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하드캐리] 여호수아, 남이 아닌 나를 보게하다(수2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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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1월 15일 주일 청년부
소제목 : 하나님의 하드캐리
제목 : 여호수아, 남이 아닌 나를 보게하다
본문 : 여호수아 23장 1-13절 *구355
결단찬양 : 하나님이시여
[도입]
제가 유치부 사역을 할 때, ‘우리 친구들이 잘못한 걸 말해볼까요?’ 라고 묻는다면, 정말 놀랍게도 그 어느 누구도 ‘저는 이런 이런 잘못을 했어요!’ 라고 말하는 아기들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아기들의 모습이 정말 순수하고 사회악이란 모르는, 그런 태도와 미소가 참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밝은 미소로 죄가 없다, 잘못한게 없다 말한 친구들이 예배 후에 친구를 밀치고, 분명 간식을 받아 손에 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간식 안받았다 말하는 이 친구들의 악함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낀 바 확실한 건, ‘인간은 악하다.’ 라는 것과 ‘인간은 약하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의 기록을 보면, 그가 잘못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전과 후를 설교로 녹여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다 싶어, 조금 더 깊이 묵상을 안할 수 없던 한 주 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호수아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그 또한 인간이었음을 결국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또 여호수아의 모습을 통해, ‘이게 하나님의 사람이구나’를 한 번 더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함께 나눌 때, 정말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길 소망합니다.
[여호수아의 연약함]
여호수아의 연약함이라 하면, 혹시나 떠오르는 것이 있으신가요? 저 역시 특별히 여호수아의 연약함이라 떠오르는 사건은 없습니다. 다만, 여호수아에게 있어서 위기가 있었다면, 먼저, ‘아간의 범죄’ 였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간의 범죄가 나옵니다. 작고 작은 아이성 점령에 있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연히 정복할 줄 알았는데, 분명 강하디 강한 여리고성을 정복한 자들인데, 나약한 아이성 하나에 패배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가 된 것입니까? 7장 1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합시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긴 이 구절을 통해 원인됨이 무엇입니까? 지금 누군가 하나님의 물건을 도둑질 했다는 것 아닙니까? 도둑질한 것이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다시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 라고 으름장을 놓고 계시니,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렇게 여호수아의 주변 사람인 아간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간의 범죄가 밝혀지고 해결되자 아이성 점령에 성공하는 엔딩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9장은 또 어떤 사건으로 여호수아를 힘들게 합니까?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를 속이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사건이 여호수아의 연약함을 보이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과 조약을 체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9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그렇다면 이 구절을 통해 드러나는 여호수아의 연약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께 묻고 또 행하던 그였기에, 지금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저 자신들을 찾아온 이들의 행색을 보며 너무 가엽기에 그지 없어 조약을 맺는,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던 여호수아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아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거짓됨은 삼일만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이들을 내치거나 돌로 쳐 죽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9장 22절과 2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어찌하여 심히 먼 곳에서 왔다고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대를 이어 종이 되어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리라 하니”
오히려 그들을 품습니다. 아마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가나안 족속이 왜 굳이 우리에게 이런 거지 행색을 하고 찾아왔을까? 이렇게 행동하는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을 내치거나 돌로 쳐 죽이는 결정을 내리기보다, 그저 품어주기로 결정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됩니다.
또한 추측이나 여호수아의 품어줌으로 인해 포로 후기 시대 이들이 제사장의 제사를 돕는 자들로 세워진 느디님 사람들이 이들의 후예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여호수아는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위협과 또 행색만 보고 결정하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하는 연약함을 보이게 됩니다. 모세와는 정말 차원이 다른 연약함이자, 또 앞으로 다룰 인물들에 비하면 정말 선하디 선한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인 것 같습니다.
