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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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룻기 1장 1절을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라고 배경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배경에서 나타나는 말에서 성경에서 히브리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라고 해석할 수 있는 바예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바예히라는 말이 붙어서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이어지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과 이어지고 있는 것을 얘기 할 때 사사기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사사들이 치리하던 그 때에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 룻기를 알기 위해서는 사사기를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는 어떤 시절 이었을까요? 그 시절을 대표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21장 마지막 구절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니라’
사사들이 치리하던 그 시절에는 이스라엘에 제도적인 왕이 없었습니다. 왕이 없어서, 그냥 나라를 이루고 있지만 그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이러 저리 휘둘리기 쉬웠습니다. 그 때 당시에 주변에 있던 미디안, 모압, 블레셋에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많이 휘둘리면서 그들을 다스릴 사람이 필요했다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시절에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지키기 위해서 세웠던 자들이 바로 사사들입니다. 옷니엘로부터 시작했던 사사들은 엘리,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어땠는지 살펴보면 방금 읽은 말씀을 보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스라엘에 왕은 없지만 그들에게 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왕이 있음에도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의 영적 상태가 아주 어둡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어두움은 약 400년이란 시간이 지날 때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 옷니엘은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점점 사사들에게서도 문제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때 당시에 멸시 당하던 왼손잡이, 그리고 그때 당시에 엄청난 약자이던 여성이 사사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상적인 남자, 오른손 잡이 등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이 앞에 나설 수 없는 영적인 상태일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기드온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으며 점점 교만해지고 그 아들에 이르러서는 피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러다 입다와 삼손에 이르러서는 사사가 맞나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문제가 있는 사사임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도 또한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어두움은 도덕적인 타락으로까지 이어졌고,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인 그들에게서는 이방에서도 나타나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집에서 일어났던 일화가 생각나게 하는 모습도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길갈에서 나와 내 집인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 고백했던 것을 따라 함께 우리는 여호와만 섬기겠다 했던 그 백성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하나님을 모르지 않지만, 다른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여 우상을 섬기고 음란한 문화를 받아들여 섬기고, 하나님과 함께 섬기려 하는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눈에 옳은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엔 이방의 문화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이방 족속을 다 쫓아내라고 했지만,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문화가 좋고, 종교가 좋고 적어도 새로운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할 때에 농사짓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쫓아내는 거보다 곁에 두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그들은 이방 민족을 쫓아내지 않았고, 그들의 문화까지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내 생각을 개입하는 순간 불순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갉아 먹습니다. 하와에게 접근했던 뱀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히 바꿔서 사람의 생각대로 하게해서 불순종하게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불순종은 순식간에 나타나기 마련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존 비비어 목사라는 분은 본인 저서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에 100% 순종하지 않은 것은 불순종입니다”라고 그의 저서를 통해 얘기했습니다. 우리의 어떤 생각을 개입하지 않고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생각이 개입하자 다른 순종으로 나타나고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수 없이 질책하셨습니다.
사사기 2:1-2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렇듯 적당한 순종으로 나아갔던 이스라엘, 적당한 타협으로 나아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산성지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적당한 타협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 철저히 엎드려진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확실하게 제시해 주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순종으로 인해서 이 세상 가운데서 조금 손해 볼 수 있습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 혼자만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직장 동료들이, 아래 직원들이 손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또 힘든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철저한 순종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기에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뿐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겨내도록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룻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룻기는 이런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 지 보여주십니다.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룻기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흉년이 찾아오다.
