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는 (요21: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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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1월 1일 주일 청년부
제목 : 올해 우리는
본문 : 요한복음 21장 15-25절 *신185
결단찬양 :
[도입]
2023년의 청년부는 어떤 목적과 어떤 목표를 두면 좋을까? 를 고민하는 시간들을 최근 보냈습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특별히 ‘어떤 일을 해야지’ 하는 세부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몇몇 단어들이 제 마음에 피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생기’ 였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좋은 성적, 더 높은 성적을 요구합니다. 분명 과거에 비해 만족스러울만한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거봐, 할 수 있자나. 다음에는 더 잘 해보자.’ 칭찬과 축복보다는 책망과 욕심이 주어집니다.
학업에만 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실적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적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 해야 합니다. 그런 생활들이 계속 이어져 가고 또 앞으로는 얼마나 더 심각한 사태가 도래될 지 걱정이 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침을 알고 계십니까? 이런 스트레스로 인해 교회를 떠나야 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무려 45%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비일비재한 시점에 코로나는 너무나 적절한 사유였습니다. 교회를 떠나기에 말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정말 많은 이들이 떠났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끌벅적 했던 교회는 냉기가 가득했습니다. 신천지 out 포스터만 붙여져 있던 교회 문 앞에는, 코로나로 현장예배를 중단한다는 포스터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잠깐의 일처럼 여겼습니다. 곧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겨울 수련회 정도는 갈 수 없게 되었지만, 여름 수련회는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름이 되어도 상황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겨울보다 더 좋지 못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나마 남아 있던 생기를 온전히 잃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의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많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나름 효과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우리는 과거의 생기를 끄집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벌써 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코로나 시대를 맞이한지 횟수로 4년차가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극심할 때에 비해 지금은 어느 정도의 온기는 찾았지만, 생기를 찾았다 말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의 청년부는 ‘생기 돋는 청년부’를 만들자 다짐했습니다. 조금 더 역동적이고, 조금 더 활동적이고,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을 통해 ‘어게인 1907년’이 아니라 ‘어게인 2019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생기 있는 청년부를 만들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생기 돋게 할 것인가? 이를 함께 나누며 오늘의 은혜를 구해보려 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입니다.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복숭아 나무 밑에서 소를 잡아 먹고 또 술을 마시며 ‘우리는 다 다른 날에 태어 났으나, 같은 날 죽자!’ 선포한 사건을, 도원결의라 부릅니다.
이들이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눈 앞에 드러난 물질이나 매개체가 존재해서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의리를 가지고 이들은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의리가 이들을 죽는 순간 까지도 하나되도록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다짐과 결심은 100%의 온전함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도원결의를 통해 다짐한 것은 ‘같은 날 죽자’ 였으나, 이들은 끝내 다 다른 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결심과 다짐에는 늘 한계가 존재합니다. 친구 관계에서도, 직장내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다짐과 생각은 늘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공동체도 인간의 결단과 결심에 그치는 공동체가 된다면 보기에는 좋아보일 수 있으나 오래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신선한 음식과 과일이라 할지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보관되지 않으면, 그저 겉보기에 좋은 음식에 불과하듯, 우리의 공동체도 인간의 그럴싸한 방식과 방법으로 형성되고 결속되어 진다면 보기 좋은 공동체로 그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우리는 보기에만 좋은 공동체가 아니라 더 나아가 내부적으로도 단단하고 튼튼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 공동체를 단단하고 튼튼한, 그리고 생기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가겠습니까?
