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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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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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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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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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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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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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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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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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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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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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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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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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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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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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본문 창 50:15-26
자비하신 하나님,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까지 내려오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죽어 마땅한 죄인인 나를 위함임을 이 새벽의 시간에 다시금 깨닫고 고백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마다 주님 앞에 올려드릴 것은 감사와 찬양밖에 없습니다.
내게 베푸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이제는 그 크신 은총을 받은 자 답게 그 은총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줄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께서 나를 용서하셨듯 나도 타인을 용서하게 하시고, 주께서 나를 용납하셨듯 나도 타인을 용납하게 하시며,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나도 타인을 사랑하도록 우리의 삶전체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앞서 제가 한번 소개했던 일화이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다.
1999년 7월 4일, 백인우월주의자였던 벤자민 스미스는 예배를 마치고 교회당을 나가던 26세 한국인 유학생 윤원준씨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당시 윤원준씨는 일리노이 대학을 졸업하고 인디에나에서 대학원 준비를 하던 미래가 총망받던 청년이었다.
총격사고가 있은 후 8일째 되는 날이던 7월 12일 오후 7시, 미국 전역에 윤원준씨의 추모예배가 생방송으로 방영되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많은 이들이 슬픔을 표했다.
예배의 마지막 시간, 희생당한 윤원준씨의 사촌형이던 박성호 목사가 나와서 가족을 대표하여 인사를 하는 순간, 그의 인사말 때문에 방송을 보던 모든 미국인들은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오늘 가족을 대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형제를 죽인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사랑하는 동생의 꿈을 빼앗아가고 피를 흘리게 한 이 미국을 용서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나와 우리 가족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는 자들이다"
박성호 목사와 그의 가족이 윤원준씨를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었던 그 능력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서부터였다.
더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의 무수한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은혜를 받은 자, 은혜를 누리는 자, 은혜를 기억하는 자는 응당 그 은혜를 흘려보내기 마련이다.
내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존재인지, 일상의 삶 속에서 얼마나 크신 은혜가 나를 압도하고 있는지 경험하는 자들은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
‘은혜를 경험하는 삶', ‘은혜를 누리는 삶', ‘은혜에 사로잡힌 삶'임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이었다.
요셉을 죽이려다가 상인에게 팔아버린 악행에 대해 요셉이 복수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은 야곱의 유언을 빙자해 요셉에게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호소한다.
야곱의 유언이라고 한 내용도 사실은 그들이 꾸며낸 거짓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야곱이 요셉에게 형들을 용서하라고 유언하려 했다면 야곱이 생전에 요셉에게 직접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울었다.
형들이 애굽에서 사는 동안에도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과 서러운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요셉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형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이 형들과 형들의 가족까지 돌보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형들은 자신에게 악행을 저질렀으나 요셉은 형들을 이미 용서하고 마음에 품었다.
요셉은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던 본보기가 되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입은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요셉이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지나온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로 팔려와서 총리가 되기까지 모든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비록 그 과정에 괴롭고 억울한 일들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시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며,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음을 요셉은 알고 있었다.
만일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하지 않았더라면, 요셉에게는 복수할 대상이 너무나도 많았을 것이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형들에 대한 복수, 자신을 모함했던 보디발의 아내와 무고한 자신을 왕의 죄수 가두는 감옥에 넣은 보디발 등등 모두가 복수의 대상이 되고야만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그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셔서 그분의 섭리를 이루시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서 그들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교훈을 전해준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부당한 일들을 마주하게 되는가?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오해 받고, 모함을 당하며, 억울한 일들을 겪고, 수 없는 원통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정해두신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향해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셉은 지나왔던 괴로웠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식함으로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용서의 은혜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마6:12 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타인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교훈한다.
성도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그보다 앞서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의 죄 용서함을 받은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께 죄사함받은 은총 속에서 타인을 용서하는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죄사함을 받은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용서를 받은 자로서 응당 타인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주고, 그들을 용납하며, 그들을 사랑함으로서 주님을 향한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제들을 향한 요셉의 용서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졌다는 믿음으로 가능했던 것임을 기억하라.
마찬가지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들을 바라봄으로 용서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특별히 내가 얼마나 큰 용서의 은혜를 입은 자인지를 기억하며, 그 은혜로 타인의 죄를 용서하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2023년을 시작하면서 1월 1일 주일, 담임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지 않았던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며 시비하는 일로 허비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어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 큰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에 합당한 용서의 은혜들을 흘려보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미워하던 자를 올해도 미워한다면 우리가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은혜받은 자 답게 달라져야지.
‘보물섬’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의 일화를 소개하며 말씀을 맺으려 한다.
로버트 스티븐슨이 가족들과 가정예배를 드리던 어느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뒤따라 나가 남편을 붙들고 도대체 왜 그러느냐 물었다.
이에 스티븐슨이 말하기를, “오늘은 내가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드리기가 너무나 괴롭소,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편치 않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아놓고도 형제를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난 뒤, 자신도 쉽게 타인의 그 작고 사소한 죄조차 용서하지 못했는데, 자신의 큰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뻔뻔하게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양심이 그를 쳤던 것이다.
여러분, 로버트 스티븐슨은 그래도 염치도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면서도 주일마다 뻔뻔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뻔뻔하게 기도드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다.
“양심의 가책 없이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는 시편 109: 7 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시편 109:7 의 저주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이다.
얼마나 기가 막힌 말인가? 형제를 쉬 용서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뻔뻔하고 가증스럽게 기도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모든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해 달라는 저주였다.
루터의 이 외침을 꼭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은혜를 흘려보내주어야 한다.
측량할 수 없는 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자라면, 그 은총을 흘려보내서 타인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반대로 말해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고,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의 은총을 받지 못했음을 증명할 뿐이다.
이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서 올 2023년 한해는, 보다 이해하는 한 해, 보다 용서하는 한 해, 보다 사랑하는 한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주님,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상황들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게 하시고, 특별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내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관계들 속에서 그 죄사함의 은총을 흘려보내줄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서로 용서하기를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게 하시고, 서로 품어주기를 주께서 우리를 품어주신 것처럼 하게 하시며, 서로 사랑하기를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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