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두 제자(요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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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는 말씀이셨으나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셨다. 진짜 육체를 가지고 오신 것.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상처와 고난을 다 겪으시고 아신다.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단지 신의 전능성을 어떻게 드러내셨는가? 무엇을 하는 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내심. 고난당하심. 죄인을 위해 죽는 것으로 신의 전능성을 드러내심. 이것이 비밀. 이런 종교는 없다. 그래서 성경이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셨고 언약궤 영광 자체였고 진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질 것이다.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을 통해 증언이 시작. 요한이라는 사람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 이사야 40장에 심판이 끝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첫 구절에서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올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해서 다 죽이기로 정하지 않고 용서하시기로 작정한 하늘의 싸인이 바로 세례요한. 요한은 철저하게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메시지이기 때문.
그가 세례받으러 온 예수님을 봄.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봄. 심판의 시대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싸인을 봄.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이 분은 누구인가를 소개. 핵심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선포. 세상 죄를 없이하려고 걸어가는 아사셀 염소. 구약의 전가의 원리. 대속죄일에 염소 한 마리는 제물로 드리고 한 마리는 민족의 모든 죄를 다 전가시킨 다음 성 문 밖으로 끌고 나가 광야에 내 버려서 비참하게 죽게 함. 세상 죄를 다 뒤집어 쓰고 광야로 끌려나가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참한 염소.
예수님의 고통은 육신적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 죄가 없으신 분이 내 죄로 인해서 죄인으로 아사셀 염소로 죽는 고통. 그래서 성문 안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성문 밖인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심. 히브리서 13장에서 영문 밖에서 돌아가셨다고 기록함. 영문 밖, 성문 밖에서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
하나님의 어린양. 어린양은 유월절 어린양을 상징하는 것. 동시에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 창세기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기로 작정했을 때 이삭 대신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이 있었음. 이것은 하나님이 대신 죽기로 작정하신 사건. 인간이 준비한 양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속죄양. 유월절에서 구체화 예수님에게서 성취.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우주적 메시지.
이 빛 앞에 나간 사람들, 증인과 제자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이야기. 진짜 이분은 빛이고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35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에게 자신의 제자를 보내기로 작정했다는 말. 36절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가서 다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함. 제자를 내어주는 요한. 37절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듣는 순간 기대감이 생김.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메시아가 아닐까? 갔다라고 하지 않고 따른다는 것은 제자가 됨. 뒤를 따라감.
3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님이 돌아보면서 따라오는 이유를 물어보심. 내면의 중심을 뚫어 보시면서 말씀하심. “무엇을 구하느냐(찾고 있느냐)?” 그들이 왜 세례요한의 제자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율법을 깊이 공부하겠나? 진리를 찾기 위해. 제자들의 대답은 다소 엉뚱 “선생님은 어디 머물고 계십니까?” 찾아가 배우겠다는 의미.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도 엉뚱하게 대답. 와서 보라. “내게로 오라 그러면 너희들이 보게 될 것이다” 가서 하루를 온전히 함께 거함. 시간은 오후 4시. 우리에게 하는 말씀인 것 같다. “나에게 오면 너희는 보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이다”
ex 예수를 만난 아이. 빛 앞에 자신의 죄를 발견함. 어두운 방에 갇히면 생의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음. 빛이비추는 것을 발견하고 빛의 근원을 발견함. 예수를 찾은 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 빛을 발견하고 빛이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생애의 방향과 목적이 바뀜.
[메시아를 만난 사람들의 반응]
40절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제자들이 누구인가를 조심스럽게 말함. 한 사람은 안드레. 시몬 베드로의 동생. 또 한사람은 베일에 쌓인 인물인데 사도요한을 말하는 것이라 봄.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의 제자. 하루를 같이 있었는데 이들이 충격을 받았음. 진짜 메시아를 만났다! 무슨 대화를 했을까? 모르지만 다음 시간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는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음.
