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핵심
Notes
Transcript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예레미야 32:39–41 (NKRV)
39절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절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우리가 오늘 앞전 프로그램을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교회가 무엇 위에 세워졌다고요? 신앙고백, 이 신앙고백을 위해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라고 이야기했었죠?
오늘 설교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무엇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전하겠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뭘까요? 기독교의 대전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죠?
하지만 정말 동의하세요? 우리의 삶으로, 경험으로 고백되세요?
세상을 보면 전쟁과 기근, 고아, 부의 편증, 악한 세력들을 보고도 선하다고 할 수 있나요?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잖아요. 빽있으면 되는 세상이잖아요.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데도?
세월호, 이태원 이러한 사건을 보고도?
내 생각과 계획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정말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나요?
질문에 대답을 선듯대답하지 못하신다면, 확신에 가득차 당당하게 대답하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신앙생활에 문제를 가져옵니다. 기독교를 의무로 가득찬 종교로 오해하게 만들죠. 성경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한다고 하는데 잘 모르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 1 = 하나님은 선하지 않아
세상을 둘러보면 하나님이 선하다고 할 수 없어.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떻게 이렇게 악한 세상이 가능한거지? 선하시다면서 어떻게 내 삶은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든거지?
하나님에 대한 오해 2 =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
지성이면 갑천이다 라는 속담을 아신가요? 이 속담은 우리나라에 깊숙이 깔려있는 신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노력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깔린 전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도 없으시고 우리를 돌보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죠. 영화나 드라마에서 굿을 봤나요? 굿에서 흔히 하는 말이 뭐에요? “정성이 부족하다” 고작 그걸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냐 하는 것이죠.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자신을 감동시키라고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다.
모든 종교의 본질이 신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한 2명의 인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좋아하고 누리는 모든 기쁨을 잃어버릴 까봐 그리고 의무들로 시달릴까봐 기독교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은 기독교에 들어와 있지만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종교적 부담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이천년 교회사에서 가자 탁월한 신학자이며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신학자입니다. 그는 정말 똑똑한 천재입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머리가 남아 돌아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는 마니교에 빠졌어요. 세상의 온갖 것에도 빠져있었어요. 그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지적유희와 육체적 쾌락과 모든 것을 추구하는 것과 담을 쌓아야한다는 마음에 기독교를 꺼려했어요.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은 후 했던 고백을 인용해드릴게요. “한때 잃어버리게 될까봐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헛된 기쁨들이 한꺼번에 다 제거되었을때 정말 너무나 상쾌했습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신 당신은 진정 최상의 기쁨입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취하신 당신은 비록 피와 살에는 아니지만 그 어떤 즐거움보다 더 감미롭습니다. 마음속 그 어떤 비밀보다 더 깊이 숨겨져 있는 당신은 모든 빛보다 더 빛나는 분입니다.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을 찾으려는 인간의 눈에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당신은 모든 영광을 능가하는 분입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이시여”
그는 자잘한 기쁨을 잃어버릴까봐 하나님께 다가오짐 못했지만 하나님께 오자 하나님이 최상의 기쁨이라 이 모든 기쁨이 더이상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만난 하나님이며, 어거스틴이 경험했던 기독교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어거스틴의 말에 얼마나 동의가 되십니까?
두번째 사람은 사울 왕입니다. 사울은 평생의 절반을 블레셋과 싸웠던 왕입니다. 블레셋은 청동무기를 가졌고, 이스라엘은 청동무기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열세했죠. 사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극단적 조치를 취합니다. 오늘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아무도 먹지말고 금식하라고 합니다. 몸으로 싸워야하는 전쟁에서 금식을 하고 내보냅니까? 이런거죠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 금식을 시킨거에요. 머리가 잘 돌아갈까요? 배고파서 집중이 잘 될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왜? 믿음이 좋아서? 불안해서 한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단적 행동이 금식입니다. 우리가 부모님과 싸울 때 하는 극단적 행동이 뭐에요. 금식이잖아요.
사울은 이기고 싶었지만 확신이 없어서 자신의 극단적 행동, 태도로 위안을 얻고 싶었던 거에요. 이렇게까지 하는데 하나님이 안도와주실까?
