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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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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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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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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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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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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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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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0.02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78LIKELY
Conscientiousness
0.46UNLIKELY
Extraversion
0.35UNLIKELY
Agreeableness
0.82LIKELY
Emotional Range
0.91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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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새출발, 통과의례
우리는 언제나 새해와 함께 새로운 다짐을 하며 새로운 출발을 기대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연초의 각오와 다르게 작년과 다르지 않은 한해를 살아간다.
그러나 항상 그런것은 아니다.
어떤 해는 우리 인생에 큰 변화가 오는 시기를 겪기도 한다.
무엇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가?
프랑스 문화인류학자인 아놀드 반 게넵이 쓴 <통과의례>라는 책에서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들이 거치게 되는 과정들에 대해서 소개한다.
그는 우리가 일정한 지위나 상태에서 다른 지위나 상태로 넘어갈 때 세 단계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분리단계다.
이 단계는 잘못된 습관, 나약함,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습성으로 부터 결별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적용하면 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 사람로 살아가기 위해 옛사람과의 결별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전이단계인데 첫번째 분리단계가 '비움' 이라면 두번째 전이단계는 채우는 단계다.
새로운 자신을 채워넣는 시간이다.
그런데 반 게넵은 이 단계에서 새로운 자아는 혹독한 고난을 거치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분리와 전이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마지막으로 새로운 지위에 오르는 통합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이론에 근거하면 새로운 자아는 지나온 인생을 돌이키는 회개를 너머서 새로운 자아를 덧입는 광야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첫번째 터닝포인트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시작하신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첫번째 터닝포인트가 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예수께서는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30여년 동안 마치 옆집 동네 형 동생과 같이 때론 착하고 성실한 아들로써 평범한 삶을 사셨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유대의 왕으로써, 온 인류의 구원자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기 시작하신다.
마태복음을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중심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첫번째 부분이 예수님의 사역준비기간이라면 두번째 부분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 세 부분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말씀이 두 구절 있는데 그중 첫번째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17절 말씀이다.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으로 사역준비를 하는 기간에서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써 본격적인 사역을 하기 시작하시는 구분점이 바로 이 때로부터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다.
예수께서는 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광야시험을 통과해야 했는가?
광야시험의 이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모두가 겪는 일
모든 인생이 광야시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인생에 광야를 경험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다.
울림과 떨림이라는 분이 이런 글을 썼다.
광고는 건너뛰기가 있어도 광야는 건너뛰기가 없다.
유튜브 전성시대다.
이제 유튜브 모르면 간첩이다.
아니, 요즘 간첩도 유튜브는 안다.
유튜브 중간에 광고가 나오면
지루하고 따분하지만, 그래도 몇 초만 버티면 건너뛰기 할 수 있다.
광고처럼 우리 삶에 닥친 광야도 건너뛰기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야에는 건너뛰기 버튼이 없다.
광야는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예배하는 장소다.
그런 점에서 에덴동산도 광야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예배하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점에서 아담과 하와는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불신하여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
내 인생에 광야
내 인생의 광야같은 시절이 많았지만 단순히 어려움을 겪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시간을 말하라면 호주 공동체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30대의 절반 이상을 보낸 호주 공동체는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 가정을 포함해서 공동체 모두가 믿음으로 살았다.
내가 일해서 번 만큼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는 오로지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곳이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신기하던 캥거루들은 사방에 똥을 싸놔서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씻는 물은 저수지에서 끌어다가 썼는데 수도관이 녹슬어서 노란물로 목욕을 했다.
먹는 물은 정수 시설이 잘 안되서 지붕에서 빗물을 받아서 마시며 살았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38도가 넘어서 나무 그들에 앉아 있는게 더 나았다.
공동체 사역 초기에는 영어로 일상 대화는 가능하지만 큰 주제들을 다루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주로 했던 일이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을 청소하면서도 무엇인든 주님을 위해서 하면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했지만 때론 내가 이걸 하려고 여기와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구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큰 기대를 안고 갔지만 그 기대는 몇달이 못되어 다 무너지고 말았다.
말은 우리가 모두 다 평등하다고 하지만 어떤때는 한국보다 더 권위적이고 수직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함께 땀흘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위치에 따라서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정식 멤버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인터넷도 공동체 음식 사용에도 제한이 많았다.
공동체 대표 목사님을 제외한 나머지 리더십들은 항상 나를 견제했고 보이지 않게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예수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완전한 인간이시다.
성자께서 성육신 하신것은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 인간으로써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 하여 대속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펴본대로 세례요한으로부터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시는 것은 신으로써가 아니라 인간 예수로써 모든 인생이 거쳐가야만 하는 광야시험을 동일하게 경험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광야를 통과하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에 생각해 보았다.
말씀과 기도가 서로 짝인 것처럼 회개와 믿음도 서로 짝이다.
참된 회개는 참된 믿음을 낳는다.
새 해 첫 달을 보내며 우리가 주님 앞에 참된 회개의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 했다면 인생의 광야를 지날때 우리는 어떤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떡을 돌처럼 여기는 일
참된 믿음은 돌이 떡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것이다.
사단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신 예수께 나와서 도전한 첫번째 시험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사단이 이 시험을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만나는 마치 돌처럼 단단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솜사탕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먹기에는 너무 단단한 씨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주어 맺돌에 갈아서 먹거나 절구에 찧고 가마에 삶아서 먹었다.
사단이 돌들을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이유다.
