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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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사렛 사람 예수
성경 : 마 2:13-23
우리 사람은 시공간이란 간섭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 시간이란 개념도 과거와 현재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면 자기반성을 하고, 새해가 되면 새마음을 품는다. 사실 송구와 영신은 사람의 기준일뿐 하나님은 천년이 하루 같으시고, 하루가 천년같은 분이시다. 하나님의 구원도 이런 하나님의 기준을 생각해야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약속의 자녀는 태어나지 않았다. 양자를 삼기도 하고, 사라가 아닌 하갈에게서 자녀를 얻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인간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인간의 소망이 사라지자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신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독특하시다. 사람이 생각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개입하신다. 그것도 사람의 소망과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특징이 있다.
어느 특정한 가사를 비판해서 죄송하지만, 복음성가 중에 ‘밀알’이라는 찬양이 있다. 하나님 앞에 헌신을 이끄는 찬양으로 유명하다. 그 당시 이 찬양을 부르지 않은 교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 나의 피와 헌신이라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밀알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헌신과 희생과 상관없다. 단지 하나님이 일하실 때, 우리가 그 도구로서 쓰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 피흘림으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우리 은보 성도님들은 그 찬양을 듣거나 부를 때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하는 그 이상으로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다.
13-15절 / 16-18절 / 19-23절로 나눌 수 있다. 앞에 나오는 동방박사와 헤롯의 이야기는 살피지 않았다. 그런데 13절을 보시면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접속사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앞에 나오는 내용과 함께 살펴야 한다.
1:18-25절에는 천사가 나타나 요셉과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예수라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음모가 나온다. 2:1-12절을 보면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아이를 찾으면 알려 달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2:13-5절을 보면 꿈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이집트로 피하라는 메시지를 준다. 그러나 2:16-18절을 보면 헤롯은 베들레헴에 있는 사내아이들을 죽인다. 그리고 2:19-23절을 보면 시간이 지난 후에 천사가 요셉의 꿈에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준다.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13절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몇 주 전에 함께 살폈던 개관표를 떠올려 보시면, 프롤로그가 있고 끝에 에필로그가 있었다. 제가 프롤로그에서는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 모티브다.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결국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뤄질 것임을 프롤로그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 이집트는 유대인들에게 피난처와 같은 장소였다. 그 당시 이집트도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로마 통치하에 있었는데, 가뭄이나 어떤 환경으로 피신하는 지역이었다. 헤롯은 로마 통치를 이양받은 분봉왕이기 때문에 이집트까지 힘을 펼칠 수 없기에 이집트로 피난한 것이다.
14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이집트로 내려간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교회가 만든 이야기로 생각한다. 또한 이집트 모티브를 마태의 신학적 논증을 위해 미드라쉬 학가다형식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학가다는 유대인들의 적용적 성경해석인데,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로 설득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사용한 예는 유다서다.
지금에 설교를 보면, 목사님이나 저는 성경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강해설교라면, 이동원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책이나 드라마나 여러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성경을 설명하는 주제 설교가 있다. 말하자면 마태가 어떤 신학적 주제를 말한기 위해 이 이집트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반대한다.
사실 이집트로 피신한 모습을 통해 제2의 모세로서 마태가 말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태가 이 이야기를 만들거나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는 성경 전승 지킴이들이 있었다. 만약 마태가 말한 이 내용이 이상이 있는 내용이었다면 전승지킴이들이 반대했을 것이다.
모세와 예수님은 다르시다. 바울이 예수님을 제2의 아담으로 설명하며 사람의 대표이신 예수님이 전 인류를 대표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마태가 그리는 제2의 모세는 유대인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구원자셨다. 다시 말해 지금 마태가 말하는 내용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구원 방법은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그때부터 천사의 현몽으로 요셉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개입과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요셉에게 이집트로 피하라는 개입 또한 동일하다. 이것은 신학적 의도를 넘어선 하나님의 개입을 말하는 것이다.
