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며(고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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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있으십니까? 어릴 적 제 마음을 울렸던 표어가 있습니다. 혹시 이런 표어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아마도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열심히 전한 모습과 자신의 소유를 팔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등 헌신적이고 멋진 모습들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나온 표어였던 것 같습니다. 본문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초대교회는 이상적인 교회였을까? 함께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배경설명
배경설명
오늘 본문은 바울서신이라고 분류됩니다. 말 그대로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여러분, 편지 써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보통 편지는 언제 쓰십니까? 아무 때나 쓰게 되나요, 특정한 상황과 감정들이 올라올 때에 쓰게 되나요? 그렇습니다. 편지는 받는 사람에게 할 말이 있거나 어떤 감정이 있을 때에 쓰는 글입니다. 바울서신은 바울이라는 사람이 교회나 어떤 사람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갈 수 없는 곳들에 있어서 편지를 통해 심방했고 또 목회했습니다. 고린도전, 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쓴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는 무려 두 개나 되는 항구를 가진 항구도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 항구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항구도시에는 대부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었으며 다양한 종교와 문화들도 섞여있었습니다. 고린도도 그러한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항구도시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서 수많은 종교들이 있었고 사치와 부패 그리고 성적인 방종이 만연한 분위기였습니다. 얼마나 심했으면, 사치스럽고 방탕한 자들을 가리켜 고린도인같다라고 표현하는 관용어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고린도의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에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 소스데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고린도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중에는 헬라인도 있었고 유대인도 있었으며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1년 6개월가량을 고린도에서 머물면서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계속해서 선교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머물러있을 때에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있다는 소식 말입니다. 그 문제는 분열, 근친상간, 법정소송, 성적인 부도덕, 결혼, 신학적인 오류, 우상숭배, 영적인 교만 등이었습니다.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교회를 잠시 비운 동안 교회에 이러한 문제들이 생겼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바울이 편지를 쓰기로 한 이유가 이렇습니다.
강해
강해
편지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보통 인사말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본론 부분이 있고 끝인사가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도 그렇습니다. 바울의 편지의 구성은 서두에 인사말과 함께 감사단락이라는 독특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감사단락의 역할은 수신자들을 격려하는 역할과 또한 본론에서 할 말들에 대한 요약입니다. 그리고 본론 이후에 끝인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부분은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1절을 함께 읽습니다. 두 가지 표현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라는 표현이고 두 번째 표현은 소스데네입니다.
바울서신 안에서 바울은 ‘사도’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쓰지 않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바울이 편지를 하는 목적과 편지를 전하는 자들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빌립보서나 데살로니가서 같은 경우에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신자들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로마서나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 등의 서신서에서는 확실하게 자신을 ‘사도’라고 명시합니다. 이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로마서에서는 자신이 직접 로마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성을 알리기 위해 사도라는 표현을 썼음을 알 수 있으며 고린도전, 후서나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도성에 대해서 의심을 받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망하기는, 우리 교회에는 교역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직접 인정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신뢰로 세워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소스데네라는 공동발신인도 바울의 의도가 있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함께 고린도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 대신에 회당장 소스데네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소스데네는 그리스보를 이은 고린도의 회당장이었으며 그 지역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주를 위해 법정 앞에서 매를 맞은 사람으로 고린도교회에게 있어서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인으로 서술하면서 수신자들인 고린도교회에게 공신력과 설득력을 높인 것입니다. 1절만 살펴보아도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절과 3절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는 앞서 말했다시피 분열, 성적인 문제들, 법적인 분쟁과 부도덕, 잘못된 신학과 우상숭배, 교만 심지어는 교역자에 대한 권위에 대한 불신 등 문제란 문제는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철학과 표적을 구하는 헬라주의와 유대주의가 혼합되어 있었고 재정이 풍족함에서 나오는 우월의식이 고린도교회를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주권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를 목회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문제가 가득했던 초대교회로 돌아가라고 하시면 돌아가시겠습니까?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본받는 것 외에 초대교회와 지금 교회는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해 보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만약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라면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부르시겠습니까?
바울은 놀랍게도,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각처에서 우리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권위에 의심을 품고 도전하는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였다면 고린도교회를 향해 저렇게 멋진 표현들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듣고서도 저런 표현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울이 사용한 표현들에 주목하면 알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행실과 문제들로만 본다면 고린도교회는 결코 거룩하다고 볼 수 없으며 성도라고 불리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하나님 안에 있는 ‘고린도교회’라는 표현보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고린도교회보다는 하나님을 강조함으로 교회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에 대한 강조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사람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에 이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많은 문제를 품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의인이요 성도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만 거룩한 삶에는 이르지 못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들을 언급합니다. 당시에 고린도교회는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그리스, 로마지역에는 고린도 교회 외에도 많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언급함으로서 고린도 교회가 특별하거나 영적으로 위대한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교회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교회에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함으로 인사말을 마치고 있습니다.
