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5_주일예배_눅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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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처음

Luke 4:1–13 NKRV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대략 3년간의 공생애를 사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공생애를 출발할 때 처음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새삼스러운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흔히 초발심(初發心)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초발심이 어떤 것일까? 그런 식으로 물음을 던져 본 적이 없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님의 초발심이자 동시에 공생애 전 기간 일관했던 마음을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4장 14절부터 이어지는 갈릴리 전도 시작을 알리는 말씀과, 이어 18절 "주의 성령이 나에게 임하셨다..."로 시작되는 에수님의 '메시아취임사' 바로 전에 나오는 오늘 본문 말씀이 구세주로 메시아로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깨달음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일러 '메시아 자각 기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깨달음, 메시아로서 자각은 광야에서 사탄과의 유혹을 이겨내는 과정으로 극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전통에서 항상 위험스럽고 따라서 고통의 시련을 주는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생활을 했다는 것도 바로 그 위험한 곳에서 모진 시련을 견뎌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광야는 바로 위험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장이기 때문에 거꾸로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시련의 장이요 연단의 장으로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했던 이들이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것이나 초기의 수도원들이 광야에 자리를 잡은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야는 물리적.지리적 공간으로서 외지고 황량한 곳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온갖 시련과 유혹이 끊이지 않는 우리의 삶의 현장 그 자체가, 그 시련과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고통스러운 광야요, 거꾸로 그 시련과 유혹을 물리리치고 거듭난 삶을 살게 된다면 거룩한 장소로서 광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시고 동시에 그 유혹을 이겨낸 광야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광야가 아니라 구체적 몸뚱어리를 가지고 살았던 삶의 현장 한복판일 수 있습니다. 이 삶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유혹을 받습니다. 아니 번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 묻습니다. 아니, 참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바른 길이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그 유혹이 사탄 / 마귀의 제안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귀는 언뜻 보면 마치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에서 대립되는 인격적 실체인 것 처럼 보이지만, 성서는 마귀를 그와 같이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실체로서 마귀가 아니라, 그저 피조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의 한 면을 마귀의 일로 묘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사람을 궁지에 몰아 넣는 힘, 실족하게 하는 힘, 그것을 성서는 마귀요 사탄이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귀의 유혹은 바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서 떠나지 않는 번민의 실체요 유혹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이 쉽사리 선택하는 그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는 길들입니다. 너무나 뻔하게 잘못된 길이라거나, 뻔히 고통스러운 것은 유혹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에게나 시험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혹은 항상 달콤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쉽사리 선택할 수 있고 또 안락함을 누리게 해 줌으로써,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것들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바로 그러한 유혹을 극적으로 나타냅니다. 첫 번째로 마귀는, 40일을 금식해서 시장한 예수더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라"라고 유혹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물질의 유혹입니다. 소유의 욕망이며, 물질적 번영 / 발전의 유혹입니다. 일확천금금의 유혹입니다. 경제적 유혹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마음 가운데에는 그러한 유혹이 없는지?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싶어서,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이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물질적 소유의 욕망은 끝끝내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는 여기에 대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마태복음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합니다.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시무룩해진 우리 신앙인들은, 말씀으로 산다는 말에 곧바로 답을 찾고 소위 영적 해결의 돌파구를 찾습니다. '그렇지 물질적 생활도 영위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지!' 하면서 물질적 삶과는 별개로 하나님의 말씀의 차원을 덧붙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물질적 삶 따로 영적 삶 따로 분리시켜 자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빵으로 사는 삶에 정확하게 맞대응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빵은 빵대로 추구하고 또 여기에 덧붙여 말씀은 말씀대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빵으로 살아야 하기는 하되 그 빵으로 사는 삶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말씀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의미를 구체적으로 새기자면, 빵을 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가 깃들어야 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빵을 나눌 수 있는 지혜, 빵을 나누는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고 자기를 숭배하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권세와 명예의 유혹입니다. 정치적인 유혹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 한 번 찔금하고 내 말만 들으면 순식간에 권세와 영예를 누릴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너무 거창해서 평범한 우리들과는 거리가 먼 유혹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지위를 누리고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기를 즐겨합니다.
대권을 쥐는 것만이  권세의 유혹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일상의 어느 구석에서 특별한 지위와 이름을 차지하고픈 모든 욕망을 이 유혹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유혹이 아니라, 관습과 제도에 매여 사는 우리들에게는 떨쳐버릴 수 없는 현실입니다. 특히나 정말로 평범한 사람들 말고, 이 땅에서 그래도 뒤처지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찌 보면 일상처럼 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고 답합니다. 우리가 어떤 지위와 명예를 누린다 한들 그것이 우리 삶의 푯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절대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위와 이름은 설령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껍데기에 불과할 뿐, 네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깨우치는 것만이 네가 구원받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성경 말씀을 거들먹거리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악마는 해도해도 안 되니까 요렇게 하면 네가 넘어가겠지 하는 속셈으로 예수께 이와 같은 유혹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하니까,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하면서 이제 악마마저 하나님 말씀을 거들먹거리면서 유혹합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 너를 지켜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 번 입증해 봐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내비췬 구마자를 보고 '내 그럴 줄 알고 예수를 믿어 뒀지!' 했다는 드라큐라 이야기 같습니다.
말씀으로의 유혹, 신앙으로의 유혹입니다. 종교적인 유혹이라 할 것입니다. 조금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주술적 신앙의 유혹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밥먹듯이 범하는 유혹입니다. '하나님 이거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못 믿겠습니다' 하는 우리의 태도를 말합니다. 못 믿겠다고 선언하지는 않더라도 자기가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신앙이 다 이런 유혹에 빠진 신앙입니다. 우스개 소리 또 하나 할까요?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사이에 앉아 차를 타고 가는 목사/신부님께서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를 번갈아 외치는 이야기 알죠? 딱 그런 유혹입니다.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니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는 한마디로 일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지, 하나님을 네 손아귀에 넣고 주물럭거리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유혹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그것이 예수께서만이 받으신 유혹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유혹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살면서 우리를 그 세계로 억지로 끌어가려고 했던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우리와 똑같은 유혹에 시달리며 번민하면서도, 끝내 그 유혹을 떨쳐버림으로써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깨달았던 그 구원의 도로 마지막 죽기까지 일관하셨습니다. 출발의 시점에서 더불어서 이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기를 결단하신 여러분 모두 처음의 마음을 한결같이 지키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아주 소박하게는 새 해를 시작하면서 작정하신 결심이 있다면 그 결심을 금년 마지막까지 일관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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