[역지사지 :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메세지가 주로 등장하는 본문으로 많이들 접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단순히 사랑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사랑 외에도 수 많은 것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우리는 올해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내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내 자신을 죽이라는 것이 단순히 살인 뭐 이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중심이 되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 선한가 꺼내보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 철저히 자기 자신을 죽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중간을 보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질문 하십니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굳이 ‘이 사람들보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 있어 학자들이 여러 소견을 내었는데, 그 중 세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 하려 합니다. 먼저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 는 것입니다. 즉 ‘저들보다 너가 날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냐?’ 라는 것이지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와 같은 조금은 유치한 질문일 수 있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베드로에게 이들보다 더 큰 사랑을 내게 보이는가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의 질문인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소견은 이렇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너가 저 친구들을 많이 좋아하는 걸 안다. 그런데, 너가 저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 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예수님의 질투와 같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소견이 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와 같은 흐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소견은 앞서 두 소견과는 조금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을 지칭하며 해석을 했지만, 세 번째는 조금 다릅니다. 세 번째는, ‘네가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 라는 것인데, 이는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또는 일들과 같은 것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 라는 식의 물음이었던 것이지요.
왜 이렇게 학자들이 해석했는가 보니, ‘이 것들보다'가 남성형 단어로 쓰임과 동시에 중성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단순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이 아니라, 베드로가 본업으로 가지고 있던 어업, 인생의 전부라 여겼던 어업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 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어떤 해석이 오늘 본문과 가장 일맥상통한다 여기십니까? 저는 당연 첫 번째의 해석이 다음 문장과 또 이런 표현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의도와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얘네보다 너가’, ‘쟤네보다 내가’ 와 같은 비교 표현을 가장 잘 활용한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지난 행실을 보면, 얼마나 자기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왔는가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과 35절을 보면, 베드로의 이런 과거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또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늘 ‘쟤네보다 제가 낫지 않습니까?’ 하고, 늘 자기를 높이던 자였습니다. ‘주님, 쟤네는 주님을 버리겠죠. 근데 전 아니에요. 전 주님 옆에 늘 있을건데요? 전 쟤네랑 달라요!’ 라고 말하던 자가 바로 베드로 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향해, 베드로가 가장 선호하는 화법을 가지고 예수님이 질문 하는 겁니다. ‘쟤네보다 너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에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근심’합니다. 왜 근심합니까? 예수님이 분명 지난 날의 나의 모든 연약함을 보셨고, 또 내가 배반하는 과정을 다 겪으셨는데, 왜 계속 나를 향해 사랑하냐 묻는가? 에 대한 의문이 베드로를 근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 제 모든 것을 아시자나요. 제가 예수님 앞에 어떤 짓을 했는지, 또 어떤 말들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자나요.’
베드로는 근심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난 날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우월감에 빠져 있던 베드로를, 스스로 내려놓게 하시며, 앞으로의 삶에 비교가 아닌, 내 중심이 아닌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공동체가 내가 아닌 예수가 채워지는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올 두 가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로 채워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날 제가 여러분들에게 고백했던 내용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귀한 이유는 사역을 해서 귀한게 아니라, 여러분 존재 자체가 가장 귀하다는 사실에는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사역으로 섬김에 있어 예수가 주는 기쁨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내려놓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없는, 기쁨이 없는 사역은 사역이 아닌 비지니스에 불과합니다. 또 내 의와 욕심이 높아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마음의 중심을 재빨리 바꾸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내가 아닌 예수로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껏 나 잘난 맛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나는 깨졌고,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로 살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남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를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만드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가 인도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온전히 예수가 인도하시도록 말입니다.
[아가페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두 번째로, 우리 공동체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다니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 중 하나 일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나 쉬운 과정 같지만, 막상 우리 앞에 원수와 같은 자들을 마주하게 될 때 어떻습니까? 용서가 됩니까? 이해가 되고 사랑이 됩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원수와 같은 자들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날 나누었던 빌레몬 스토리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등처먹은 오네시모를, 또 로마에서 큰 범죄로 감옥에 갇히게 된 오네시모를 품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멘토 사도 바울의 제안과 선처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품고 용서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레몬은 어떤 결단을 내립니까? 오네시모를 품습니다. 노예 오네시모를, 죄인 오네시모를 제자 오네시모로, 복음 전도자 오네시모로 품습니다. 이때 빌레몬에게 어떤 요소가 작용합니까? 이때 작용한 것이 바로 사랑아닙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길래 사랑이 하필 그 순간 작용합니까? 빌레몬서 7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고, 또 훈련된 자가 바로 빌레몬 입니다. 빌레몬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살아갔기에, 그 사랑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이어지도록 힘썼습니다. 또 실천했습니다.