이것들은 신앙 ,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을 막으시는 분도 아니시며 나를 감동시켜봐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처음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하는데요.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은 왜 창조하셨을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왜 시작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모든 것의 핵심이자 정체성이 되니까요.
이 질문과 함께 다른하나 하나님은 천지창조 전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설교와 책으로 이를 성경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심심해서 천지를 창조하셨을까요? 아니요. 잠 8:30-31 을 읽어볼까요?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장은 지혜가 의인화해서 나라고 말하고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 지혜가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죠? 내가 그 곁(성부하나님)에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고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는 날마다 항상 기뻐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기빈다. 하나님은 몇분이신가요? 한분? 세분?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죠.
삼위일체라고 하는데요. 이를 쉽게 말하면, 세분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 한분이시다. 이는 마치 내가 너희에겐 교육사님이고, 사야에겐 남자친구이고, 하유에겐 삼촌이고, 집에선 막내아들인 것처럼 하나님도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과 모습이 다른 것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로마신화처럼 다신론 3명의 신을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성부 성자 성령이 33,33,33으로 존재했다가 하나로 합쳐지면 100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어려운 말해서 미안해요. 갑자기 신학교 강의가 됐네요?
그러나 제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하나님은 영원토록 혼자라서 심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구절을 살펴볼까요? 요 17:1 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건데요. 요한은 그의 곁에서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의 교제를 엿들은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제 때가 찾으니 사역을 마무리하고 예전처럼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영광이라는 말이 추상적인데요. 이는 잠언에서 말한 기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영화란 (아이들의 표현으로하자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 최고라고 하는 것이죠.
5절과 24절을 읽어볼까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창세전 영화를 가졌다고 하는데, 그 영화는 성부가 성자를 사랑하는 것, 성자가 성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까? 이는 창조의 동기와 목적을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외롭고 심심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완벽한, 완전한 교제 곧 사랑하며 즐거워하며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교제에는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행복과 기쁨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눈높이를 만족시킬 대상이 있을까? 우리는 어떤 행위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존재로선 다른 이야기지만요.) 그 대상을 만족시킬 대상은 유일하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쁨을 어떤 존재에게 주고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쌍방향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물고기는 하나님이 삼키라면 삼켜야 하지만, 요나는 니느웨에 가라고해도 싫다고 안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과 쌍방향 으로 교제할 수 있는 관계에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교제를 통해서 기쁨을 주고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기쁨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살펴볼가요?
천지 창조의 순서를 보면 부성애적인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둘째날 사람을 창조했다면? 다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또 인간을 창조하시고 어디로 이끌어 가셨죠? 에덴 동산. 에덴동산의 뜻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기쁨입니다. 기쁨이라는 에덴동산으로 사람을 이끌어 오시고 그 동산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말씀하시죠. 이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야. 너가 마음대로 먹고 마셔도 돼. 단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만 먹지마.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누리라는 것을 말하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모든 것을 보시며 보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시는데 딱 하나만 좋지 않게 여기셨어요. 뭘까요? 바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입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은 다 아시고 하와를 만들어주시죠. 그런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아담이 에덴동산에 1년쯤 살다보니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서 하나님께 짝을 만들어 달라고 40일 식음을 전폐하며 짝을 만들어주시기 전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해서 하나님이 그래 아휴 너 똥꼬집 누가 말리겠니 알겠다. 너 소원대로 해줄게. 자 이제 여자를 만들게 가서 흙좀 퍼와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아담이 외로움을 느끼기도 전에 아담이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일하시며 이루신 것입니다. 아담에게 무언가를 시키기도 않았어요. 그냥 아담을 재우십니다. 아담을 재우시고 외과 의사가 되셔서 수술을 하시죠. 완전한 여자를 만드신 후에 아담을 깨우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일어나봐 너를 위해 내가 만들어놓은게 있어. 이거봐바 서프라이즈~ 하고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연구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기쁨을 주고싶으셔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니까
바로 이 기쁨이 천지창조의 동기였습니다.
