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08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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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은 삶
바보같은 삶
하늘고 친구들, 다들 한주 잘 보냈나요? 오늘도 함께 예배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 친구들 1년만에 함께 얼굴을 보게 되니까 더욱 반가운 것 같습니다.
이제 2023년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게 되었죠? 오늘도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이 이번주, 또 올해 어떤 은혜를 주실지 함께 말씀으로 나누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전도사님이 매주 화요일에 우리 하늘고 졸업생들과 함께 도서나눔을 하고 있어요.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인데,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은 그 초반부분이에요.
바로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어떤 무언가가 존재한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물질들은 물리 법칙에 따라서, 동물들은 자신의 욕구에 따라서 다른 가능성 없이 움직이게 되지만, 인간은 자신 스스로의 욕구대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어떤 무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졸업생들과 이것에 대해서 나누면서 각자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누었는데요, 전도사님이 그때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얼마전에 전도사님이 교회 일이 끝나고 이후 일정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근처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1시간정도 떼우다가 갈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의 커피 핫으로 한잔을 그란데로 시켜서 푹 쉬기로 했죠.
그런데 이후 일정에 버스를 타고 가야 해서 그 시간에 맞춰 나가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버스가 곧 온다고 했고, 전도사님은 머그잔을 챙겨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벅에 가면 옆에 퇴식구가 따로 있죠? 그곳에 컵을 놓으려고 하는데, 다른 분이 트레이랑 물이 담긴 플라스틱 잔을 놔뒀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별 생각 없이 그 옆에 머그잔을 두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물컵 바로 옆에 머그잔을 두려 했는데, 머그잔이 그란데 잔이다 보니까 조금 큰거에요. 그래서 이 머그잔이 물컵을 밀치면서 안에 들었던 물이 옆으로 싹 쏟아지게 되었죠.
그래서 저도 ‘어?’하고 놀라고, 옆에 분도 ‘어?’하고 놀랐는데, 곧 버스가 올 시간이니까, 차마 이걸 어찌하지 못하고 그냥 나와버리게 되었어요.
물론 그래서 버스는 문제없이 탔지만, 그 이후로 계속 그 순간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냥 냅킨으로 조금이라도 닦을걸 그랬나’ ‘아니면 직원한테라도 말할걸 그랬나’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나온것이 엄청난 잘못은 아니에요. 원래 손님 실수로 음료를 쏟게 되면 그걸 치우는 것은 직원들에 몫이에요. 그리고 만약 제가 그걸 치우게 되면 버스를 놓쳤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를 하려고 하더라도 계속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아마 우리 친구들도 이런 순간이 한번쯤은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생기게 될까요? 어떤 이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악한 인간이 사회를 통해 선하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할거에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에요. 앞에서 말한 CS루이스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무언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겠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경우들이 꽤나 많습니다.
당장 우리 친구들이 나중에 대학만 가더라도 남들 다 즐기는 술,담배를 즐기지도 못하고, 직장을 가게 되면 교회에 출석하는 것과 회사의 일을 처리하는 것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분명히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면 복이 찾아오고, 형통한 삶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왜 신앙생활을 할수록 고난들만이 찾아오느냐고 말이죠.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말씀도 그러한 질문이 마구마구 생겨나게 되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기도 하죠.
이제 이 말씀을 함께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것이고, 우리는 왜 그러한 삶 속에 살아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말씀을 한번 볼게요. 38절보면 그 유명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등장합니다. 세상에서는 함무라비 법전의 구절로 유명하죠. 동해보복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도 동일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우리가 이러한 법 조항을 보면 조금 잔인하게 생각이 될 거에요. 아니 일부러 그런게 아닐 수도 있는데, 어떻게 똑같이 해줄수가 있어?
하지만 성경말씀과 함무라비 법전에 등장하는 고대시대의 이 법 조항은 사실 오히려 자비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법이었어요.
왜냐하면 해를 입은 딱 그만큼만을 행하라는 것이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자면 내가 입은 해보다 더 큰 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팔이 부러졌다고 해서 감히 내 팔을 잘라? 하고 죽여버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문화로서는 상당히 인간적인 법조항이었다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법 조항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39절보면, 예수님은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뭐라고 하시냐면,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뺨을 때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죠? 상대에게 수치를 주는 행위이죠. 물론 아프기도 엄청 아프지만, 아픈 이후에는 수치심이 몰려오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뺨을 시작으로 큰 싸움에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신다고요? 왼편도 대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가 이걸 쉽게 생각하면 오른손 왼손으로 양쪽 뺨을 때리는 거라고 생각할거에요. 그런데 사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한손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손바닥으로 때린 후에 손등으로도 때린다는 거에요.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문화에서 이러한 행동은 엄청난 모욕을 하는 행위였다라고 합니다. 사실 손등으로 때린다고 손바닥 보다 아프지는 않을거에요.
하지만 손등으로 때리면 그만큼 큰 수치심을 상대에게 준다라는 것이죠. 비유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친구들이랑 내기하고 벌칙할 때 어때요, 아프더라도 확 때리는 게 낫지, 때릴 듯 안때릴듯 쪼면 오히려 더 짜증이 나게 되죠.
