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뜻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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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인의 자비”
서론 “주인의 자비”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아이들이 말을 안들어서 참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두 딸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하면 내 말을 잘 들을까 이런 저런 궁리를 많이 했었는데요,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아빠 말씀을 잘 들을 때마다 스티커를 붙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스티커를 스무개 모으면 제가 편의점에 가서 원하는 것 하나를 사주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거짓말처럼 제 말을 너무나도 잘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요? 아빠 말을 잘 듣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착한 일, 좋은 일을 하면 스티커를 더 준다고 하니 없던 일도 만들어서 하는가하면, 제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며 스티커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며칠에 걸쳐 첫째가 먼저 스티커를 스무개 모았습니다. 둘째는 스티커가 10개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신이 나서 편의점에 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고, 둘째는 시무룩해지더니 금새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첫째와 둘째 모두 편의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원하는 것 하나씩 사주었습니다. 그러자 첫째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제인이는 스티커 다 못 모았는데 왜 사줘요?” 순간 저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응~ 제인이가 스티커 다 모으면 아인이도 사줄거야.” 이렇게 대답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기억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놓고도 걱정이 되는 것은 과도한 지출이었습니다. 스티커를 모은 녀석들에게만 선물을 지급했다면 그럴 걱정이 덜했겠지만, 스티커를 다 모을 때마다 비효율적인 지출이 생길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들을 위한 것이니 아깝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만하면 저비용 고효율이 좋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처럼 효율성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때로는 효율성을 넘어서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이야기도, 바로 자비를 베푸는 주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론1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본론1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오늘 이야기는 이 자비로운 주인에 대한 소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 20: 1 말씀입니다.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여기서 예수님은 천국을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간 집주인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일반적인 주인들과는 좀 다릅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CEO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포도원 주인은 수익창출이라는 목적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포도원 주인은 일꾼을 고용하기 위해 총 다섯 번이나 장터에 나갑니다. 아침 일찍 한 번, 제삼시에 한 번, 그리고 제 육시와 제구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십일시에 나가죠. 주인이 나간 그 장터는 헬라어로 ‘아고라'라고 하는데요, 시민들이 모여 있는 시장, 인력 시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왜 다섯 번이나 장터에 나갔을까요? 이 사람이 만약 수익창출에 관심이 있었다면, 아마도 아침 일찍 나갔을 때 필요한 인력을 전부 데려갔을 것입니다. 어차피 하루 일당을 한 데나리온 씩 주기로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일꾼을 써먹어야 같은 비용으로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다섯 번에 걸쳐 장터에 나가 거기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주인의 관심은 같은 비용으로 많은 수확을 거두는 것보다는,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은 왜 그랬던 것일까요? 주인은 장터에서 일감을 구하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6-7절입니다.
마 20:6-7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장터에서 놀고 있던 그들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우리를 써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6절에 ‘놀고 있다'는 표현의 헬라어 원어는 ‘아르고스'인데요, 이것은 ‘할 일이 없는', ‘실직한'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놀고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어 아무 것도 못하는 실직자라는 것이죠. 그들은 비난받아야 할 죄인이 아니라 당시 사회경제시스템 아래에서 희생당한 피해자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인의 행동을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의 최대수확이 목적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경제개념, 운영논리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 세상과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서로 다른 가치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최대한의 효율성과 능력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작동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자비가 넘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천국으로, 하나님 나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주인 되신 하나님의 자비가 넘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실행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산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가치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포도원 품꾼들의 태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들의 머릿 속에는 일이 힘들수록 보수는 많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보상은 반드시 제공된 수고에 비례해야 한다는 사회의 관습에 따른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세상을 전복시킬만한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 원하시는 것은, 관습과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네 삶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뒤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을리는 없겠지요. 분명 우리에게 더 나은 삶,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사실 오늘 이야기가 사회경제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사회경제구조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날 마땅히 일하고 급여를 받는 이 시스템을 갈아엎고 그저 자비를 베푸는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제자도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느냐라는 것이죠. 오늘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하는 구절이 하나 있는데요, 오늘 이야기 바로 앞에 있는 19장 30절과, 오늘 이야기 마지막 구절인 20장 16절 말씀입니다. 19장 3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20장 16절 말씀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구절 사이에 포도원 품꾼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이 말씀구절이 핵심주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냐면, 베드로의 어리석은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19장 27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질문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한 댓가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그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인데,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댓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먼저 된 자란, 댓가를 요구하는 제자들이고, 나중된 자는 댓가를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들 역시 보상을 원하며 제자의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교회 일을 예로 든다면, 우리는 봉사를 하면서도 봉사한 것에 대한 댓가를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섬겼는데, 나에게 아무런 감사표시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때로는 분개하기도 합니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봉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핵심은 봉사한 것에 대해 응당 댓가를 지불하는 어떤 시스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포도원 품꾼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포도원 품꾼들처럼 우리가 일한만큼, 우리가 노력한만큼 보상이 주어지길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만큼,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일한만큼 댓가가 주어지는 일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비로우신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맛보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댓가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자비로우신 주님의 자비를 경험하며, 그 자비로우심을 닮아가는 것 뿐입니다.