41절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메시아를 찾았다! 형에게 말함. 의심에서 확신으로. 지식에서 체험으로 바뀌는 순간. (합격자 발표) 42절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베드로를 데리고 옴. 예수께서 보시고. 이 말이 참 마음에 듦. <응시하다> <깊이 관찰하다>. 우리 주님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나님의 시간개념, 우리의 시간개념이 다르다. 직선적 시간개념과 통전적 개념.
베드로는 아버지가 등장 안함. 요한의 아들 시몬. 배와 부친을 버리고라는 말이 없음. 부모가 빨리 돌아가셨던 것 같음. 장모만 나옴. 1인 가장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베드로를 설명하는 방식이 이상한 표기방식. 요한을 따르는 두 사람중에 한사람이 안드레 이렇게 표현 안함.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시몬 베드로>라는 표기방식도 이상함. 당시 이름을 말할 때 <누구의 아들 누구> 또는 <지역에 사는 누구>라고 불렀음. <요한의 아들 안드레>라고 불렀어야 함. 그러나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로 표현. 그러니까 이 안드레라는 사람을 소개할 때부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 이 베드로를 한참 보는 것. 시선의 깊이.
삐죽거리고 서 있는 시몬에게 예수님이 이름을 바꾸어 줌.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생의 목적과 의미를 방향을 바꾸시겠다는 선언. 아브람, 아브라함, 사래는 사라, 야곱이 이스라엘. 바꿔주시는 이름이 무엇인가? 베드로(반석) 너를 나의 나라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으로 사용할 것이다. 베드로는 실패, 배신, 감추고 싶은 죄악된 모습도 많았고 다 알고 있었음. 그러나 다 아셨음. 예수님의 말씀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베드로는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에 귀하고 영광스럽게 쓰여질 사람으로 보심. 첫 시간 우리가 예수님의 이 눈빛을 묵상하고 확신 가운데 시작해야 함.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모르면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에 의해서 삶이 결정된다. 너무 가난한 사람은 돈으로 봄. 삶이 어그러짐. 학력이 짧은 사람은 열등감과 비교의식으로 스스로 삶을 무너뜨림. 우리 주님은 그렇게 안 본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스스로 비참하게 사는 것. 예수님의 시선이 오늘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알면 오늘 나의 상처도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시선의 샤워, 축복의 샤워로 시작하기 때문. 상처받은 치유자. 범죄자와 위로자의 차이. 예수님의 얼굴을 본 자가 상처를 극복. 신앙은 이 하나님의 눈빛을 매일 말씀을 통해 바라보는 것.
1]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찾아내심 –베드로와 안드레를 기다리고 계셨던 주님. 하나님은 불러내셔서 교제하기 원하시는 분. 와서 보라. 나도 이렇게 부르고 계신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된다. 제발 꾸미지 말라. 가면쓰지 말라. 가면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이 안보임. 뿌린 피와 흘린 피. 피가 뿌려지면 발견하고 제자가 됨. 제자로 변화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름을 새롭게 지어주심. ‘성도’
2]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심 “이름을 다시 지어주심”
부르시는 것은 변화시키려고 부르심. 사명을 발견하는 것. 열등감과 비교의식.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삶의 옵션도 아니다. 삶 자체다. 실제적인 것. 나 자신이 실제이듯이 하나님도 실제이고 믿음도 실제. 실제이기 때문에 믿으면 변화된다. 내 인격이 하나님에게 반응한다. 그 분은 실제이기 때문에. 나의 우울증. 나는 젊은 시절 목표는 하나 자살.
오늘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자녀들도 부르고 계신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고 이것을 구하라. 긴가민가? 종교 생활 습관처럼, 두려움으로, 그것 믿는거 아니다. 믿는 다는 것은 나의 삶과 행동의 방향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는 것이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
나를 찾는 자마다 나를 만날 것이라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올 한해를 일끌고 나갈 수 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