리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을 보았을 때 사용된 단어는 ‘에이돈(εἶδον)'입니다.
이 ‘에이돈'은 주로 ‘알다, 자각하다' 이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영어로 I see라는 의미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50-51절에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을 보리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에서 사용된 단어는 ‘호라오(ὁράω)’입니다.
이 ‘호라오'는 단순히 본다,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주의깊게 주목하여 보라는 뜻입니다.
‘에이돈'이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단순히 보는 것이라면, ‘호라오'는 미래에 일어나게 될 일을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단순히 성경공부를 하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차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 모티프는 이 역시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그 이야기에서 가져 온 것인데요, 천사들이 하늘의 일을 땅으로 가져오고, 땅의 일이 하늘로 올려지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내용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항상 고백하는 주기도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하늘과 땅이 결혼한다'라고 표현합니다.
51절의 말씀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의 일이 땅에 실현되고, 땅의 일이 하늘로 올려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의 세상이 이 땅에 도래함과 동시에, 이 땅의 억울함과 원통함이 하늘로 올려지는 일종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일은 땅의 일이 되고, 땅의 일은 곧 하늘의 일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우리 인생 가운데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비참한 인생을 들여다 보시고, 우리 인생이 쓸모 없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된 가능성을 보시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하고 있던 일들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으십니까?
아무리 노력하고 기도해도 잘 되지 않아 낙심하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열망하며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인생을 강권적으로 이끌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있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도 분명 있습니다.
하늘의 일이 분명 있습니다.
그 하늘의 놀라운 일을 기대하시고, 땅의 일을 하나님께 아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론_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신다.
요즘 연말을 맞이하여, 제가 공을 들이고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성도님들을 섬김의 자리로 초대하고 있는 것인데요, 제가 맡고 있는 차량봉사부와 새가족부에 적합한 분들을 기도하면서 콜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참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시간을 할애해서 섬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거절당한다고 할지라도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교회 봉사인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라는 지역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에 동참하시고는, 다른 지역으로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 가나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벳세다 지역에 있던 안드레, 시몬, 빌립과 같은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편협한 지역주의에 빠져 있던, 그러나 마음은 순수했던 나다나엘을 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성령으로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가시고, 우리 하나님의 일에 여러분들을 초대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쓰임받을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무엇입니까?
혹시 나 자신을 위해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신다면, 이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민에 대한 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미 여러분은 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20세기 가장 사랑받는 기독교 상담자로 널리 알려진 폴 트루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폴 트루니에>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삶은 결국 우리가 속해 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 쓰임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네 삶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혼자가 아닌 함께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와서 보라!’ 우리의 편견을 잠시 내려 놓고 다른 이를 위한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마음의 중심을 꿰뚫으셔서, 더 큰 일을 보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이 놀라운 일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초대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안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시고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일에 참여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을 지켜보시고, 여러분의 가능성을 보시며,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 음성에 응답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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