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1 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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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259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서 / 270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찬송 266[주의 피로 이룬 샘물] / 317
본문 수 5:1-9
곤충학자이자 벼룩여왕으로 알려진 루이저 로스차일드 박사의 벼룩실험은 환경과 습관이 한계를 단정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례로 회자된다. 로스차일드 박사는 보통 30cm 정도 뛰어오르는 벼룩을 높이 10cm 유리컵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벼룩은 더욱 힘껏 뛰어오를 수 있으나 계속 높이 10cm 뚜껑에 부딪힌다. 계속 그 천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탁탁탁탁’ 하고 들린다. 일정 시간이 지나고 로스차일드 박사는 그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줄다가 이제는 더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그 뚜껑을 완전히 열어버렸는데, 어떤 벼룩도 유리컵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벼룩은 컵 뚜껑에 계속 부딪히면서 10cm 이상 뛰어오를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했고, 그 이후로는 그 이상 뛰어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 능력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높이를 뛰어넘지 않더라는 것이다. 로스차일드 박사는 이러한 무기력함이 학습이 되어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했다고 결론을 지었다.
여러분, 노예근성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남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주체성 없이 남의 눈치만 보는 성질을 뜻하는데 말 그대로 자유가 주어졌거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자리에서도 그저 자리에 주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결국 노예 상태에 만족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자리의 여러분들 모두 지난 송구영신예배때 한해를 뒤돌아 보며 하나님 앞에 회개할 부분들을 회개하고, 또한 새롭게 시작될 2023년 한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인지 결단하고 다짐하셨을 것이다. ‘지난 한 해 내가 남을 용서하는 일에 약했는데 새해에는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지! 지난 한해는 찬양과 감사에 좀 소홀했던 것 같은데, 새해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일에 더 열심을 내어야지!, 새해에는 내가 예배에 좀 더 집중해야지, 새해에는 봉사에 좀 더 열심을 내어야지!’ 이런 다짐들을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새해가 시작된지 일주일이 되었다. 여러분은 다짐하신 대로, 결단하신대로 그 열매들을 거두고 계신가? 누구나 새해가 되면 실패했던 지난 날로부터 돌이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새 달력이 시작되었다고 저절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비결을 찾아보려 한다.
이스라엘은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과거 홍해를 건넌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을 건넜다.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사람들은 마음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 1절을 보라.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그들이 무엇 때문에 마음이 녹았는가? 이스라엘의 최신식 무기를 보았는가? 아니다. 당시 가나안은 아주 수준 높은 청동기 문명을 소유했지만 이스라엘은 그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가나안에는 높은 성벽과 발달된 농경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40년 광야에서 떠돌이 유목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가나안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이스라엘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가장 유용한 전술 중 하나는 적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지금 적의 상황이 이러하니 이스라엘 편에 있어서는 공격을 들어갈 절호의 기회였다. 가나안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공격의 가장 적기인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갈이라는 곳에서 이스라엘의 행로를 잠시 멈추게 하신다. 가장 빠르게, 가장 신속히 움직여야할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신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에 앞서 중요한 종교의식을 먼저 실행하게 하시니 바로 '할례'였다.
이스라엘 남자는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다. 이 규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그친 적 없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애굽에서 할례를 받았던 자들은 40년 광야생활하던 중 모두 죽었고,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 떠돌이 생활 때문에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지금 할례없는 자가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하시는 이유였다. 할례는 남자의 포피를 잘라 벗겨내는 일종의 수술이다. 할례를 받으면 며칠 꼼짝할 수 없이 누워있어야 한다. 그러니 전쟁이 코앞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정들이 동시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일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통증으로 누워 있는 동안 적군이 처들어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다. 가나안 정복은 칼과 창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뿐이었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함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온몸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할례를 행한 후 이스라엘이 낫기를 기다리던 때에, 그 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신다. 수5:9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고 말씀한다. 애굽의 수치는 좀 더 정확하게 '애굽에서의 수치'이다. 이스라엘이 수백년 동안 애굽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노예였다. 수백 년을 하층민 중의 하층민으로 살았다. 가장 더럽고 불결하고 험한 일을 했었던 자들이고, 애굽인들에게 그들은 재산이나 물건에 불과했던 존재들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수치였다.