이런 불순종의 시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와 별개로 그들에게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이 흉년은 원어로 텅비다! 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당시에 텅빌정도로의 흉년은 결국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이 흉년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이라고 볼 수 있느냐! 그럴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성경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만 무조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봐야 하는 것은 영적으로 무너진 이스라엘 앞에 그들의 생존의 문제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어두움이 원인이라고 한다고 해도, 이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풍년의 시기,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흉년과 풍년은 아브라함의 때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아브라함에게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브라함 이후 이삭의 시기에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는 특히 대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이렇듯 항상 그곳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흉년의 요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풍년과 흉년, 그것들 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살아가다보면 수 많은 문제가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바로 서있을 때나 무너져있을 때나 언제나 우리 삶에 문제들은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별로 살아가지는 못했지만, 저도 수 많은 문제를 딛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따라오다보니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산성지교회 성도님들은 저보다 훨씬 긴 삶을 사신 분들이 많다보니 제가 생각할수도 없을 만큼 수 많은 문제들, 고난들을 겪어오시고 이겨내 오셨을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수 없이 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문제들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제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모든 문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그 뜻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일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그 문제를 주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고 언제나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때, 그 문제를 극복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수 많은 파도가 있다고 하는 비유를 많이 들었습니다.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는 것처럼 그 파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결국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많이 들었습니다. 그 파도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 그 하나님께 물으며 나아가는 것 모든 문제의 파도 아래에서 우리가 문제를 돌파해가는 방법입니다.
또 1절 후반부에는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모압으로 유대 베들레헴에 거하는 한 사람이 내려가서 거기에 거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이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왕이시다! 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얘기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서사를 비유로 나타내고 있음을 이 이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하나님이시지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백성들처럼 자기 눈에 좋은 곳으로 그냥 가고 있습니다. 근데 우리는 이 거류하다! 라는 말에 집중해야 합니다. 1절부터 4절까지 이 거하다! 라는 말은 3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1절에 모압 지방에 가서 거기에 거류하였는데, 그리고 2절에 끝에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라 그리고 4절에도 거기에 거주한 지 십년 정도 지난 쯔음에라고 하며 거주하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압 땅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고, 그 자리에서 많은 일을 겪었음을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모압에서 정착이라도 할것처럼 거기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압 땅에 거하는 것이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도 각기 이집트나 블레셋 땅에 가서 피해 있었던 것처럼 생존을 위해서라면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인도하심 속에서 더 큰 은혜로 개입하셨습니다.
2.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그들은 생존의 문제 앞에서 모압으로 가서도 그들의 고통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그들의 고통의 이유가 그들이 모압으로 가고 거기서 며느리를 맞이해서라고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 며느리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거기서 신앙생활을 유지했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룻은 16절 말씀을 보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모압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은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들었던 것이기 때문일것입니다. 다만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믿는 자들이 이유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나오미에게도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오미는 그냥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남편이 죽고, 아들이 죽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곳에서 거류하고 있습니다. 바로 살아내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있을 때 고난이 있어도 항상 살아내야 합니다. 앞 뒤가 막힌 것 같은 상황이 놓여도, 그곳에서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끊임없이 버티고, 거주하고, 악착같이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수 많은 시험에 빠지기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신앙이 있을 때 고난이 닥쳐오면 힘들어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선하신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일들을 주셨는가. 하는 물음과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나오미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나오미는 오늘 본문 후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본인을 아프게 하셨다라는 것을 통해서 본인이 지금 아프다라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분에서 온 것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나오미에게도 이런 저런 소식을 듣게 하심으로 그냥 두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룻기 1: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이스라엘에 양식을 주셨다는 것을 듣게 하셨습니다. 양식을 주셨다는 것,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사사의 시대에도 멸망하지 않도록 다른 사사들을 통해 구원해 주셨고, 또 풍요롭게도 하셨습니다. 그들이 텅비게 되었던 것과 반대로 풍족하게 되도록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역시 고난도 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채우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채우심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들음으로 시작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하시고, 그 속에서 내가 먼저 변하고 상황을 바라볼 때,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라고 고백하게하십니다. 고난의 상황은 변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 가운데 우리 마음은 변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족시키시는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주님 주님 한분이면 내 삶이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도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께서는 풍요로움을 허락하셨습니다. 실제로 사사기에보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갈 때 우리 마음을 고치시고 그를 넘어서 우리 상황도 하나님께서 좋은 방향 하나님이 보실 때의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줄 믿습니다.