[여호와를 통해 변화되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도 선한 결정을 내리고 품고 배려할 수 있었음은, 여호수아의 삶에 여호와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가 그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의지했고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호수아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도전 받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믿고 따른 여호와는 어떤 분이길래, 여호수아를 이처럼 만들었는가? 여호수아의 삶과 우리의 삶은 도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어려움 상황 속에서 대처하는 것이 다른가? 이를 함께 나누며 우리 또한 앞으로의 삶 가운데 결단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여호수아의 하나님 : 1. 나의 하나님]
먼저 여호수아에게 있어서는 ‘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적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간의 범죄로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에도, 기브온 사람들의 거짓 속임때에도 그는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물었고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은 땔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의 삶에 있어 하나님 없는 삶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그의 첫 등장은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투 때 였기에 이전의 삶이 어떠한가 알 수는 없지만, 기록된 바 그의 삶에 하나님 없는 삶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로는 우리의 삶이 이러한 삶 되길 소망합니다. 믿는 자들의 삶에 고난이 없다? 글쎄요. 정말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고난은 필수 아닌 필수 조건이기에, 고난이 반드시 옵니다.
이 고난, 어떻게 이겨내시겠습니까? 하나님 손 붙들고 이겨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터널을 지날 때 우리는 ‘하나님, 저 터널을 피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기보다, ‘하나님, 저 터널을 어떻게 지나가야 하겠습니까?’하고 기도하는 사람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바라옵기로는 여호수아처럼 삶의 고난이 올 때, 여정의 시련이 올 때 ‘나의 하나님’ 손 꼭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아가시는 우리 청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여호수아의 하나님 : 2. 너의 하나님, 그러나 여전히 나의 하나님]
두 번째는 오늘 본문, 23장 3절을 통해 봅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한 구절에 ‘너희’라는 단어가 무려 4번이 사용됩니다. 즉 여호수아에게 있어서 남이 아닌 정말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 안녕한가를 확인케 하고자 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의 모든 기록들을 보면,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정말 즐겨 사용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신앙이 건강한가를 확인하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너희의 하나님이라 말하며 모든 나라 가운데 행하신 것들을 보았고, 대신 싸우셨다 말하며, ‘너희가’ 어떻게 신앙 생활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모든 기록들 여호수아도 경험했던 것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들 여호수아도 보았고, 전쟁 때마다 대신 싸워주신 하나님을 여호수아가 보았습니다. 즉 ‘너희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설명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은 결국 나의 하나님을, 내 입술로 고백하는 간증의 시간이며, 또 이 간증이 복음 전도의 현장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간증에는 너무나 큰 힘이 존재합니다. 간증은 글 몇 줄 정도가 아닙니다. 간증은 사람을 바꿉니다. 물론 간증에 ‘내 이야기’ 또는 ‘나의 의’가 더욱 드러나는 것이 요즘 시대 간증이지만, 사실 간증의 핵심은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준 은혜가 무엇인가?’ 또는 ‘나를 만나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가?’를 담아내는게 핵심 아니겠습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에도,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고백했던 그 순간에도 ‘나는’ 없었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남았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있어 너희의 하나님. 물론 다음세대를 향한 복음 전도이자 내 이웃의 신앙을 위한 권면이었겠지만, 먼저는 자기 스스로에게 있어 간증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간증에 힘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백성들이 어찌 반응합니까? 24장 16절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결론]
사랑하는 청년 공동체 여러분. 여호수아의 삶이 마치 모태신앙같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신앙 생활함에 있어 너무 자연스레 하나님이 찾아 왔고, 그래서 특별한 문제 없이 지내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위기와 연약함이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지혜롭게 이를 해결했습니다. 바로 ‘나의 하나님’을 보며 말입니다.
저번주 함께 나누었던 모세도, 오늘 함께 나눈 여호수아도 결국 하나님이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준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이 언제나 기준 되어 주셔서, 나의 하나님이 기준 되셔서 은혜가 충만한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2.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고백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3. 하나님, 이곳에 임재하셔서 우리 대신 이끄시는 청년 공동체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크고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하심이
나의 하나님을 기준 삼아 내 입으로 고백하는 자들과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고자 결단하는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