사단은 예수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깟씨와 같은 만나를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것처럼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사십일 동안 금식하여 굶주린 배를 채워보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신 목적이 단순히 그들의 배를 채우시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단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과 같이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만 집중하고 있다.
<오늘의 연관>
참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이 내 인생에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행하신 일들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그 뜻에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오해하여 돌이 떡이 되는 기적을 바란 다. 예를 들어 시험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고 주님 이번 한번만 성적이 잘 나오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돌이 떡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평소에는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다가 다급하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주님은 돌들로 떡이 되게하라는 사단의 시험앞에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답하신다.
마태복음에는 만나를 주신 이유와 목적이 잘 나타나지 않지만 예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를 보면 그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2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걷게 하신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첫째는 낮추시고 시험하시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다.
이 일을 위해서 3절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고, 만나를 먹이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결국 이루고자 하시는 고백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우선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본분이며 그것이 참된 회개와 믿음의 삶 이라는 것을 신명기는 말씀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 떡이 되기를 바라는 인생이 아니라 떡을 돌처럼 여길 수 있는 인생으로 만들기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육적인 욕구를 우선시했고, 므리바에서 하나님을 시험했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금송아지로 만들어 섬겼다.
이것이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돌이 떡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 묵상하다가 만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민수기에서 중요한 단어를 발견했다.
5절에 ‘값없이’라고 말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워하던 것은 값없이 먹던 생선과 야채였다.
그들은 노력하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애굽의 종으로 살기만 하면 얻을수 있었던 양식을 사모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을 마치 ‘값 없이’공짜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원은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값을 치뤘기 때문에 얻게된 것이다.
주중에 아비조 형제가 교회 단톡방에 이런 글을 올렸다.
“You contribute nothing to your salvation except the sin that made it necessary.”
- Jonathan Edwards-
직역하면 “당신은 구원을 필요하게 만든 죄 외에는 당신의 구원에 어떤것도 기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가 얻은 구원은 공짜로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대가를 지불하지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아무런 노력과 수고를 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고 필요한 것들을 다 얻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연관>
지난 월요일 우리 교회가 소속되어있는 합신동서울노회 개척전도위원회 워크샵에서 우리교회 개척이야기에 대해서 나눴다.
안그래도 어려운 개척인데 코로나 시기에 교회를 개척하여 지난 1년 반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서 나눴다.
늘 하는 얘기지만 시작부터 오늘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도들의 기도와 물질의 헌신과 멀리에서도 교회를 생각하며 이른 아침부터 차를 타고온 희생이 있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최선을 다하려고 힘썼다.
연초에 특별새벽기도를 실시간 유튜브 온라인으로 하면서 좋은 영상과 음성이 만들어 질 때까지 수없이 반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상을 보는 성도들의 마음에 우리는 작은 교회라서 뭔가 부족한 교회라는 생각이 들게하고 싶지 않았다.
성도가 10명이 되지 않아도, 생활비가 없어서 어려워도 선교사님들을 먼저 후원하고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 때문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율법을 쉽게 말하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굳게 세운다고 말한다.
참된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은 더욱 힘을 다해서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일들은 하지 않도록 피터지게 싸워 이기는 것이다.
구원을 이루라 말한다.
마치 농부가 밭을 기경 하듯이 노동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뒷짐지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때문에 더욱 힘써 주를 섬기는 것이다.
예수의 형제이며 제자이기도한 유다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라고 말을 하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형제인 유다가 이방의 한 교회를 향하여 믿음의 도를 위해서 힘써 경주하고 분투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인데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복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40일을 광야에서 금식하고 주린 배를 채우시기 위해 돌들을 떡으로 만드실 수 있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않고 말씀으로만 그 일을 행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행하는 것를 거부하셨다.
오히려 주님은 떡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선택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 일에 실패한 우리 때문이다.
누구도 이기지 못한 일
역사상 이 세가지 시험을 다 통과한 인생은 없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인간으로써 광야시험을 받으신 이유는 이제까지 역사가운데 예수께서 받으신 세가지 시험을 다 통과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이 광야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광야시험을 온전히 통과한 사람은 없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첫번째 광야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로 말하면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일을 확장하기 위해서 점점 남쪽으로 내려갔지만 네게브 광야에서 기근을 만났을때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가기 보다는 모든 것이 풍부했던 애굽 땅으로 내려가기를 선택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고 그녀를 애굽 왕 바로에게 내어주었다.
그는 광야시험을 이기지 못했다.
모세도 광야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목이 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반석을 명령하여 물을 내라 고 하신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분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반석을 명하는 대신 화풀이를 하듯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다.
물은 솟아나왔지만 이 일로 인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고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화를 참지못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 하나님은 모세의 불순종이 믿음의 문제였다고 말씀한다.
결국 광야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관한 문제다.
따라서 광야시험은 곧 믿음의 시험 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실패가 곧 광야시험의 실패로 이어졌다.
주님은 에덴동산의 아담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모세도 할 수 없었던 그 시험을 통과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가운데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이 일이 우리 가운데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세가지를 나누기 원한다.
<교회에 적용>
첫째, 대충 신앙생활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실하라
둘째, 무책임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 바란다.
우리집 내 책상 위에 하용조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이런 말씀이다.
“다른 사람이 기도해 준다고 내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직접 기도하십시오.”
개인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라.
셋째, 신앙소비주의자가 되지 않기 바란다.
신앙소비주의라는 말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필요만 채우고 그 외에 일에는 무관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만족과 유익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라.
이것이 참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은 오늘 그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것이 광야시험을 통과하는 참된 믿음의 길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이 모든것이 더해지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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