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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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서론]
(노래 틀기)
요새 밤하늘에 별이 많이 사라진 이유가 바로 이런 사랑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주고싶고, 눈에는 그 사람만 보이고,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습니까?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사람이 이처럼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사랑이 뭘까요?
우리는 사랑을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사상가로 뽑히는 c.s.루이스는 그의 책 ‘네가지 사랑’에서 사랑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랑에는 크게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필요의 사랑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뭔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말하고, 선물의 사랑은 바라지 않고 희생하면서까지 마냥 주려는 사랑을 말합니다.
필요의 사랑은 자기 필요때문에 하는 사랑이지만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필요의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에는 두가지 종류가 섞여 있습니다.
그는 이런 인간의 사랑을 네가지 종류로 정의합니다.
애정, 우정, 에로스, 자비입니다.
애정이란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사랑입니다.
우정은 공통의 관심사로 이뤄지는 친구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에로스는 처음 노래에서 본 것처럼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가 누려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이러한 사랑들은 왜곡되기 쉽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그 사랑이 신이 됩니다.
그리고 사랑이 신이 되면 그 사랑에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순간 사랑은 악마로 변해 우리와 상대방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번째 자비의 사랑은 좀 다릅니다.
이 사랑은 필요의 사랑이 아닌 순전히 선물의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말씀드린 ‘만일’’이나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과 같습니다.
이런 자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더 큰 사랑이 앞에서 말한 애정, 우정, 에로스의 사랑에 지속적으로 간섭할 때만 우리는 왜곡되지 않은 온전한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론]
그럼 우리가 볼 요한일서가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요?
요한일서는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끼리 하는 사랑은 애정인가요? 아니면 우정인가요? 아니면 에로스인가요?
모든 요소들이 조금씩 다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가 강조하고 싶은 사랑은 자비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형제,자매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그렇지 못할지라도 사랑하라는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11-12절)
7-8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해석]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간접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하지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행동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의지이자 행동입니다.
신학을 수십년 공부하고, 성경을 수천번 읽었더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랑이 내 형제자매에게 드러나야만 합니다.
[성경적 연결]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배도 너무나 많이 드리고, 성전에서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도 많이 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미움과 다툼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형제자매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고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말로만 하지 않으시고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드러난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이런 사랑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그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받아받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TV 결혼지옥을 보시면 부부간의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대부분 어릴 적 사랑받아본 경험이 없어서입니다.
내 안에 충분한 사랑이 없고, 사랑이 있더라도 어떻게 사랑해야할 지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로마시절 하나님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통로는 성도들간의 사랑이었습니다.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랑할 만한 게 없는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자기 것을 희생하며 섬기는 사랑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매우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욕하면서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런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알고 싶어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동호회 수준의 애정이나 우정, 에로스 사랑에 불과하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도 널린게 그런 사랑인데요.
도저히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으로 변화되어 도저히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과연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둘째,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13-16절)
16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안에 있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오늘 말씀에서 사랑 다음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연합이라는 더 깊은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갑니다.
‘연합’이라는 단어는 원래 삼위일체의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태초부터 이런 연합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누리고 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의지하며, 서로 하나됨을 누리는 관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가운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의 연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과 연합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부부가 같이 살면서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듯 말입니다.
사람들이 아바타를 보고나면 가장 강력히 뇌리에 남는 단어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바로 I see you입니다.
이 말은 그냥 본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존재가 서로 통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도 그런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요?
[성경적 연결]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 구절은 연합의 비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중 하나 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 비유 다음에 바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14절인데요.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흰는 나의 친구라.
이 말은 예수님께 붙어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것이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열매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또다른 사랑을 낳게 됩니다.
[적용]
이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져 하나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반면에 서로 미워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지게 됩니다.
저도 대학생시절 교회에서 정말 뜨겁게 형제자매들과 서로 사랑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과 너무나 친밀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니까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의 뜻을 더욱더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부부 사이에 친밀함이 더해지면 말 안하고 눈빛만 봐도 압니다.
그런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이 더해지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열매도 맺게 됩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듯 말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를 풍성하게 맺게 됩니다.
우리의 주어진 성격은 안 바뀔지 모르지만 성품은 우리가 개발되고 성숙되어져야 할 부분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연합을 누리면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셋째,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17-18절)
18절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누리면 우리 안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카페인같은 존재입니다.
억지로 사람을 각성상태로 만들어 신앙생활을 강제로 하게 만듭니다.
그런 신앙생활에 어떤 기쁨이 있겠습니까?
신약성경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기를 썼지만 심판을 피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에 안 가려고 교회를 억지로 다닙니다.
모태신앙인 분들중에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안에 거할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자식과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식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두려움이 기쁨이 되는 신앙생활이 되길 원하십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운데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아들을 버리는 상처를 감수하는 사랑이자, 자신을 버리시는 사랑입니다.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분명 아픔을 느낄 것이며, 어쩌면 부서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모두 이런 사랑을 기억하며 서로 사랑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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