베드로 또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경험한 자였습니다. 다만 그 사랑보다 세상이 주는 위협의 두려움이 조금 더 베드로를 억압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지요.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무려 3번을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3번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진짜 사랑을 알았고 배웠고 또 느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주님 앞에 몹쓸 짓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또 주님도 잘 아심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느냐?’ 되물어 주시며,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주님 앞에 다시금 사랑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공동체에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단어적 사랑이 아닌, 형식적 사랑이 아닌,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교회 오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조사했을 때, 60%를 넘는 수치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그러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과정에 수가 틀리면, 타 종교로 넘어가 평안을 찾는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꼭 교회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있어서 ‘사랑’을 어떻게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교회 오는 것마저도 내가 기준이 되는 이 시대에, 말로는 사랑, 사랑 떠들지만 정말 사랑이 존재 하지 않는 것이 오늘 날 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진정,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올 한해, 우리 공동체에는 사랑이 가득했으면 합니다. 이해와 용서와 자비가 가득한 마음이, 또 실천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믿음 : 하나님은 실수가 없다는 절대적 신뢰]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 공동체 안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져 있고, 해석 또한 다양하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절대적 신뢰를 의미합니다.
먼저 신뢰해야할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99%의 믿음과 1%의 의심은 믿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100%의 믿음이어야 진짜 믿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지만, 두려움 앞에 자신의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즉 100%의 믿음이 그 안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그렇게 예수를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단이 오늘 본문에 이렇게 등장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18절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러자 베드로가 어떻게 결단합니까? 19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본문은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그가 발걸음하게 될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죽음이 기다리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다보면 걷고 싶지 아니한 길이 분명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늘 그런 길로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거부와 거절, 그리고 불평과 불만, 짜증과 분노가 우리의 반응 아닙니까?
왜 우리의 반응이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 길이 고난이고 고생이라는 모습이 눈 앞에 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눈 앞에 드리워지는데 과연 누가 긍정적으로, 좋다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상황 속으로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온전히 신뢰했고 또 믿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바로 주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니,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나아간 베드로, 그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행복한 모습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다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유력한 주장으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른 결과가 처참한 모습으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주님을 향한 믿음에 변치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세비우스라는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됩니다. 로마에서 아내와 함께 체포가 되는데, 죽어가는 아내를 향해 로마 군사들은 ‘예수를 부인하면 놓아주겠다’ 회유했으나,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여! 주님을 기억하시오!’ 그러며 아내에게 순교의 아름다움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죽고 베드로의 차례가 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나는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릴 자격이 없소!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주시오!’ 라고 말한 후 거꾸로 매달린 채 손을 들고 주를 찬양하며 마지막 생명을 주님 앞에 드렸다는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변화는 너무나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던 자가,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향한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진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것들의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에게 자기를 내려놓는 고백의 순간이 있었고, 그 빈 자리를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 채웠고, 그 결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변치 않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결론]
저는 올 한 해 우리 청년부의 1년이 이런 발자취가 되길 소망합니다. 나는 내려놓고 예수의 사랑이 채워져 가는 청년 공동체. 그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청년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올 한해 주님께서 이끄시는 우리 되게 하소서, 내가 아닌 주님의 뜻대로
주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우리 공동체를 사랑하게 하소서
주를 향한 믿음과 서로를 향한 변치 않는 믿음을 지니게 하소서
한 해 주께서 이끄시는 청년부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하심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겠노라 다짐하는 이들과
사랑과 믿음으로 올해를 채워가겠노라 결단하는 자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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