계속해서 볼 때, 나오미도 듣게 되었을 때 하나의 결심을 합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라는 결심을 합니다. 그렇게 살아내기 위해서 고난 가운데 역경 속에서 버티던 나오미가 이제 돌아가고자 결심하고 일어나 돌아가는 그 길에 서게 됩니다. 돌아간다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들었던 슈브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가던 방향에서 정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다시 가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회복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듣고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근데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을 들었습니다. 이 들음 이후에 나오미는 이제 돌아가야겠다! 라는 결심을 합니다. 이제 늙은 과부로서의 나오미, 그리고 그 아래 두 과부 며느리 밖에 없어서 실제로 사회적으로 아주 약자 중에 약자로 취급받을 수 밖에 없던 그 세명이서 돌아갈 준비를1. 하고 짐을 싸고 있습니다.
이 돌아옴은 은혜입니다. 먼저 돌아오게 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고난의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알고 있는 예레미야는 그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유대 민족에게 너희는 바벨론에 멸망당할테니 항복하라! 그러면 살고, 나중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라고 전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는 나라를 팔아먹는 선지자로 낙인 찍힐 수 있는 일이었고, 실제로 자신의 마음에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속에서 자신의 민족이 망할거라고 전해야하는 그 심령은 얼마나 처참했을까요? 그 속에서 예레미야는 지쳐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 못하겠어요. 하나님 저 왜 선지자로 부르셔서 이런 일을 하게 하시고 이런 이스라엘의 실상을 보게 하십니까! 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 15: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눈물의 선지자로 알고 있는 예레미야도 결국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왜 내게 이런 힘듦을 겪게 하십니까 라고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나에게로 돌아오라! 문제를 보지 말고 나를 좀 봐라, 너를 일으켜 세운 나를 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힘든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 고난의 문제가 커보이고 그 문제가 우리 눈 앞을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근데 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계십니다. 너는 나에게로 돌아오라! 라고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 나오미에게도 들리고 있습니다. 나오미에게 들리는 이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고난과 구원, 풍족을 반복해서 주시며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 나를 좀 바라보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오미의 삶에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를 부족함 없이 먹이시는 나에게로 돌아오라! 라고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잠깐 흔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언젠가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은혜를 베푸셔서 돌아올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근데, 그 과정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 저희 작은 누나입니다. 저희 집은 대학교가서부터는 본인 용돈도 벌었지만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세 남매 모두 대학가서부터 알바를 많이했어야 했습니다. 그 때 누나는 알바를 많이 구하지 못하다보니 주말에까지 알바를 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교회랑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교회를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나면 항상 자주는 못해도 언제한번 교회가야하지 않겠냐라고 제가 물음을 던지기도 합니다. 근데, 어느날 되어서 누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여유가 없어서 교회를 안가지만 내가 언젠가 교회로 돌아갈 것을 안다. 하나님이 계신것도 예수님께서 날 위해 죽으신 것도 아는데, 지금은 아직 생각은 안나는데 그리고 원래 다니던 교회를 가지는 못하는데 언젠가 돌아갈 거다. 이 말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누나에게도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힘겨운 우리 삶에서 끊임없이 간섭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삶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하나님의 곁에서 돌아서지만 끊임없이 하나님은 자신을 보도록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리도록 나 좀 봐줘라 나를 좀 바라봐줘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수요성령 집회 가운데 찾아오신 성도님들 하루 얼마나 치열하게 보내셨습니까? 열심히 살아내셨습니까? 그 삶에서도 우리가 항상 그렇진 않지만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도 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를 이 자리로 이끌어서 하나님을 보게하시는 분,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은헤로 우리를 이 자리로 이끄시고 계시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살아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이제 나오미가 풍요롭게 되는 길도 함께 예비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3. 풍요를 준비하시는 하나님
이제 7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서있습니다. 오늘 이후에 본문을 읽어보면 룻기 이지만 이 성경 본문에서 주인공은 나오미입니다. 텅 비어진 나오미의 삶,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의 삶이 채워지는 과정을 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미는 그 모든 것을 잃은 삶에서 책임질 수 없는 며느리들과 함께 있기에 그들에게 얘기합니다.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들은 돌아가서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될 것이고, 그들에게 책임을 질 수 없는데, 따라오게 되면 그들이 고생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알아서 각자의 땅으로 돌아가 각자 알아서 결혼을 새로해서 그 삶을 영위하라고 합니다.
