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0. 새벽예배. 교회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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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35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

민수기 6:13–27 NKRV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그는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물로 숫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의 머리 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숫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받들어올린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이는 곧 서원한 나실인이 자기의 몸을 구별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헌물을 드림과 행할 법이며 이외에도 힘이 미치는 대로 하려니와 그가 서원한 대로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서론

올해 우리 교회는 “다시 초대교회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삼년의 시간 동안 코로나 사태로 움츠러들었던 교회가 다시 한 번 회복되어 마치 초대교회와 같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역사를 세상에 생생하게 드러내게 되길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올해 신성교회의 모든 모임과 사역들 가운데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올해 신성교회의 모든 행보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품고 한 해를 시작한 저희에게 하나님께서 정말 알맞은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이게 참 설교를 하는 입장에서 정말 신기하게 느껴지는 일인데요, 새벽예배 때는 제가 따로 설교할 말씀 구절을 고를 수 있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매일성경의 순서와 동일하게 새벽 설교를 준비하니까 대략 두달 전부터 설교할 본문이 미리 정해져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제가 따로 본문을 고른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는데도 불구하고 정확히 지금 우리 교회에 필요한 말씀이 정해져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섭리하심입니까? 저는 매번 새벽예배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이런 것을 느낍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교회의 회복을 꿈꾸며 교회를 새롭게 세워나가려 하는 우리에게 요즘 새벽에 함께 나누고 있는 민수기의 말씀은 정말 우리가 꼭 읽고 실천해야 할 말씀입니다. 민수기에는 온통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이 가득하기 때문이지요. 초대교회를 외치는 우리에게 민수기보다는 사도행전이 더욱 적절하지 않냐고 물으시는 성도님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민수기야말로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고민할 때 가장 필요한 말씀 중에 하나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고민할 때 민수기를 자세히 들여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나타난 놀라운 역사를 함께 고민하며 기록을 남긴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전한 바 있습니다. 행 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히브리인들,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누가는 광야 교회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미 교회는 수천년 전부터 있어왔고 그들 또한 교회에 대해 고민할 때에 구약성경을 자세히 살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시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구약성경을, 특별히 민수기를 자세히 들여다볼 때에 교회를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길 원합니다.

본론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나실인들이 지켜야 할 규정과 제사장의 축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새롭게 세워가는것과 무슨 상관일지 궁금하시지요? 얼핏 보기에 오늘의 본문과 교회 공동체가 지녀야 할 모습 사이에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관련이 깊습니다. 질서라는 부분에 있어서 그렇지요. 오늘의 본문은 교회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영적인 질서에 대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어제 함께 나누셨겠지만 나실인은 짧게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바치기로 서약해서 자신을 구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서원은 2절에서 특별한 서원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특별한”에 해당하는 원래 히브리어 “야필”은 “놀라운, 경탄스러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나실인들의 서원은 아주 이레적이고 놀라운 일임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이들의 헌신은 레위인들의 헌신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레위인들보다 더욱 엄격하게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했지요. 레위인은 제사를 섬기는 차례를 앞두고서가 아니면 포도주를 마시는데 제한이 없었지만, 나실인들은 그들이 서약한 기간 동안 포도주는 물론이고 포도로 된 어떤 것도 입에 댈 수 없었습니다. 또한 나실인들은 그들이 서약한 기간 동안 머리를 온전히 유지해야 했고, 레위인들이 시체와 접촉했을 때 정결 예식을 치르면 곧장 회복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나실인들은 시체와 접촉한 후에 정결 예식을 치렀다 할지라도 그동안 구별하여 드린 날들은 무효가 됩니다. 레위인들이 오직 성막에서만 생활하며 섬기는 것에 비해 나실인들은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가야 했으니 이 얼마나 큰 헌신이었겠습니까?
이렇게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자신을 바치는 길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남, 녀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는 않았지요.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한 특심으로 혹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자신의 삶에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귀한 자기 자신의 삶을 말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놀라운 헌신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자들의 놀라운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연히 특별한 일을 이루어 가시지 않았겠습니까?
삼손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는 레위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 삶을 바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비록 그가 정욕에 넘어가 타락하고 능력을 잃긴 하였지만, 그가 회개하며 다시 한 번 헌신하였을 때에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거대한 신전 기둥을 끌어안고 힘을 쓰자 기둥이 넘어가버렸고 신전이 와르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 능력과 역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사사기에서는 그의 마지막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16:30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물론 삼손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치기로 서약하여 스스로를 거룩한 그릇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나실인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삶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셨을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백성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았겠지요.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영적인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지에 상관없이, 그들이 그것을 통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는지에 상관없이, 나실인은 레위인, 레위인 중에서도 제사장의 감독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떤 나실인이라 할지라도 처음 헌신할 때, 또 몸이 더럽혀져 다시금 헌신할 때, 그리고 서약한 기간이 마쳤을 때 모두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반드시 제사를 드려야만 했지요. 그가 아무리 거룩하다 할지라도, 그를 통해 얼마나 큰 역사가 나타났다 할지라도 나실인은 스스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을 통해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지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질서를 세우셨고, 모든 이들은 그 질서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나실인을 통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지에 상관없이, 그로 인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는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오직 제사장들에게만 하나님의 복을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나실인이라 할지라도 제사장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축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세우신 제사장이 백성들을 향해 복을 선언할 때 그들 위에 복을 내려주시겠다 약속하셨지요. 그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거룩과 능력에 기대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설령 선한 의도로 그렇게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심각한 교만이며 도전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분명한 질서를 세워두셨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질서에 순종해야 합니다.

결론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안에서도 나실인과 같이 하나님께 대단한 헌신을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헤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회자, 특히 담임 목사님의 감독을 받아야 합니다. 그의 헌신의 모든 과정을 담임 목사님께 지도를 받아야 옳습니다. 그것이 질서있는 교회를 세워가는 방법입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역에 있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구요, 내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의사의 최고 결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장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어떠함으로부터 나오는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내려주시는 권위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내내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어떠함에 기대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깨뜨리면 안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권위와 질서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기가 더더욱 어렵지요. 하지만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지식으로 교회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2023년 우리 모두 신성교회를 다시 한 번 초대교회처럼 세워가자 결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그런 교회로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잘 지켜지는 곳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헌신과 사역에 있어 지혜롭게 처신합시다. 모든 일이 교회의 질서를 따라 잘 운영되게 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통해 다시 한 번 교회를 건강하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이 땅에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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