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어도 결정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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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8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중국 촉한의 정치가 제갈량이 사마의 세 부자를 죽이고자 호록곡에서 화공작전을 펼쳤는데, 마침 하늘에서 비가 내려 사마의 세부자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제갈량의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이라.“라고 탄식합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되고 안 되고는 하늘에 달려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성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던 제갈량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진리는 배워서 깨닫기도 하지만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잠언의 말씀은 인생을 보다 진지하게 살고자 하고, 자기 인생에 깊이를 더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르침이요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잠언 16장 1-9절의 말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몫의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1절)
1절 앞부분을 한번 보세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9절 앞부분도 보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종들처럼 우리의 능력에는 개인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차이중에는 후천적으로 훈련과 학습을 통해 생겨난 것도 있지만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남기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크게 관심이 없으십니다. 다만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책임감 있게 인생을 꾸며내느냐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경영한다.”라고 할 때, ‘경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마아르케’(מַעֲרָךְ)입니다. 어떤일을 할 때 면밀하게 검토하고, 계획을 신중하게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렁뚱땅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4장 28절 이하에 보면 망대 하나를 세우려 할 때도 자기가 가진 것으로 가능한지 먼저 않아서 그 비용을 계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전쟁을 치르고자 할 때도 능히 대적할 수 있는지 헤아려보고 불가능하다 싶으면 화친을 청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크다.”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다 믿고 무작정 달려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달란트를 정확히 헤아리고, 그것을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의도까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위대한 결실은 최선의 성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잘 알기에 이 땅에 머무는 내내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는 것을 기뻐하고 당연하게 여깁니다.(시 37:3) 하나님께서도 이런 성실한 자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십니다.(시 31:23)
2. 주님께서는 성실하게 살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3절)
우리 인생은 수학 공식처럼 늘 맞아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할 자가 어려움에 빠지는가 하면, 벌을 받아 벌써 망했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구심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입에서는 불평과 원망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항변을 한마디로 일축해버립니다. 본문 2절을 봅시다. “사람으 ㅣ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사람들은 주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스스로도 자신이 잘한 것, 자랑하고 싶은 것, 남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만 오래 기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루호트’(רוּח֣ו), 곧 ‘심령’을 ‘웨토켄’(8 וְ9 תֹכֵ֖ן) 곧 ‘감찰’하십니다. 이 웨토켄이라는 단어에는 ‘감찰하다’라는 의미 외에도 ‘평가하다’, ‘무게를 재다’, ‘조사하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우리를 달면 우리에게 내려질 평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왕이 연회를 베풀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그릇을 가져다가 술잔으로 삼아 먹고 마실 때 갑자기 손 하나가 나타나 벽에 쓴 글씨,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고,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함량 미달이었다는 뜻 아닙니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도 이와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왜 하필이면 나냐고,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게 뭐냐고 감히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직면한 고난의 상황이 내 편에서는 억울할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다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것은 오직 자비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았든 그에 대한 평가, 채점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지레짐작해서 몇 점이라도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맡긴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돌을 굴려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굴린 돌을 나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습니다. 어디로 얼마나 굴러갈지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에서 나는 배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만에 하나라도 내 주장을 펴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평가를 거부하고 상대평가를 고집하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자비로 나를 덮어주옵소서.”라는 말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쁙 ㅔ해드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7절)
예레미야 29:11에서 하나님은 이런 선언을 하십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이런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을진대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으 ㅣ기쁨이 되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 이름을 높일 뿐만 아ㅣㄴ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그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기를 바랄 때, 우리의 내적 신앙은 자연스레 외적 행위, 곧 인자와 진리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또 하나의 비결은 공의에 근거한 경제활동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로 볼 수 없다.”라는 말한 바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돈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돈이 우리 삶에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고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을 멀리하고 종래에는 그 모양까지 버리게 되는 것과 물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 두가지는 일평생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또한 내 마음속에 여전히 똬리를 튼채 자리를 잡은 물욕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이득을 탐하라는 유혹에 흔들리기 일쑤입니다.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또 모든 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샬롬’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야 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의 ‘샬롬’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라는 분명한 자기 선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에서 ‘진인사’에 비중을 두고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천명’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삼정법사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 인간 중 그 누구도 만군의 여호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찬양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