은보 가족 여러분,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서 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한해를 돌아보는 생각으로 묶은 해를 보내고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새해를 기대하지 않기를 원한다. 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생각과 기대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다사다난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도하셨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어려움도 있었고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기쁨도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셨고, 임마누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다. 지금도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동행이 우리가 기대하는 새해가 아닐 수 있다. 좋은 일만 가득한 한해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구약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갈때만 해도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보호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선하게 인도하셨다.
창50: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기서 ‘선’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좋았더라”이다. 결국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가장 선한 상황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선을 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기껏 생각해 내는 것은 물질적 풍요와 성공뿐이다. 어떻게 해야 생명을 구원하며, 어떻게 해야 선을 따라 행하는지 묻지 않는다. 우리 바램은 하나님께 다 맡겨 드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을 사모하며 요셉처럼 순종하기를 원한다.
사실 죽을 것 같이 어려운 일도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도우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처럼 우리가 이제는 상황에 상관없이, 내 감정에 상관없이, 영의 사람이 자라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2. 말씀하심이 이루어졌느니라
15절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앞선 말씀이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개입을 보여 주었다면, 지금부터 나오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과 그분의 삶은 어떤 인간적인 희생이나 성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말씀대로 오셨고 행하신 메시아시다.
예수님의 탄생을 BC8년 정도로 추정한다. 헤롯대왕이 BC4년에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족은 거의 4년 정도를 이집트에서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태는 이것을 호세아서 11:1절 말씀을 이룬 것이라고 말한다.
호11: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세아서 문맥을 보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로 오면서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메시아 칭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높여서는 안 되는 말씀이 민수기 24:7-8절 말씀이다.
민24:7-8절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발락이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영이 발람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만들었다. 그 내용 중에 7절은 왕을 이야기하고 있고, 이집트에서 나오는 ‘그’는 왕으로서 미래에 올 존재인 것이다. 마태는 이런 구약성경 인용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말하는 것이다.
16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을 고대 문서의 하나로 여기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성경 해석은 달라진다. 이 사건은 로마나 유대역사에 남아 있지 않다. 헤롯이 왕이었는데, 왕의 명령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고, 아이들이 죽은 이런 사건이라면 유대문헌에 남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먼드 브라운도 이런 실수를 했다. 메시아의 죽음이라는 책을 보면 로마 기록이나 유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증보다 내증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외증보다는 내증을 우선으로 한다. 사실 이 말은 브라운이 한 말인데, 브라운도 인간이기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제가 좋아하는 키너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정치적 살인이었고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약 20명 가량의 아기들이 죽은 사건이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헤롯은 자신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암과 처남과 장모를 죽였고, 자신의 아들 세 명을 죽였다. 그러니까 충분히 베들레헴 아기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성경은 “이에”로 번역한 말은 “그때에”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시간과 성취를 말한다. 그것은 7절이다. 7절에도 ‘토테’가 나온다. 바로 헤롯이 아기들을 죽이려고 하는 내용이다. 그것이 이뤄진 것이다. 마치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힘을 빼기 위해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듯이 헤롯 왕도 자신에 왕좌를 위해 아기들을 죽였다. 이것이 세상 왕의 모습이다. 지금도 동일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다. 예수님은 죽이는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왕이었다.
18절에 나오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큰 통곡소리가 들린다는 예레미야 31:15절 말씀에 대한 성취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포로에 관한 말씀이다. 라마는 포로를 잡아가는 집결지였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유배를 떠났던 장소이기도 하다.
저는 교역자이기 때문에 장례식장을 많이 다녔다. 세상 사람들은 호상이라 불리는 장례도 있다. 그런데 자녀를 먼저 보낸 곳은 정말 초상집이다. 상주들을 슬픔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웃어도 주고 같이 시간도 보내준다. 그런데 아이가 죽으면 정말 비참하다. 제가 섬겼던 교회중에 목사님이 단기선교 가셨을 때 암으로 투병하던 아이가 죽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장 슬프고 비참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기들의 죽음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죽음의 포로가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사망의 포로가 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칼을 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롬6: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님은 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정치로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성취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은보 가족 여러분, 우리는 잡다한 –잡다한이란 말로 퉁쳐서 죄송하지만- 바램들은 버리고 예수님처럼 말씀을 이루는 한해가 되기를 소원한다. 이땅에 교회가 필요하고, 이땅에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이유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다. 또한 우리 가운데 사망에 사로잡힌 자들이 생명으로 구원받는 은혜를 사모한다.
