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열심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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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35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
찬송가 435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2022년의 마지막 날
2022년의 마지막 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2년의 마지막 날 새벽을 맞았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다들 어떠셨습니까? 평안하시고 행복하셨습니까? 우리가 지나온 모든 세월이 그랬듯 2022년도 참 다사다난한 해였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던 해였던 만큼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겠습니까? 한두시간 나누어서는 절대 끝내지 못할 수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위해 새벽을 함께 깨워오신 우리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들께 한 해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다고 서로 인사 한 번 나누시지요.
연말이 되면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나 다 으레 하나님 앞에서 하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발견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한가지구요, 마찬가지로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근심케 해드린 것은 없는지 발견하여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 또 다른 한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기 딱 적당한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도 적당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썩 유쾌하고 달가운 말씀으로 들려오지는 않겠지만, 이 새벽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정직하게 우리의 삶을 돌아봄으로써 2023년을 깨끗한 마음과 심령으로 맞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요한3서에는 모두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1절부터 8절까지 언급되는 가이오가 첫번째로 등장하구요, 9절부터 10절까지 언급되는 디오드레베가 두번째로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12절에 언급되는 데메드리오가 등장을 하지요. 이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는 어떤 사람으로 소개됩니까?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는 요한3서에서 각각 사도 요한에게 칭찬을 받는자, 비난을 받는자, 인정을 받는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제 함께 나누셨겠지만 가이오가 왜 사도 요한에게 칭찬을 받았는지 잠시 기억해봅시다. 그가 무엇 때문에 사도 요한에게 칭찬을 받았습니까? 그는 진리 안에서 행하였기에 즉, 사도 요한이 가르친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다니는 순회 사역자들을 환대하였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의 일에 함께 협력하는 바가 된다고까지 말하였지요. 가이오는 요한을 통해서 파송을 받은 순회 사역자들을 잘 섬기는 것으로 주님의 일에 힘껏 함께 협력하였던 자였고, 이러한 가이오의 선행이 요한에게까지 알려져서 크게 칭찬을 받게 된 것이었지요.
이렇게 칭찬을 받는 가이오에 비해 상당히 날카로운 비난을 받는 자가 이어서 등장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를 향해 이렇게까지 말하지요. 10절입니다. 요삼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은 조금 더 강한 뉘앙스로 번역을 해야 지금 요한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파악이 됩니다. 요한은 지금 그저 그가 행한 일을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결코 가만히 두지 않을거야”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사랑의 사도인 요한에게까지 이런 말을 듣는 것일까요?
요삼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사도 요한에 대한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본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유대 지역에서 생활하다가 바울의 뒤를 이어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을 무렵 에베소로 이주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순교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디모데 또한 순교를 하게 되어 사도 요한이 이 에베소 교회를 맡게 되었지요. 이때가 대략 67년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략 20년 쯤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지역을 섬기다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박해가 극에 달했을 무렵 요한 또한 붙잡혀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쯤 지나 황제가 죽고 나서 박해가 잠시 수그러들자 다시 이 에베소 교회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제 그의 나이는 최소 85세가 넘는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열두 사도 중 최후의 생존자,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함께 생활하며 그 생생한 기억을 전할 수 있는 최후의 1인이었으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겠으며,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겠습니까? 백발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서기관에게 한글자 한글자 교훈을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쓰여져 보내진 편지들 중에 일부가 요한 1, 2, 3서입니다.
그런데 9절을 자세히 살펴보니 요한 1, 2, 3서 외에 또 다른 편지가 한 교회로 붙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맡고 있는 교회였지요. 놀랍게도 존경받는 최후의 사도에게서 온 편지는 그 교회에서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디오드레베가 그 편지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아마도 요한 3서의 내용과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 파송을 받은 순회 사역자들을 잘 영접해주기를 부탁하는 내용이었겠지요.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모두가 다 그렇게 해야하지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전도하러 둘씩 짝지어서 마을들로 보내실 때에 사람들이 제자들을 영접하여 섬길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눅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바울 또한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교훈하였습니다. 고전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런데 놀랍게도 디오드레베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10절을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요삼 10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디오드레베가 무슨 이유를 갖다 붙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아 파송을 받은 순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들에게 가당치도 않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사도 요한과 그의 편지를 전한 그의 제자를 싸잡아 비방하였고,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다가 따뜻한 환대를 기대하며 교회를 방문한 순회 사역자들을 매정하게 쫓아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래도 순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 여겨 자신의 집을 내어주려 했던 사람들을 교회에서 출교시키기 까지 하였지요. 이렇게 사람들을 가르치고 금지령을 내리고 출교까지 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디오드레베는 교회의 목회자나 장로 정도 되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꽤나 열심히 하여 나름 교회 안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려 사도 요한의 교훈을 거슬러 비방하고 금지하였음에도 그를 따랐겠지요.