이는 현실적인 조언입니다. 나오미가 돌아간다고 해도 그 두 며느리에게 그 뒤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롭게 그들의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미래를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들이 실제로 다 돌아가게 되었고, 그 상태에서 나오미 혼자 유대 땅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이 결말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룻이 함께 가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나오미가 며느리들에 대한 큰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이 있었따면 함께 가서 늙은 나를 조금 돌봐달라고 얘기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나오미의 가볍지 않은 인애를 알아야 합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두 며느리를 배려하는 나오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이 자신의 두 아들과 자신에게 보여준 그 인애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인애를 베풀어 주기 원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를 이은 두 며느리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며느리는 더 인애를 베풀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상황에서 나오미를 향해 당신을 혼자 보내기보다 함께 가서 헌신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먼저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입니다. 룻기에서 대표하는 단어는 인애가 있습니다. 이는 약속에 근거하는 사랑, 혹은 그저 사랑하는 마음에서 베풀어내는 희생을 얘기합니다. 이런 인애의 모습이 넘치는 이 길가 위에서의 대화는 서로가 서로를 향한 선택을 향해 인애를 베풀고 있습니다. 작은 선택 앞에 우리가 바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사이에서 우리가 서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애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내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해도 그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사랑, 그 안에서 우리는 교회다움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교회에서 부자에게 잘 대하고 초라한 자에게 잘 못대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 모습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랑을 베풀고, 그로 서로 희생하며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리고 우리에게 먼저 인애를 베풀어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저 우리를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인애를 베푸는 것도 돌아가는 길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 아래에서 우리는 인애를 통해 어떤 결과를 보았을까요?
나오미는 돌아가서 결국 혼자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두 며느리 중 한 며느리는 따라서 돌아가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룻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나오미를 향한 인애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통해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그 때에 나오미는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손이 치셔서 지금 자신이 기쁨의 상태가 아닌 쓰디 쓴 상태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오미의 회복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 도움의 손길로 룻을 붙여주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오미가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혼자 돌아오지 않고 룻을 데려오게 하신 것도 그렇게 이끄신 것도 나오미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짙은 어둠이 끼어있던 곳에서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룻과 나오미라는 자들의 인애 위에서 다윗이 태어나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은 이렇게 우리에게 나아갑니다. 사사기의 짙은 어둠에서 이스라엘이 벗어나지 못하자 하나님은 작은 곳에서부터 그를 극복해나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고 계십니다. 룻을 통해서 나오미의 텅 비어버린 삶을 풍요롭게 채워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냥 고난의 상태에 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 기간은 각기 상이하고 정도는 상이하지만 성도들이 고난 받을 때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오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그 고난을 넘어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룻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룻을 통해 나온 빛은 아까도 설명했던 영적으로 어두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됩니다. 이 한줄기 빛은 먼저는 개인인 나오미에게, 그리고 보아스를 통해 룻을 통해 다윗의 손자, 자녀가 태어나고, 그 앞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빛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부산성지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삶에서 수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언제가 되었든지 우리들이 수 많은 문제 앞에 설 때, 그리고 그 문제 앞에서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질문이 들 때에 그때에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 하나님 지금 제가 이런 문제를 안고 나아왔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그 하나님을 만남으로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고난 앞에 염려보다 하나님께 돌아갈 때 넘치는 은혜를 베푸실 하나님을 기억하며 나아가는 우리 부산 성지교회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찬양” - 주가 일 하시네
기도 : 인생에 많은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 모든 삶의 한 순간 순간 속에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달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