어떻게 보면 손등으로 때리는 것이 이러한 비슷한 감정을 주게 될 수 있다라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40절에 보면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라고 말합니다. 그냥 가진 것을 다 뺐기는 거죠.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서 이상하다 느끼는 친구들도 있었을거에요. 왜 겉옷을 먼저 줘야지 속옷부터 가져갈까 라는 것이죠.
이것도 당시의 문화가 담겨있습니다. 성경말씀의 무대가 되는 중동지역의 특징이 뭐죠 친구들? 낮에 뜨거운 햇빛이 내리쬔다는 것이죠. 그리고 밤이 되면 기온이 엄청 떨어져서 추워지기까지 하죠.
그러다보니 당시 중동지역의 사람들에게는 겉옷이 속옷보다도 필수적이었어요. 햇빛을 가리고 추위로부터 몸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안에는 중요부위만 입고 겉옷으로 몸을 감싼 경우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겉옷이 속옷보다도 더 중요하고 값이 나갔겠죠.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내게 덜 중요한 것을 가지려고 할 때, 그것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내게 가장 귀한 것까지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41절 보면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왜 누가 갑자기 나를 데리고 가냐 싶겠지만, 이 역시도 당시 역사적 배경이 있어요. 여기서의 누구든지는 로마 군인을 가리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 주둔을 하고 있었겠죠? 그런데 로마 군인들은 이 지역 출신들이 아니다보니까 길을 잘 모르는 거에요. 그러니 길을 잘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지역 주민들한테 길을 물어야 했겠죠.
그런데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 군인은 점령지 주민에게 일을 강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와서 날 인도해라, 와서 이것들좀 들고 가라 라고 하면 무조건 했어야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명령에 의해 대신 짊어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경우겠죠.
이렇듯 로마 군인이 길안내를 시킨다고 해봅시다. 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시켜도 사실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텐데, 우리로 치면 일제시대때 일본 순사가 와서 길안내좀 해 라고 하면 기분이 너무나도 안좋겠죠.
그런데 심지어 오리는 어느정도의 거리냐, 1.96km입니다. 거의 2km의 거리죠. 걸음으로 걸으면 꽤나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갔다가 또 나는 돌아와야 하니까 왕복으로 치면 거의 4km인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한 술을 더 떠서 10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왕복 8km를 함께해주라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달라고 하는 것을 다 주고, 빌리고자 하는 것도 다 빌려주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하면서도 정말 너무하다라는 생각이 들거에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바로 뒤에 말씀이 무슨 이야기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화룡점정을 찍는 것이죠.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뭐라는거에요? 그냥 때려도 맞고, 괴롭혀도 당해주고, 저항조차도 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런사람들을 뭐라고 하죠? 바보라고 합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찐이 들어가는 단어를 쓰기도 하죠.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그렇게 멸시하며 놀릴까요? 그런 삶은 절대로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살면 지금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즐거운 삶, 편안한 삶을 살 수 없다라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면 정말 답답하고, 너무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서 살아는 가야 하는데,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삶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라는 거에요.
그런데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죠? 로마제국의 그리스도인 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냥 예수 믿기만 해도 잡아서 사자밥으로 주면서 구경거리로 삼고, 네로황제 시기에는 방화의 주범으로 몰려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죠.
다행스럽게 죽지 않더라도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했습니다. 인육을 먹고 근친상간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그 조롱은 성찬에 대한 오해이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에 대한 오해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그들에게 유의미한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정도로 박해를 당하면 함께 모여 뭐라도 저항을 할 법한데, 그리스도인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숨는 것이 최대한의 저항이었죠.
자 그럼 친구들, 지금은 어떨까요? 뭐 물론 교회다닌다고 잡아다가 죽이고 그렇지는 않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좋을까요? 제가 봤을 때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가장 쉽게는 인터넷에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뭐라고 댓글이 달리죠? ‘그 종교’, ‘개독교’ 라고 하면서 조롱과 비하를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상하다, 목사들은 다 잘못된 삶을 산다라고 하는 등의 엄청난 사회적 박해들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쩌면, 이자리에 있는 우리들 역시도 알게모르게 그러한 박해를 당했을지도, 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저는 목사님 아들로 태어나서 사실은 한번도 교회가는 것에 대해서 방해를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주일에 교회가는 것은 당연했고, 토요일에는 당연히 교회가서 주일준비하며 하루를 다 보내고 했었죠.
그런데 언제 처음으로 방해를 받게 되었냐면요, 바로 군대에 가서였습니다. 제가 간 부대의 당시 상황이 어땠냐면요, 제가 들어가기 전까지 4달간 신병이 들어오지 않았던거에요.
그러니까 제 바로 위에 선임이 4달간 막내생활을 한거겠죠? 물론 요즘은 덜하겠지만, 그때는 막내가 특별히 해야할 일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 일들은 특히 언제 많냐, 바로 주말에 많아요.
