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중심 이동 : '나'에서 '너'

요한일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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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1. 죄의 특성 : 자기 중심성

죄는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죄의 시작.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유일한 선악과를 자기의 삶을 위해서 범한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바꾸어줄 것(하나님과같이 되는 것)을 보장해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불러왔으며, 지금까지 우리까지 자기 중심성은 우리에게 죄성으로 남아있다.

2. 자기 중심성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일반은총)으로 인하여 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과같은 사랑은 불가능해졌다.
인간은 자기 중심성이라는 죄가 가미된 사랑을 한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사랑의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이러한 사랑이 당연하고 옳고 합리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3. 자기 중심성의 사랑의 한계

자기 중심적 사랑은 상당히 적당하고 괜찮아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자기 중심적 사랑은 오히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내가 해준만큼 돌려받아야 한다는 give and take 방식의 사랑이 자기 중심적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의 방식은 결국 기대한만큼 돌아오지 않았을 때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하 된다.
주는 것은 주는 사람의 마음만큼 준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해 상처를 주는 것은 사실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일 것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1. 구원받은 자의 모습은 “형제 사랑”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아벨과같이 어떻게보면 억울한 처우에 놓이기도 한다.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본문은 “형제 사랑”할 것을 말하고 있다.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형제 사랑은 “구원 확신의 중요 조건”이다. 모든 행위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들에게는 선한 행위가 따르게 된다. 그 구원받은 자들의 선한 행위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형제 사랑”이다. (14절)

2.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형제 사랑할 것을 말한 직후 곧바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죄”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가르치고 있다.
마태복음 5:21–22 NKRV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변증적 요소
현대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주장하는 ‘남에게 피해만 안주면 되지’라는 말은 성경적 가치관에 충돌한다.
미워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 vs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는 것
사실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미워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마음에 해가 된다.

3. 형제 사랑의 당위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16절)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 사랑의 당위성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으시기까지 먼저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형제를 서로 사랑해야만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형제 사랑의 당위성이라면 형제 사랑의 범위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같이 타협 가능한 수준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닌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하는 사랑이다.

3.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1. 사랑은 “행함”과 “진리(진실함)”로 해야 한다.(18절)

사랑은 “행동”이 있어야 한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행함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또한 사랑은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 여기서 진실함은 “진리”를 의미하는 알레떼이아를 사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사랑을 행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끄럼 없는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상태입니다. 자기애는 타고난 요소입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것은 (의지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잘되길 원하는 것을 자기애라고 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남을 단순히 좋아하거나 애정을 가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의 기독교적 법칙은 남이 잘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법칙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곧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 말입니다."
-C.S.루이스
C.S루이스가 말한 “의지”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행함”과 “진리”로 하는 사랑이다.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충동적인 감정으로 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행함”과 “진리”로 하는 사랑은 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는 상태로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상태로 자신을 만들고 행동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사랑을 하게 된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동적인 감정적 사랑이었다면 그는 결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왜일까? 충동적인 사랑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며,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든다. 그 사그라드는 감정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포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죽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는 상태로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죄인들을 위하여 죽음의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었던 것은 “의지”를 가지고 한 사랑의 “행함”이었다.

2. 형제 사랑함은 억울함, 손해가 아니다. (19~22절)

형제 사랑함은 ‘희생’이 필수적이다. 손해와 억울함을 받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즉 13절의 세상으로부터 받는 미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본문은 그 사랑을 행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을 얻고, “구하는 바”를 주시며, “기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희생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1)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그의 지위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었다. 그의 명예는 이 세상 어떤 명예보다 높은 명예였다.
2)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었다. 그에게는 그가 가진 완벽한 성품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을 소유한 소유권이 있었다. 그것들을 희생하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3) 죽지 않아야만 하는 권리를 포기하셨다. 그는 죽지 않아야 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은 적이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그 언제나 존재하셨던, 세상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시간의 지배 안에서 죽음을 경험하신다.
생각해보면 이것들이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들 아닌가? 인간이 불완전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포기했던 것들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이다. 지위와 명예, 모든 것들의 소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인간은 이것들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들을 포기하고 희생하셔서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우리를 사랑하셔서 희생하셨을 때, 그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소유와 지위와 명예와 영원히 사는 것을 완벽하게 회복하셨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셔서 그 모든 권리를 다시 완벽하게 찾아오셨다. 부활로 인하여 그것이 완벽히 가능해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의 죽으심과 희생의 길 뿐만 아니라 부활과 모든 것의 회복의 길을 함께 걸어갈 운명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완전히 회복시킨 모든 것들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 함께 나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권리를 얻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사랑과 희생을 위해 살아간다. 그 사랑과 희생의 길을 걸을 때 예수님이 친히 그 모든 것을 완벽히 보증하신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I gave up everything for Christ, and what i have found? I have found everything in christ.”
“내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포기하였을 때 내가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이 희생의 길일지라도 이것이 억울하고 손해로 생각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길을 따를 때 모든 것들을 보장하고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을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회복이 보증되기 때문이다.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을 걷는다.
그것은 형제 사랑의 길이다.
마땅히 걸어야하는 이유도 충분하다.
또한 그것이 결코 손해와 억울함의 길도 아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의 길을 따라야만 하며,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난 주 자율 목장 모임을 진행하면서 계속해서 이 말을 반복했었다.
정말 힘들겠지만 희생해야합니다. 정말 어려운건 이해하지만 희생해야합니다. 저도 잘 못하지만 희생해야합니다.
정말 힘든 길이 맞다.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우리는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 얼마나 가치있고, 마땅히 행해야 하고, 모든 것을 보장하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죄성은 그것을 못걷게 만든다. 왜냐하면 죄성은 당장 우리를 눈 앞에 보이는 우리의 유익에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영원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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