그런데 신분보다 더 부끄러웠던 것은 바로 내면의 수치였다. 노예에게는 노예의 마음이 있다. 노예의 습성이 있다. 노예의 생활패턴이 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그들에게 비전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겠는가? 그 곳에서 자신의 삶을 뭔가 능동적으로 개척할 수 있었겠는가? 노예는 습성적으로 오늘 하루 얻어맞지 않고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수백 년을 그렇게 살았다. 자유인이 되는 꿈과 희망은 사라졌다. 삶의 개선이나 개혁을 바랄 의지도 없다. 깊은 패배의식과 절망에 사로잡혀 살아온 자들이다. 그들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이 노예의식이야말로 그들의 수치였다.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동시에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의식이나 사고방식, 생활패턴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았다. 노예로 살던 그대로 광야로 나왔다. 신분은 변화하였지만 여전히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고귀함보다는 여전히 육적인 것들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노예근성은 단지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풍족하게 먹을 수만 있다면, 당장 눈 앞에 배부른 것들만 주어진다면 그곳은 애굽이든 지옥이든 상관없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광야의 결핍 가운데 끊임없이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 아니겠는가? 이랬던 그들에게 지난 광야 40년은 몸에 배어있던 노예의 기질을 벗겨내는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존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수많은 광야의 실패 가운데 배우게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앞에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여기서 '떠나가게 하였다'는 구절은 문법적으로 보면 완결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동작이 이미 완료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언으로 수백 년 간 짊어지고 있던 애굽의 수치를 벗어 버렸다. 그들은 더이상 불순종하던 백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며 약속의 땅에 어울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단번에 이루어졌다. 우리의 처지도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우리는 죄의 노예였다. 어떻게 해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던 존재였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셨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있어서 때로 죄의 노예처럼 살아갈 때가 있으니, 그것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수치이다.
여러분, 한 해를 시작한 이 시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수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의 회복을 원하나, 몇번 도전하다가 실패하면 포기해 버린다. 환경에 순응하며 사는 것을 마땅히 여긴다. 아무리 몸부림처도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고 세상 나라를 섬길 때도 있다.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바울을 생각해보라. 회심하기 전에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그는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넘기던 자였다. 그러나 회심 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하는 자가 되었다. 사도 요한의 별명은 '우레의 아들'이었다. 이는 그의 성격이 얼마나 불같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고 그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하였다.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도주한 노예였다. 그는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유익한 종이 되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복음의 능력이 그의 삶에 나타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복음의 능력이 그의 삶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복된 삶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의 수치를 굴려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할례를 행한 이스라엘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 ‘수치가 떠나갔다' 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던지 9절을 보니 그곳의 지명까지 바꾸실 정도였다. 성경주석자들에 의하면 ‘길갈’ 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수레바퀴'를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수치를 바퀴 굴리는 것처럼 이스라엘로부터 굴려버리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애굽의 수치는 모욕거리였고, 떠올리기 싫은 흑역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따라다니던 수치, 나쁜 평판, 노예의 이력들을 바퀴 굴리듯이 굴려서 모두 떠나가게 하셨다. 압박과 설움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온 날들을 떠나가게 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부끄러웠던 노예살이의 수치는 사라졌고 그들의 존귀함이 회복되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세상 가운데 겪고 있는 수치가 무엇이든, 그것은 여러분의 운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셨듯,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새 삶을 약속하셨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작년에도 노력했지만 나아진 것이 없는데 새 해가 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 절망적인 생각을 버리라.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 꼭 순서를 기억하라. 수백 년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던 수치가 떠나는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 바로 할례를 받을 때였다. 할례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입증하는 표였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첫째는 세상으로부터의 구별을 상징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해 지워지지 않는 표를 이스라엘에 새기셨다. 이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백성의 수치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의 수치는 그 거룩하게 구별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 무언가로 사는 자들이라면 우리도 여전히 이전의 수치를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로, 할례는 하나님께만 드려진 헌신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자기 몸에 새겨진 할례의 흔적을 바라본다. 그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나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헌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대상자에게 온전히 나 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식당에 가면 자리가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을 수 없는 때가 있다. "예약석"이라는 팻말이 있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그 자리는 오직 예약한 그 사람만이 앉을 수 있다. 그 사람만의 독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한다. 세상은 수시로 우리 마음을 빼앗으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이다.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우리 마음을 차지할 수 없다. 심지어 나 조차 나의 주인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몸에 새겨진 할례의 흔적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마음 깊이 되새겼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직전의 이스라엘과 같다. 새로운 한해가 우리 앞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치를 굴려버리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전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 마음에 행하시는 할례를 받는 것이다. 육체의 할례는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이다. 옛언약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더이상 육체에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례가 지닌 신학적인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더욱 강조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구별되었고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수많은 악과 더러운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부터 솟아난다.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하고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구별 없도록 우리를 부패시킨다. 그로 인해 세상이 우리 마음 속에서 왕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 자손들 대대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신30:6 에서도 이를 강조하시는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겉모양이 그리스도인 같다고 해서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겉모양만 기독교인 같다고 해서 그가 진정 신자가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할례를 강조하셨다.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어야 한다. 영혼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으로 태어나 유대주의자로 살았던 사도 바울 역시 회심하면서 다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롬2:28-29 말씀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따라서 이스라엘의 할례도 육체에 한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했다. 마음을 더럽히는 온갖 더러운 탐심과 음란과 거짓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만드는 온갖 것들을 베어내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예레미야의 절규를 들으라. 렘4:4 말씀에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라고 외치지 않는가.