쉬는 날이다 보니까 고참들이 더많이 시키고 자잘하게 해야할 일들을 다 떠넘기는 거죠.
그런데 제가 딱 가자마자 어떤 이야기를 했냐면, 교회를 가겠다고 한 것이죠.
다행히 중대장님이 그래도 교회를 다니셨던 분이라, 교회를 막 못가게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교회를 가기까지 견뎌야 할 것들이 많았죠.
가장 큰 것이 바로 선임들의 시선을 견뎌야 했어요. 선임들 입장에서는 어때요, 겨우 4달 버텨서 막내가 들어왔는데, 주말에 교회간다고 하니까 얼마나 짜증이 났겠어요.
그래서 주말 뿐만이 아니라 주중에도 별거 아닌 걸로 괴롭히는 경우들이 많았구요, 실수를 하게 되면 엄청나게 혼이 많이 났었습니다.
사실 군대라는 곳이 엄청난 규율과 통제가 있는 곳이다보니, 아무리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더라도 그곳에 가면 바보가 돼요. 그러니 거의 한번정도는 꼭 실수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어떤 실수를 했냐면, 불침번이라고 밤에 사람들 이동을 관리하고, 근무 나가는 사람들을 깨워주고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있어요.
제가 그걸 처음 하는 날이었는데, 보통 그 근무가 1시간에서 1시간 반정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중간에 할 일들을 하고 심심하니까 혼자 찬양을 부르면서 시간을 보냈거든요.
그런데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시간을 착각한거에요. 그래서 근무자를 깨워야 할 시간을 훨씬 넘겨서 잘못 깨우고 만 것이죠.
결국 그 다음날 아침에 난리가 났죠. 고참들은 불침번때 뭘했길래 그런 실수를 하냐 묻고, 저는 사실대로 찬양 불렀다고 하고. 이러다보니 처음에 저는 완전 이상한 사람으로 찍혔었죠.
어떻게 보면 이렇듯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고난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대체 왜 말씀에서 믿는 자에게 복이 오고, 형통한 삶이 찾아오고 이런 말씀을 왜 하신것일까요. 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러한 삶을 먼저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죠? 이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완전무결하신, 위대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 모든 고난과 고통을 다 짊어지십니다.
가장 먼저 신이 한계가 있는 인간의 몸을 입었습니다. 한 단계 낮아진 것이죠. 그런데 그 낮아지신 모습으로 인간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로 향하셨습니다. 고통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모든 것을 빼앗기신 채로 최악의 죄수들이 받는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을 죽인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통해 우리는 죄로부터 놓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죠.
그 혜택을 받은 자들이 누구에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세상에서 인정을 받아야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던 제자들과 그것을 시기했던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히려 낮아지고, 남을 섬기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으뜸되는 자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들은 낮은 자리에서 세상의 가치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하신 뜻을 이 세상 가운데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앞에서 많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박해를 당했었다라고 이야기를 했었죠. 그러면 그들의 이러한 죽음은 그저 의미없는 죽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 순교를 통해 결국에는 그 큰 로마제국이 교회를 받아들이고, 결국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바뀌어지며 유럽 전역과 서양 문화를 기독교 없이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만약 박해를 당했던 성도들이 무장하여 저항했더라면 이러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아마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신,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복이 임한다는 그 복은 바로 이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높은 자리에 임한다는 그러한 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나타나고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이 바로 복이라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앞서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 군생활이 많이 힘들었다라고 했었죠?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향한 마음이 깊어졌습니다. 매주 교회가는 날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더욱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주중에 부대 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나가다 보니까 나중에는 그렇게 혼내던 고참들도 어느정도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됐냐면, 그 고참들이 교회에 관심을 갖고, 교회에 대한 것들을 제게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들을 전도하는 것까지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제 모습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제게는 참 큰 은혜였습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에게는 지금의 삶이 참 어렵고 고난이 많고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함께하신 그 주님을 생각하고 그 주님을 따라 한걸음한걸음 나아간다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큰 복을 결국에는 우리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올 2023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친구들도 새로운 계획과 목표들을 세우고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 모든 친구들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가 세상적으로 잘되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목표들을 세우기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더 낮은 자리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한 목표들을 세우는 것은 어떨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친구들이 세상에서 으뜸되기보다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이 될 수 있는 우리 모든 친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했던 찬양인데요,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함께 찬양하면서 주님을 따라 가겠다는 다짐을 함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놓고 기도합시다.
- 먼저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따라 나도 그러한 삶을 살겠다고, 세상이 바보같다고 말할지라도 세상이 원하는 삶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2. 올 2023년을 위해
- 지난 한해를 지켜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올 한해동안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나 자신이 되게 해달라고, 올해 가진 목표들을 주님 안에서 잘 이뤄내게 해달라고
3. 하임 공동체를 위해
- 우리 하임 공동체가 주님 안에 더욱 단단해지고 더욱 하나되게 하소서, 특별히 2월에 있을 캠프를 준비하고 있는데, 캠프가 주님 원하시는 뜻대로 잘 준비되어, 은혜로운 시간이 되게 해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