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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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5장 1-27절
사도행전 25장 1-27절
지난 시간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 아니면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절제가 없다면 우리는 의를 잃고 불의로 가득 채운 삶이 될 것이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를 누리고, 구원을 받아서 영원한 찬송의 삶을 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베스도 총독이 오고 난 이후의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베스도가 총독이 된 후 3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총독은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그곳을 다스리고 지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곧장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인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베스도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에서 높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고소하게 되는데, 베스도가 호의를 베풀어서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요청한 목적은 숨어 있다가 바울을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총독이 처음 와서 인사하는 것을 이용해 불법을 저지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악한 생각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이들이 이런 식으로 바울을 죽이게 되면, 그 일은 관리를 제대로 못한 총독의 책임이 되버립니다. 베스도가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서 인사하며 잘 지내보려고 했는데, 유대 지도자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불법을 저지르려고 하는 겁니다. 이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고, 유대의 지도자들인지 의심이 되는 지점입니다.
3절에 “호의”로 번역된 단어는 “은혜”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즉, 베스도에게 은혜를 얻어서 바울을 죽이는 것이 이들의 목적입니다. 은혜라는 복된 단어가 대하는 사람에 따라서 악한 의미가 되버리는 것을 우리는 듣고 있는 겁니다.
베스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합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재판한다면, 아무래도 유대인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문제는 총독이 담당하는 것이 옳기에 자신이 직접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5절에 자신이 있는 가이사랴로 와서 바울에 대해 고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이라고 말하면서 재판관으로 합당한 중립적 자세를 가지려고 합니다. 즉, 감정적으로 바울이 미워서 해치려는 유대인들과 달리 고발당해서 재판을 받을 만큼 확실하게 잘못한 일이나 부적절한 일이 있을 때 바울을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8일 또는 10일을 유대 지도자들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함께 지낸 시간이 끝나고 가이사랴로 다시 돌아가서 재판 자리에 앉은 총독은 바울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이 재판장에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고발하지만 증거를 대지 못했습니다. 2년이나 시간이 지났지만, 없던 증거가 갑자기 생겨났을 리는 없습니다. 고소의 내용도 이전에 했던 것처럼 유대인을 거스르고, 소요를 일으키고, 성전을 더럽혔다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을 둘러서서 고발했다는 표현을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위협하며 궁지로 몰아넣은 것 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궁지로 몰아도 증거를 대지 못하면 재판장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라고 번역한 표현은 계속해서 증거를 제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세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첫째는 유대인의 율법입니다. 바울은 모세 오경에 나와 있는 율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았으며, 말씀을 따라서 조상의 하나님을 섬겼다고 주장했었습니다.
둘째로 자신은 성전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성전을 더럽힌 일도 없었고, 오히려 성전의 법에 따라서 정결 예식을 행하고 서원 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있었습니다.
셋째로 자신은 가이사에게도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황제를 부르는 호칭이 가이사였고, 당시 가이사는 네로였습니다. 바울은 가이사인 네로 황제에게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곳곳에서 소요를 일으킨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작 소동을 일으킨 것은 유대인들이었고, 바울은 그저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9절에서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을 거냐고 질문합니다. 베스도는 처음에 유대인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정의와 공정보다는 자신의 통치에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로마 사람이기에 아무렇게나 예루살렘으로 옮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의견을 물어본 겁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받는 것을 거절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까지 있었는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의 목적지는 로마입니다. 그러니 로마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해서 피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베스도가 공개적으로 재판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옮기자고 제안하는 것은 유대인에게 이미 마음이 기울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안을 거절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자신이 불의한 일을 해서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는 것이 마땅하지만, 유대인들의 고발이 사실이 아니면,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불의한 일을 한 것이 없는데,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하고, 빌라도를 압박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전에 그런 경험이 있는데, 바울도 충분히 없는 죄도 만들어서 죽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바울 입장에서는 자신이 죄가 없는데, 유대인의 손에 넘어가서 죽을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베스도의 마음이 이미 유대인으로 향한 것을 알고 자신의 재판을 가이사에게 맡긴다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로마 시민의 권리로 총독에게 재판을 받아서 유죄 선언이 되어도, 가이사에게 직접 재판을 요청하면 특별한 이유없이는 가이사에게 보내서 직접 재판을 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로마법을 이용해서 가이사에게 가서 직접 재판을 받겠다고 했고, 더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베스도는 배석자들과 상의를 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죄가 없는 사람을 처형하는 것도 문제고, 이제 막 총독이 되었는데, 유대인들의 마음을 잃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베스도 입장에서 가장 최선의 길은 바울의 요청대로 가이사에게 보내서 재판을 받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을 재판하는 권한이 자기에게 없으니 불법을 저지를 필요도 없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잃을 것도 없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바울의 요청으로 재판은 끝났지만, 곧장 황제에게 보냈던 것은 아닙니다. 13절 이후로는 베스도에게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문안하러 오면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왕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로, 아버지도 아그립바여서 아그립바 2세라고 불립니다. 아그립바가 자신의 아내인 버니게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온 것은 총독이기에 인사하러 온 것도 있고, 바울의 재판에 관여하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겁니다.
베스도는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일을 물어보고 상의하려고 합니다.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왕이니, 예루살렘과 성전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더 잘 알았을 겁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고 정죄해달라고 요청했음을 말합니다. 베스도는 16절에 로마법이 공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 후에, 17절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돌아와서 곧장 재판을 열었다고 말합니다.