C.S 루이스는 ‘죽기 전에 죽으라. 죽고 나면 기회가 없다’는 말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찌르는 문구이다. 그리스도인은 죽기 전에 죽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 죽음은 우리 존재를 관통하는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한 죽음이며,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통로이다. 이 짧은 문장이 우리에게 체화되느냐 아니면 경구로만 남아있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상반된 결과를 불러온다. 오늘날 교회는 대부분 후자인 듯하다. 그러니 생명력이 없다. 그러니 변화가 없고, 역사가 없는 것이다.
이 땅에 있는 불의와 공포와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복음의 생명이 내 삶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교회가 교회다워져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살아내야 한다. 교회 안에 복음이 없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십자가 은혜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은 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다. 교회와 성도 자체가 빛이며 소금이다. 그런데 그 빛과 소금이 적기 때문에 세상은 더 어둡고, 더 썩어 가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말씀과 씨름한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이 근본적인 힘도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없어 세상은 망하는 것이다. 말씀이 내게 현몽되지 않고, 말씀이 내게 임하지 않아서 고통하며 주의 은혜를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러므로 우리 은보 교회와 우리 성도님들이 말씀의 응답이 되는 한해가 되기를 소원한다.
3. 나사렛 사람 예수
19절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다시 천사가 나타나 주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헤롯대왕이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함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요셉 가족이 정착한 곳이 나사렛이라고 말한다.
23절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신약성경은 헬라어라는 언어로 기록되었지만, 히브리적 형태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히브리어나 아람어에 능숙한 사람이 신약성경을 더 잘 이해한다. 이 말씀도 관념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답이 보이지 않는 말씀이다. 관념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잘못되었거나 원래 마태복음에는 없는 말씀으로 본다. 사실 구약성경 어디에도 ‘나사렛’이라는 예언은 없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접근한 사람은 길을 잃어 버린다.
여기에 관한 말씀은 알렌과 키너가 잘 설명해 주었다.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은 성도님들이라 힘드시겠지만, 제가 설명해 보겠다.
나자렡이라는 마을 이름은 히브리어 ‘네체르’와 관련 있는 이름이다. 나자렡은 나츠라 또는 나츠라트의 음역으로 본다. 이사야 11: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우리는 언어유희를 말 장난으로 생각하지만, 유대인들은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발음의 유사성에 토대하여 논증하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 11:1절에 “한 가지”가 ‘네체르’다. 그 당시 유대 문헌에서는 네체르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쿰란 문헌에서도 메시아 칭호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사야 11:1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사야 60:21절에서 네체르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나사렛에 거하신 이유는 네체르로 비유된 구약 성경의 내용이 실현되는 내용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심부터 재림까지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다.
사실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촌 동네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유대 지역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는 갈릴리 지역 그중에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는 나다나엘의 말은 이것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말구유에 누이시고, 베들레헴 작은 나사렛에서 사신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로 예언한 그 메시아이심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결론>
여러분 작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변방에서 살아가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대구 땅 한 귀퉁이에 있는 은보 교회가 부끄러운 곳이 아니다. 누가 어느 교회냐고 물으면, ‘있어.. 저쪽에 작은 교회’라고 하지 마시고, 은보교회라고 당당히 말하기를 바란다.
세상은 헤롯 궁전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교회조차도 이것을 따라가고 있다. 성공하는 목회를 하려면 서울에 있는 유명교회 부목사가 되어야 한다. 믿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것을 피해왔다. 학교도 대구에서 공부했다. 한 번씩 인간적으로 후회하다가 회개한다. 대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고 무시 당할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신학 이야기를 하면 이길 자신이 있다.
여러분, 이곳에 하나님의 말씀만 흥왕한다면 이곳 이곡동이 나사렛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크고 작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작다고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 새해를 바라보는 이 순간에 내 삶에 말씀이 있는가를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