도대체 그는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요? 9절에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답을 주는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9절을 우리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삼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이 지금 디오드레베가 어떤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맡은 교회 안에서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자신이기를 바랬던 사람이었고,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자신이기를 바랬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으뜸되기를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가 이토록 으뜸이 되기를 바랬기에 열두 사도 중 하나였던 요한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교회 안에서는 자신보다 더 영향력을 끼치고 존경받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자신보다 더 영향력을 끼치고 더 존경받음으로서 자신보다 더 으뜸가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그의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자마자 요한과 그 제자를 싸잡아 비방한 것입니다. 그의 교훈을 거슬러 순회 사역자들을 매정하게 내쫓고 그들을 영접하지 말라 금지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저 자신이 으뜸이 되고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교훈을 거스르기 위해 어떤 변명을 늘어놓았을까요? 순회 사역자들의 도덕성을 흠잡았을까요? 아니면 순회 사역자들보다는 지역의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하였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순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일이 교회의 규모에 비해 너무 과분하다고 하였을까요? 변명과 이유야 만들어내려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보여준 그의 열심과 그가 자리하고 있는 지위가 더해지니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렸겠지요. 이 일은 결코 작은 잘못이 아닙니다. 늘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사랑의 사도 요한이 “내가 가서 결코 가만히 두지 않을거야”라고 말할 만큼 심각한 죄였지요. 이것은 단순히 디오드레베라는 개인에게가 아니라 온 교회를 향해 두 가지 점에서 큰 죄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온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나 죄를 범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가 그럴듯하게 둘러대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아 파송을 받은 순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기에, 사람들은 모두가 사랑으로 영접했어야 할 주님의 일꾼들을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한 식사를 해결하고 따뜻하고 편한 잠자리에서 푹 회복하는 것이 마땅히 그들이 누릴 몫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디오드레베의 탐욕에 젖은 가르침 때문에 온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작은 실수이며 작은 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세우신 교회를 그저 사람들의 모임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첫째보다 이것이 훨씬 더 중한 죄입니다. 디오드레베는 그간 열심히 교회의 일을 맡아 하였으나 교회가 무엇인지 결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도 요한의 영향을 받고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결코 요한이라는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 그를 친히 제자로 부르셨고, 당신의 말씀을 맡기셨으며, 최후까지 생존하여 그 말씀을 생생하게 전하도록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 주님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듣고 주님의 말씀을 전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영향력이 있었고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서 사람들은 누구의 영향을 받고 누구를 존경하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바꾸어서 물어볼까요? 교회의 머리요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요한입니까 예수이십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디오드레베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영향을 줄 수 있고, 자신이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열심은 자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향을 끼치시고 존경을 받으시도록 종이요 통로로 쓰임받기 위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자신이 영향을 끼치고 자신이 존경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교회의 머리요 주인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지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마침내 주님보다 자신을 더 앞세우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순간 교회는 더 이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요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신데 그것이 어찌 주님의 교회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그저 디오드레베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모임은 아무리 잘해봐야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곳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숨결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디오드레베가 결코 열심이 없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열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의 문제입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한 번 돌아봅시다. 누구를 위한 열심이었습니까? “우리 각자의 삶은 물론이요 우리 교회의 머리요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하며 고백하면서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을 위해 열심을 내어 살아오지는 않았던가요? 적당한 변명과 이유를 대가며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또 서로가 그런 욕망을 눈감아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람들의 모임으로 변질시켜 온 것은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되돌아보라고 엄중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대하며 살아왔는지 아니면 실상은 내가 주인되어 살아왔는지 돌아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1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삼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악을 행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의 삶에는 또 그런 자들이 모인 사람들의 모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숨결이 머물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대하며 살아가는 자의 삶에, 또 그런 자들이 모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숨결이 머뭅니다.
2022년 마지막 하루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2022년을 악을 행하는 자로서 마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선을 행하는 자로 마치시겠습니까? 사람들의 모임으로 마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마치시겠습니까?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 돌이켜 회개함으로 우리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그래서 깨끗한 심령으로 2023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와 신성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