2023년이 시작되었다. 새해에는 뭔가 다른 삶을 살고 싶은가? 먼저 은혜를 받으라. 영혼의 변화를 받아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지난 해와 동일한 마음가짐으로는, 동일하게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부정한 마음으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 다르게 살고 싶다면 속사람이 변화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할례를 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기 위해 먼저 영적인 눈을 떠서 나의 상태가 어떠한지 헤아려야 한다. 나에게 수치스러운 것이 있음을 깨닫고 마음에 할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야 자기 마음 가죽을 베어야 한다. 말씀의 칼로 도려내어야 할 불결한 부분들을 도려내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의 선언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사 드러나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말씀의 칼로 도려내어야 한다. 이는 말씀을 깨달음으로 행하는 회개를 말한다. 진실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우리 마음은 새로워진다. 마음의 할례를 받을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겉모양을 먼저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먼저 변화시키신다. 모든 삶의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단지 환경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결하여 하나님께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해에 실패했던 삶의 수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세상 자녀처럼 살고,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번영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수치이다. 바로 이것이 온갖 더러움을 품고 있는 마음의
가죽이다. 이것을 베어버려야 한다.
신앙에 중간지대는 없다. 여러분의 마음의 자리에 두 손님이 앉을 수 없다. 하나님만이 독점하시거나, 세상이 독점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만약 여러분이 세상을 사랑하던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여러분 자신을 내어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향하여 아낌없이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까지 여러분을 위해 아낌 없이 내어 주신 분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수치를 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복을 부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한 한해를, 여러분이 결단하고 다짐했던 대로 살고 싶다면, 수많은 신앙의 결실들을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으시다면, 신앙의 진보와 성숙을 이루어내고 싶으시다면, 가장 먼저 영혼의 변화를 받으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라. 마음에서 여러분의 인격과 삶이 흘러나온다. 할례를 받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해에는 승리하는 삶을 사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2023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주님,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받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수많은 축복들을 마주하며, 먼저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불결한 마음 가죽이 있다면,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는 수치스러운 것들이 있다면, 주여, 말씀의 칼로 우리의 더럽고 불결한 부분드를 제하여 주옵소서. 우리 마음에 할례를 시행하여 주옵소서. 진실한 회개로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강건하게 하셔서, 올 2023년 한해는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날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자비하신 주님, 시작하는 한 해 가운데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 따라 먼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눈 앞에 주님 예비하신 수많은 복들을 마주하며, 먼저 우리의 수치를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여전히 불결하고 더러운 부분들을 보게 하옵소서. 잘라 내어야 할 마음 가죽들을 보게 하옵소서. 가장 예리한 말씀의 검으로 부정하고 더럽고 수치스러운 우리의 마음들을 도려내게 하시고 잘라내게 하셔서, 우리의 속사람을 다시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모든 수치들이 굴러가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고, 이로 인하여 예비하신 크신 은혜들을 누리는 올 한해가 될 수 있도록 은혜베풀어 주옵소서.
찬송 317 [내 주 예수 주신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