저는 사역부서를 맡으면서 가끔씩 봉사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 부서를 섬기게 되셨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 성도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받은 은혜가 커서요. 그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야죠.’ 이것이 바로 자비로우신 주님을 경험한 제자의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께서 우리 주님께 거저 받은 은혜가 있으시다면, 그 받은 은혜를 이제는 어디로 흘려 보내야할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가 계약관계라고 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계약관계란, 일한만큼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관계인데 사탄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조차도 계약관계 안에서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께 잘해야 하는데라는 마음은, 사실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께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계약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계약관계에 있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 더 나은 조건으로 우리와 협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그에 대한 댓가를 주시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를 빈털털이로 만들고 마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계약이 아닌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관계요, 제자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신실하신 성품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어서 하나님이 자비로우신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2 “공동체적 사고가 필요하다"
본론2 “공동체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난 주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결혼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갔을 때 그 곳에는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써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능력이 안 되서,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그들을 써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생각보다 세상은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능력주의'의 세상입니다. 세상은 좋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 출세하고 먹고 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능력을 갖기 위해 사람들은 부지런히 노력하지만, 결국 그 능력을 갖지 못해 탈락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장터로 여러 차례 갔던 것은, 그가 자비를 베풀 사람들, 즉 사회시스템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나섰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만일 포도원에 머무르기만 했다면, 그는 결코 장터에서 써줄 사람이 없어 하루 일당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자비로움을 말로만이 아닌, 직접 장터로 나감으로써 자신의 자비를 나타내었습니다.
장터는 당시 ‘인력 시장'을 의미했지만, 다른 의미로는 시민들의 회합장소, 만남의 장소, 재판과 송사가 이루어지며, 말씀이 선포되고, 때로는 아이들의 놀이터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고라라고 불리는 이 장터는 우리네 삶의 자리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인생들의 깊은 현실이 자리잡은 삶 속으로 나아갔고, 그 곳에서 자비가 필요한 이들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네 삶의 동선과는 겹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9시에 맞춰 출근할 때, 그들은 일감을 구하기 위해 새벽같이 출근합니다. 우리가 5시에 맞춰 퇴근할 때, 그들은 수당을 받기 위해 늦게까지 야근합니다. 우리가 전문직에 종사할 때 그들은 일용직 현장에 있으며, 우리가 워라밸의 삶을 살 때 그들은 여가를 누려야할 그 때에도 출근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우리 섬김의 손길이 닿지는 않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지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장터로 직접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주일부터 세계선교부에서는 스리랑카 단기선교팀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사실 스리랑카 단기선교팀을 구성하기까지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안전 문제였습니다. 과연 그 곳이 선교사역을 할만큼 안전한 곳인가? 여러 기관에 자문을 구한 끝에 100% 안전한 곳은 아니지만 단기선교팀이 반드시 가야할 명분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리랑카라는 장터로 나아가 그 곳에서 만날 사람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주인의 자비를 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선교팀의 목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장터에 있는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어 갑니다. 천국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들의 존재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 능력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능력을 키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언젠가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골짜기 아래에 굴러 떨어진 우리의 이웃이, 언젠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해 줄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능력이 부족해서 섬길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역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섬기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혜와 힘은 교회를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느라 정작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과 지혜의 크고 적음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예배당도 없지만 동네 사람들로 북적이는 교회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교회는 도서관을 운영하는 교회입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영어 도서관을 설립하여 주중에는 교회모임공간을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처음에는 교회 공간을 도서관 공간으로 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세상을 섬기는 것이 좋지만, 우리가 모일 공간조차 없는데 어떻게 해요?”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심 끝에 성도들은 마음을 모아 주중에는 도서관으로 활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교회 안에 선교지향적 문화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면, 성도님들이 세상을 나누고자 하는 문화가 자연스레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처럼, 물이 장기간 순환하지 않고 고여 있으면 오염되듯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한 것입니다.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재정의 1/3을 선교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1/3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교회는 행정적인 비용은 최소화하여 교회의 정체성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기억하고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론 “더 높은 뜻이란..."
결론 “더 높은 뜻이란..."
이것이 바로 주인의 자비를 얻은 품꾼이 마땅히 해야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은뜻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사실 이 높은뜻이란, High Will이 아니라, God’s Will입니다. High Will은 자칫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God’s Will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이기에 우리는 품꾼의 정체성을 가지게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높은뜻을 품기 위해서는 낮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더 낮은 그 자리에 주인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더 낮은 그 자리에 주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곳으로 내려가 장터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온전한 높은뜻을 실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어느 유품정리사가 쓴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다 보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자신도 너무나 많은 것들을 쌓아 두고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고 합니다. 나눔과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원이 부족하여, 능력이 부족하여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쌓는 것'에서 ‘나누는 것'으로 맞출 때, 우리의 자원과 능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먼저 주님의 자비를 입은 자로서, 그 자비를 행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중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도 주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나중된 자를,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된 자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의 나눔과 섬김이 필요한 장터를 향해 나아갑시다. 그 곳에 주님의 자비가 있고 그 낮은 자리에 높은뜻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