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동행하는 한해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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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하는 한해가 되려면 /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구원받은 자들이 예배를 통해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해가는 것이다.
프랑스 출신 곡예사 찰스 블론딘이라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는 줄타기 묘기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1859년 여름, 매우 흥미진진한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외줄타기로 건너겠다고 한 것입니다.
49미터 높이에 걸려있는 밧줄위를 335미터를 걸어가는 도전을 보기 위해 50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외줄에 오르기 직전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중 몇 명이나 제가 이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소리로 대답해주었고 그는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두 눈을 가리고 도전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사람들에게 ‘제가 이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전과 동일하게 박수와 환호소리로 대답해주었고 또다시 그는 무사히 건넜습니다.
그는 또다시 자전거를 타고 건너겠다고 말하며 ‘제가 이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실력을 본 사람들은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환호하며 ‘믿습니다’라고 응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무사히 건넜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또다시 수레를 끌고 폭포를 건넜습니다.
모두 성공한 그는 이제 마지막으로 도전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제가 누군가를 등에 업고 저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연히 박수치며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줄 위에서 무슨 일을 해도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더 합니다.
‘그럼 여러분 중 누가 제 등에 업히겠습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이 질문에 모든 사람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미소는 사라지고 일순간 쥐죽은 듯한 적만만 감돌았습니다.
그 때 한 친구가 이런 엄숙한 침묵을 깨고 한 사람이 ‘제가 하겠다’고 목소리를 냅니다.
그는 실제로 그의 등에 업혀 나이아가라 폭포를 횡단하는데 성공합니다.
그가 누구였을까요?
바로 그의 친구였던 ‘콜코드’였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고 쉽게 고백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님과 동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할 뿐 실제로는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외줄타기 관중들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월절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 등에 업히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과 함께 가야할 길은 바로 외줄타기처럼 위험한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한해 주님과 진짜 동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첫째, 우리가 구원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정해진 때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유월절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3대 절기중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유월절은 1월 14일입니다.
한 해를 유월절과 함께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다음주에 맞을 설날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 날에는 어린양도 잡아서 먹고, 쓴 나물도 먹고, 누룩, 즉 곰팡이가 안 들어간 빵도 함께 먹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이 날을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일까요?
왜 광야를 떠나기 전에 이 날을 지키도록 하신 것일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집트를 심판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바로왕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바로가 계속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열가지 재앙을 이집트에 내리셨는데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바로 그 땅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만큼은 어린양의 피를 문 주위에 바르면 재앙을 피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만 지나쳐간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영어로 PASS OVER, ‘넘어가다’라고 부릅니다.
이런 재앙때문에 결국 이집트 왕 바로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넘게 노예생활을 하다가 이제서야 하나님 은혜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즉 이집트를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탄생하게 된 생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도 민수기에서도 반드시 이 날을 기억하여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험한 광야길을 가는데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기억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절기가 바로 유월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유월절은 우리나라의 설과 광복절이 섞인 그런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 날이겠습니까?
[성경적 연결]
그러나 이러한 유월절은 신약에 오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7절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집트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 백성 삼아주신 것처럼 죄의 노예였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유월절이 그림자라면 예수님이 그 그림자의 실체를 우리에게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유월절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적용]
그럼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혹시 지금 내가 외줄타기에서 환호하던 관중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등에 업히지 못한채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은 한낯 구호나 맹세가 아닙니다.
실제로 내 인생을 그 분께 맡기겠다고 소유권을 이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외줄타기 관중들처럼 망설일 때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광야같은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운 마음부터 드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서 주님으로 돌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세상에 주눅들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통해 광야에서 두려움을 이겨냈듯이, 이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세상의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예배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되새긴후 나머지 6일동안 세상에 파송됩니다.
나머지 6일동안 주님 등에 업혀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예배중에 드리는 성찬식은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며 그분 등에 업혀 그 분의 체온과 호흡을 느끼며 한 몸으로 살아가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찬식과 예배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은 자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여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둘째, 우리의 구원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6,7절입니다.