천지창조의 동기가 하나님의 기쁨을 주기 위함이라면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인간이 기뻐할 때, 우리는 이를 종교적으로 은혜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은혜받았다는 증거는 기쁨의 정서입니다.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칠 때 은혜를 받은 것이죠. 이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고 그것이 은혜롭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헤를 받을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에배란 쉽게 말해 하나님은 이런 분이세요. 하나님은 합당하신 분이에요 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것이 예배, 찬양, 감사 모든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행하고, 이루고 혹은 하지않음으로 영광을 받지 않으심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개념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하기 쉽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는 말은 매우 힘든 일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해야하는데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돈쓰지 마라, 새벽기도가라, 극장가지마라, 노래방가지마라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된다 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이것들을 그만해야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의무와 고역으로 가득찬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기호와 내 기호가 너무나 달랐으니까요.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즐거워한다라고 했을 때 우리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내가 찌그러저야 하고, 원치 않는 일을 의무적으로, 억지로 함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을 구별해야합니다.
우리가 까다로운 윗사람의(선생님이든, 목사님이든, 회사 보스이든) 비유를 맞울 때 커피도 사주고 밥 값도 내고 그 사람의 요청과 의무를 맞춰야 해요. 그럴라면 내가 찌그러저야 하죠.
반대로 내가 좋은 보스 밑에 있을 때는 그를 기뻐할 수 있어요. 그에 대한 존경함으로 커피도 사고 그의 요구와 의무를 맞추는게 좋아요. 기뻐요. 이런 보스가 어디있어 ?!
똑같아요.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것, 인조이하라는 것은 내 마음이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차는 것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억누르고 억압당하고 답답하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며 이런식으로 영광받으시지 않으셔요.
의무와 기쁨의 차이를 생각해보세요.
여자친구에게 너의 사랑의 언어가 뭐냐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헌신이래요. 제가 그 말을 듣고 최대한 헌신하기 위해서 노력해요. 그중에 하나가 가방을 들어주는 거에요. 여자친구가 딸 둘의 막내인데. 집에서 아들역할을 도맡아해요. 무거운 짐을 옮기다던지, 장보고 오면 짐을 든다든지. 그래서 제가 여자친구랑 같이 있을 땐 무조건 가방을 들어줘요. 짐은 최대한 안맡겨요. 제가 들죠.
근데 여러분 내가 여자친구 가방을 들어주는게 굴욕인가요? 찌그러지는 건가? 별볼일 없는 남친인가요? 전문용어로 꼬붕인가요? 아니요.
제가 그렇게 행동함으로 여자친구는 당연하고 나역시 기쁨이 가득합니다. 여자 친구의 가방을 들어줄 수 있는건 저의 특권이니까요. 너의 가방을 들어주는건 나의 특권이고 나의 행복이야. 라고 나중에 꼭 말해야겠네요.
이것이 인조이하는 것입니다.
의무로 한다면 기뻐할 수 없어요. 아 진짜 오늘도 가방 들어야하네. 피곤하고 팔아프고 어깨 아픈데. 지가 들것도 아니면서 뭘 또 이렇게 다 싸왔대? 기쁨이 없어요.
마찬가지에요. 의무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은 이를 카운터 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시금석은 기쁨이며 핵심이 기쁨이에요.
존파이퍼 기독교 희락주의 설명하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무엇으로 최고의 만족을 누리고 있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내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성적이 오를 때,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을 때, 선물을 많이 받을 때, 주식이 올라서 막 잠이 안올 때 그것들은 우리에게 최고의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로한다면 아이폰 14프로산다고 몇날 며칠을 유튜브로 리뷰보고 고민하고 사전예약한다고 하루를 날리며 쿠팡줍줍하고 아이폰 프로가 오기까지 막 잠도 못자고 설레서 그 생각만 할 때 아이폰 14는 나에게 최고의 영광을 받는 겁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모니터링한다면 아! 아이폰 14가 최고구나 하겠죠.
방학마다 일주일간 조카를 보러 서울을 갑니다.
이번에도 새해때 갔었는대요. 가서 하유 하임이랑 엄청 놀아주고, 영화도 보러가고, 키즈카페도가고, 큰형과 형수님 둘이 슬램덩크 시사회 보러갈 수 있도록 6시부터 11시까지를 혼자서 애를 봤어요. 그날밤 큰형이랑 형수님이랑 들어와서 하는 말이 너무 행복했대요. 너무 즐거웠대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요. 대기삼촌 이제가면 어떡하냐. 서로 말해요. 대기삼촌가면 제일 아쉬워할 사람이 하유라고, 하임이라고, 형수님이라고, 큰형이라고
서로 저를 막 영화롭게 해요. 피곤이 싹 몰려갔어요. 여러분 큰형네 가족 모두가 제가 서울에 일주일 감으로 인해서 너무나 행복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제게 최고의 삼촌이라는 영광을 안겨줬죠. 서로 기쁨이 충만한거에요.