적용
적용
고린도교회를 통하여 교회가 겪는 문제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겪는 갈등과 문제들의 대부분이 우리가 주인이 되고자 할 때에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을 보며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습니다. 어떻게 고린도교회같은 교회가 있을 수 있나! 그런데 제 삶을 돌아보니 제 삶 또한 고린도교회를 향해 분노할만큼 깨끗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제 삶 또한 교회라고 불리기에는, 거룩한 성도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저 또한 죄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은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듯,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주셨음으로 가능케 됨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는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의가 이 모든 것을 가능케합니다.
2023년 우리는 더욱 큰 일을 행하는 해를 맞이합니다. 여러분, 그 큰 일은 무슨 일입니까? 사업이 잘 되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더욱 확장되고 집의 평수가 더욱 커지는 일입니까? 물론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일들도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큰 일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의 말씀에 그 큰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큰 일이 되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새해 첫 금요예배 설교를 맡아서 참 무겁고 어려운 마음이지만, 그 큰 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에 대해 저는 이렇게 선포하고 싶습니다. 먼저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선포하면 어떨까요? ‘나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나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옆 사람에게도 같은 말로 선포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당신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교회요 또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도가 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평강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과 큰 기쁨이 되는 놀라운 큰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 일들을 기대하십니까? 아멘.
강해
강해
이어 4절부터 9절까지는 바울서신의 특징인 감사단락이 등장합니다. 감사단락은 어떤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까? 격려와 칭찬 그리고 권면을 통한 목회의 역할과 앞으로 펼칠 본론에 대한 준비의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교회에 대해 감사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감사합니다. 심지어 항상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감사단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사단락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3번,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6번, ~하리라 라는 수동태가 4번이나 등장합니다. 바울의 감사단락에는 온통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이 하시고 하실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감사단락을 살펴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었습니다.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감사단락에서 바울의 불편한 심정을 엿볼 수 있는데, 다른 서신서들의 감사단락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짧으며 기도와 간구한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편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이 편지의 서두를 읽고 많은 것들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은사, 모든 언변과 지식, 그리스도의 증거, 예수님의 나타나심, 책망할 것이 없는 자 등의 표현은 고린도교회의 삶과 정 반대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울은 편지에서 말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의지하고 철학과 부, 교만함과 부도덕을 행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사실 어떤 삶이 옳은 삶인지 스스로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지만 삶에서 그 증거를 보이지 못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편지합니다. 하나님의 미쁘심, 신실하심이 고린도교회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적용
적용
여러분, 봄이 되면 가장 관심을 받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벚꽃나무입니다. 그런데 봄이 지나면 벚꽃나무는 우리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벚꽃이 진 벚꽃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서 벚꽃나무를 찾으라고 해도 찾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나무가 벚꽃나무가 다른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벚꽃나무의 본질은 여느 나무들과 같이 이파리가 무성해져도, 겨울을 맞아 앙상해져도 벚꽃나무입니다. 그리고 결국 시간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면 벚꽃나무는 다시금 분홍빛의 아름다운 꽃을 한 아름 틔워낼 것입니다.
왜 고린도교회가, 우리가 의롭습니까? 본질상 의롭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가 우리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이지, 우리의 어떠함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비록 벚꽃나무가 계절에 따라 벚꽃나무 스럽지 않을지라도 그 본질은 벚꽃나무인 것처럼 고린도교회와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의인으로서, 성도로서 합당하지 않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본질은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우리의 삶에는 거룩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한 아름 피워낼 봄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벚꽃나무가 봄이 되면 벚꽃을 피워낼 것이라는 사실과 같이 확실합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계시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더라도 역사하시며 우리를 끝까지 의인의 자리로 견고하고 강하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삶의 현주소로 낙심하여 계시다면, 믿음의 계절에 겨울이 찾아올 때에 이 사실을 믿고 의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쁘신 분이십니다. 우리와는 다르게, 고린도교회와는 다르게 언제나 변함없으시고 신실하시고 완전하신 분께서 우리를 교회라 불러주시고, 성도라 불러주시며 의인 삼아주시고 강하고 또 완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편지하며 문제투성이인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교회요 거룩한 성도라고 지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에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며 문제 속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의 여정을 완성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찾아올 봄을 기대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의 본질이 성도이신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은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낼 그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부족하지만, 하루하루 점점 더 자라나서 거룩한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게 될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