그런데 주검에 몸이 닿아 부정을 타서, 그 날 유월절을 지킬 희생제물을 바칠 수 없는 사람이 생겼다. 그 날 그들이 모세와 아론 앞으로 나와서 모세에게 물었다. “우리가 비록 주검 때문에 부정을 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정된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데, 우리만 못 바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출애굽한 후 처음으로 맞는 유월절입니다.
그러니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어쩌다보니 시체에 접촉하는 바람에 부정해져서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긴 것입니다.
부정해지면 당연히 거룩한 성소에 나아갈수 없으니 유월절에도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올해 유월절은 넘어가고 내년에나 드려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들고 모세를 찾아가 따집니다.
자신들이 의도치 않게 부정해졌지만 유월절만큼은 참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떻게든 유월절을 지키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부정하기 때문에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들의 문제제기를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에에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들 역시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유월절에 참여하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귀히 여기신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들이나 너희 자손들은 주검을 만져 더럽게 되었을 때나 먼 길을 떠나 있을 때나 모두 주 앞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그런한 사람들은 다음 달 십사일 해거름에 유월절 예식을 행하면서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과 쓴 나물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도록 하여라.
이 말은 부정해진 자들은 한달 후에 유월절을 따로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부정해져서 진 밖으로 나가야하지만, 한달이면 충분히 회복되니 그 다음달에 다시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또한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유월절 날짜에 맞춰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배려해주셔서 한달 뒤 그들도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규칙보다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심지어 외국인일지라도 사모하는 마음만 있다면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정반대로 부정하거나 장거리 여행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유월절을 소홀히 여겨 지키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13절입니다.
그러나 정결한 사람이나 길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나 주에게 바치는 제물을 정해진 때에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규칙에 어긋나는데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때문에 유월절을 지키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유월절을 소홀히 여겨 빠진 자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는 벌인데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주님의 이런 벌이 너무하다고 느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멀어지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적 연결]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유월절을 또다시 시행합니다.
이게 여호수아 5장에 등장합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새로운 시작 앞에서 다시 한번 유월절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신들이 누구인지 기억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후에는 유월절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가나안 땅에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유월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의 신앙적 뿌리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풍요로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그들 문화에 젖어들어 유월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문화는 농경문화이기 때문에 모든 절기들은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집트 노예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 백성이 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삶의 중심이 되면서 신앙의 문제는 뒤로 밀려 어느 순간 잊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유월절이 다시 등장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남유다의 13대 왕 히스기야, 16대 왕 요시야 왕 시절입니다.
그 왕들은 이스라엘 신앙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선한 왕들입니다.
그들은 잊혀진 유월절을 다시 시작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 깨달은 것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혹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소홀히 여기지 않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잊어버린 것보다 더 나쁜게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있긴한데 나를 무시하고 소홀히 여긴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그것은 위선이 되는 것이기에 더 나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구원을 소홀히 여긴다면 그것은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의 무게중심이 주님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 급할 때만 주님을 찾는 스페어 타이어형 신앙, 내 할 거 다하고 시간날 때만 신앙생활하는 취미생활형 신앙, 세상에 가면 세상과 비슷해지는 카멜레온형 신앙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이라는 유명한 책을 보면 우선순위 실험이 나옵니다.
작은 자갈과 모래를 컵에 먼저 담으면 큰 돌을 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큰 돌을 먼저 담으면 작은 자갈과 모래 모두 담을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은 마치 큰 돌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잘 세울 때 인생의 모든 것들이 질서를 잡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 일정표에 적힌 우선순위가 아니라 당신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의 시작이 유월절이었다면, 이제 우리 인생의 유월절이자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하루가 시작되며, 우리의 일주일이 시작되며, 우리의 한 해가 시작되며,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자임을 기억합시다.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를 예수 그리스도로 삼아 우리 구원을 소홀히하지 맙시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한장만 더 넘기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길을 시작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외줄타기같은 삶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다리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등에 올라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광야길을 인도해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십니다.
2023년 새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등에 올라타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런 저와 우리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