베스도는 고발 내용 가운데 악행의 혐의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실 총독이 다뤄야 하는 악행에 대해서 나와야 총독이 처벌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바울은 죄가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겁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정치적인 문제가 없고, 종교적인 내용으로 고발당했음을 말합니다. 특히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바울의 주장이 문제였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동료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가던 다메섹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그분이 살아 계신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바울은 그것이 진리라고 외쳤고, 유대인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상황을 전달한 후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 받겠냐고 질문했는데, 바울이 거절했음을 말합니다. 사실 바울에게 정치적인 문제가 전혀 없고, 악행도 없고 단지 종교적인 문제일 뿐이니 바울을 석방해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베스도의 말을 들은 아그립바는 자신도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한다고 말했고, 베스도는 다음 날 같이 들을 것을 제안합니다. 그래서 다시 바울을 심문하는 자리가 열리게 됩니다.
이 자리에는 아그립바와 그의 부인 버니게가 위엄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나타났고, 총독의 부하들인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 즉 높은 지위의 관리들이 함께 했습니다.
23절에 “위엄”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환상”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타나도, 그것은 환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옷과 장신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무엇을 모시고 있느냐에서 결정됩니다.
이전과는 달리 심문하는 자리가 매우 엄중해졌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그렇겠지만, 결국 심문을 받는 바울에 대한 중요성과 그를 고발한 내용의 무게가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심문의 시작은 베스도의 짧은 연설과 함께 시작됩니다. 베스도는 먼저 바울에 대해서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면서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주장했고,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가이사랴에서도 자신에게 고발했음을 언급합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따라서 심문을 했지만, 바울에게 죄가 없어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판단은 예루살렘에 있던 천부장 루시아의 편지에서도 나오는 내용이고, 베스도가 직접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내린 결론이기도 합니다.
25절에 베스도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사형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고, 베스도는 그럴만한 죄가 있는지를 살폈다는 의미가 됩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요청에 따라 황제에게 재판받도록 결정이 되었음도 말합니다.
26절에서 베스도는 지금 심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황제에게 보내기는 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내용을 편지에 써서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편지에 바울의 죄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써야 하기에 여러 사람들, 특히 아그립바왕 앞에 세우고 심문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26장에서는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여전히 바울을 죽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베스도에게 호의, 즉 은혜를 얻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게다가 바울을 정죄할 죄목에 합당한 증거는 여전히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장면이 오늘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바울 스스로가 가르쳤던 내용과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7절에서 성도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 세상 법정에 가서 고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을 가지고 와서 바울이 자신의 억울함을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은 가르친 내용과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가 성도를 상대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성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긴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고 있으니 그들을 성도로 간주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불신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최대한 선으로 대해주는 것이 옳지만, 그들의 악행을 그냥 당하고 있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반대와 핍박을 그대로 받으셨지만, 성도들이 똑같이 할 이유는 없습니다.
바울은 순교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이 분명하지만, 일부러 순교하려고 죽을 자리를 찾아 다니는 것은 마땅한 순교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최대한 아끼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죽을 곳을 찾아다니면서 적극적으로 죽으려고 하는 것은 순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며, 건강을 챙기듯 목숨도 아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재판에서는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2세 그리고 아그립바의 아내 버니게가 함께 자리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남매 관계로 엄밀히 말하면, 근친상간과 불륜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버니게에 대한 역사 기록을 보면, 버니게는 알렉산더의 아들 마르쿠스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삼촌 칼키스와 결혼하고 칼키스가 죽자, 동생인 아그립바 2세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에 근친상간한다는 소문이 돌자, 길리기아 왕 폴레몬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다시 아그립바 2세와 살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바울의 재판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바울과 버니게 중에 누가 더 죄인입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바울이 죽일 죄인이면, 버니게는 얼마나 더 큰 죄인이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버니게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습니다. 버니게가 왕의 여자이기 때문이고, 권력이 무서워 그 앞에서 죄를 보고도 죄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상황은 바울에게 공정한 재판이 열린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유대인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위해서 바울을 고소했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그토록 지키기를 원했다면,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가 율법을 어긴 일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권력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바울에게는 악독을 품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성도는 어떠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완전한 공정과 정의를 이루는 삶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자세와 같은 방향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목표가 있고,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불의가 있으면, 똑같이 분노하고, 잘못이 있어서 말한다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랑 관계가 되기 때문에 침묵하거나 이득이 될 때는 침묵한다면, 나와 관계가 없을 때도 침묵하고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때도 침묵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모습일 겁니다.
나의 이익과 감정을 따라서 정의와 공정의 기준이 변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성경의 진리를 적용하는 것도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나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변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재판장의 자리에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했지만, 속은 온갖 더러움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옷차림이 어떠한지는 언급하지 않지만, 죄수의 신분으로 좋은 옷을 입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속은 성령으로 채워져 있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바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스도의 보혈이 덮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화려한 옷과 장신구인지, 아니면 하나님이신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의 진귀한 보물로 치장을 해도,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정말 값진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다면, 진귀한 보물이 아니라, 그러한 보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사람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바울은 벨릭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지 2년이 지났고, 새로운 총독 베스도가 나타났지만, 여전히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 의미없는 일은 없습니다. 2년 동안 바울이 감옥에서 어떤 생활을 했고, 어떤 마음의 상태였는지를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선하신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재미로 바울을 다루시지도 않으시고, 계획없이 바울을 인도하지도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은 반복되고, 아무런 결과도 없는 재판이 계속되지만,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 의미를 두시는 하나님께서는 아주 작은 일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할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고,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다루시고 이끄신다면, 과정 가운데 우리가 겪는 일들이 그 순간에는 괴롭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일 뿐,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하신 뜻을 계속해서 펼쳐가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아주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감정과 이익에 빠져서 하나님의 법을 버리는 악인이 되지 마시고, 자신의 감정과 이익을 역행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먼저 쫒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의인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