신앙생활은 등떠밀어서 해야하는 것, 좋아해야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의무로 둘러싸여 억지로 해내야하는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알수록, 경험할수록 하나님이 너무 좋은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본문을 봅시다. 본문이 어딘지 아세요?
걱정마세요. 본문이 결론이에요.
본문은 새언약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중생케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39-41 계속해서 복을 이야기하는데, 이때 복은 히브리어 토브입니다. 토브는 “좋았다 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복을 준다는 말은 하나님이 선을 베푸신 다는 뜻입니다.
39절은 즉 선을 베풀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마음, 한 길, 한 목적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씀이에요.
NLT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어요. “그들 자신과 그들의 후손들의 선을 위하여 나를 영원히 예배하도록”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언약의 내용은 내가 너희에게 선을 베풀기 위해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결단코 그만두지 않겠다는 약속이에요.
NLT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며 그 내용은 이렇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선을 베풀어주는 일을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나를 예배하고 싶은 열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결단코 떠나지 않게 만들 것이다”
시편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합니다.
이때 따른다는 표현은 팔로우가(졸졸졸 따라오는 것) 아니라 추격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도망가려는 경향을 가지지만 하나님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추격하여 나를 잡으십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비유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경찰차 쌍불을 켜고 따라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불
결코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갈 수가 없죠. 헬기도 띄우는데.
하나님이 결국 우리를 잡아내십니다. 당신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으로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40절은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서 선을 베푸는 것을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거야. 내가 너희를 잡아낼 때까지
너의 인생을 내 품에 안아줄 때까지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붙잡아서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두게함으로 나를 떠나지 않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마음에 나를 예배하고싶은 간절한 열망을 준다는 것인데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너무 찬송하고 싶어 하나님이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선하심으로 나를 찾아오셔, 내 삶의 모든 순간 순간에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범벅이 되어있어.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싶어 이런 갈망을 이야기하죠.
성경의 인물들, 교회사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면
예수 믿고 고난밖에 없지만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그 초자연적인 일을(떠나지 않게하심)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에 입니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다니엘 풀러 신학자는 41절을 하나님의 사명선언문이라고 표현합니다.
서기관이 주님에게 율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마음과 뜻과 힘을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는데 우리만요 ?
하니님은요? 하나님의 대답이 41절입니다 나도 기쁨으로 너희에게 복을 주는데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할거야. 너희에게 선을 베풀거야
근데 놀라운 점은 그렇게 행하는 것을 의무로 하지 않으신데요. 기쁨으로 행하신대요.
NLT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어요. “나는 너희에게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선을 베푸는 데에서 내 기쁨을 발견한단다”
다니엘 풀러의 비유를 들어볼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책상머리 앞에 사명선언문을 붙였어요. 거기엔 이렇게 써져있죠. 나의 사명은 밑줄 긋고 아무개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내 이름을 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명 선언문 = 나의 사명은 대기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전 나를 아시고 선택하심 내가 태어나서 살아온 모든 순간에 나보다 늦게 일어난 적이 없음(주무시지 않음 비유)
오늘 대기의 삶을 미리 아셨고 준비하셨고 계획하셨고 당신의 섭리와 경륜속에서 나에게 선을 베풀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내 인생에 단 하루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하나님이 어디있습니까? 어떤 종교에서 이런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홍해 후 모세의 대답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다윗의 고백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자들의 예배, 고백입니다.
일평생 지치지 않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며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여기에 실패하면 우리인생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조이함으로 영화롭게 하는 일에 실패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돈, 성공, 소원을 예배하는 것 x
없으면 불행하다 여기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우상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인조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지만 하나님은 알라딘 지니와 같은 도구적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지만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알게하며 고백하게 하십니다.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내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하며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산다고 고백하게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무감동한 죄인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까지 그치지 않고 선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일을 실로 이루셨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신 줄 알았는가? 만일 당신이 지금까지 이처럼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닫고 살아왔다면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고 살아온 것인가? 기억하라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